성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닦은 수건을 수건걸이에 다시 걸어놓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나와 방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 아직 어른 높이에 맞는 수건걸이를 사용할 만큼 키가 자라지 않았기에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그런 성휘를 위해 일부러 작은 수건을 성휘 키에 잘 닿는 곳에 걸어 두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김없이 큰 수건에 손을 닦고 가지고 나와 아무데나 던져 놓기 일쑤였다.“성휘야. 수건을 아무데나 놓지 말아라. 작은 수건을 걸어놨으니 그걸 써봐.”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은 매번 허공에 가 닿는지 성휘는 늘 새
메마르고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매번 물을 담아 마시던 흰 컵에엄마는 붉은 모과차를 타 주셨다. 다른 것이라 속일 수 없는 짙은 모과향이 내겐오래됐지만 여전히 낯선 친구와도 같았다. 할머니가 셋방 살던 주인집 마당에굳게 뿌리내린 커다란 모과 나무.그 나무의 열매가 매년 겨울이 되면붉은 모과청이 되어 우리집 베란다에 자리하였다. 왜 할머니의 모과청은 유독 더 붉고 맑은 선홍빛이었을까?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기억 속에 자리잡은 모과청의 빛깔은 점점 더 선명해질 뿐이다.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손녀는달달한 모과차를 음미
유독 물기 마를 날 없이 축축하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곧 무대에 오를 배우가 그 화려한 무대를 꿈꾸며 제 몸에 분칠을 하듯 나뭇잎들이 소리 없이 바쁘다. 가을의 나뭇잎을 유심히 바라본 적 있는가. 축 처진 나뭇잎은 비록 신록의 패기와 열정은 느껴지지 않지만, 듬성듬성해진 나뭇잎 사이로 축복 가득한 햇살을 듬뿍 받아 저마다 반짝인다.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은 고요하듯 찬연하다. 여름날의 폭풍우를 지나며 쌓인 관록 때문인지
딸에게 주는 선물, ‘황홀한 출산’“좀 아파도 돼!” 출산을 앞두고 있던 내게 남편이 한 말이다.아는 동생에게 첫 출산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고, 이야기의 핵심은 ‘무통주사’가 정말 좋았다는 거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남 일인 듯 얘기했다. “무통주사, 그게 뭐 좋은 거라고 권하는 거야.” 그리고 이어진 말은 지금도 떠올리기가 싫다. “좀 아파도 돼~”충격의 그 일은 만삭의 여자가 도서관에 책을 쌓아두고 출산이란 무엇인지 똑바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게 만들었다. 출산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자 숨어있던 비밀의 문이
땅 속, 캄캄한 인내의 시간이 선물로 준 알싸한 향 가득 머금은 마늘이, 실한 몸집을 뽐내며 맘껏 세상 구경을 하던 그 계절, 성휘네 집에도 햇마늘 한 단이 들어왔다.지인으로부터 올 해 마늘이 그렇게 좋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동네 공원 앞에 세워진 마늘 트럭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결국 햇마늘 한 단을 사온 남편. 본인이 까주겠다고 해 놓고서는 몇 주를 미루다가 드디어 마늘을 깔 의지를 내세운 그 날의 이야기다.무엇이든지 아들과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성휘와 함께 까면 재미있겠다면서 “성휘야. 아빠랑 마늘 까기 놀이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청량함처럼 상쾌할 때도 있지만 때론 서둘러 아침잠을 깨우는 햇살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지루한 하루 시작이 있기도 하다.‘밥 잘 안 먹는 다함이에게 뭘 만들어 줘야하나... 아침은 뭘 하고 점심은 또...’‘아이들과는 뭘 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나.. 어디를 가야 할까...?’엄마라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하면 이제 막 문을 연 나의 하루에 짙게 한숨이 밴다. 낮게 가라앉은 생각을 거두지 못하고, 아니 그런 하루를 살기로 마음 먹어버리면 정말이지 나의 하루는 마침표를 찍을
세상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 어쩌면, 결국은 사라져 버릴 것들에 눈이 멀어 저마다 아등바등. 어둠 속에서 무엇이 진짜 반짝이는 것인지도 모른 채 세상은 치열하다.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런 세상에도 여전히 희망의 꽃이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그 작은 꽃 같은 존재가 제 욕심 채우기에 바쁘던 삶을 내려놓게 한다. 삶의 초점이 안에서 밖으로 옮겨가며,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웠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한다. 그 존재란 지금도 어디선가 생명의 빛을 퍼트리며 세상에 나오고 있는 아기,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이다.갓
“진통이 약한데요? 오늘 안에 안 나올 것 같아요.”태아 감시 장치의 그래프를 본 간호사가 말했다. 집에서 진통 간격을 체크하고 최대한 천천히 온 것이었는데, 아직도 아기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간호사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산모가 이미 예정일을 8일이나 지나서 유도분만 하셔야 할 거에요.”순간 목구멍으로 찬 냉기가 가슴까지 타고 내려왔다. 나는 떨렸지만 애써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유도분만을 하지 않을 거예요. 촉진제도,
“좀 아파도 돼!”출산을 앞두고 있던 내게 남편이 한 말이다.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에 있어 때로는 부정적 감정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출산을 앞둔 내게 남편이 던진 다섯 글자가 불러일으킨 나비 효과라고나 할까. 그 말로 인해 며칠을 불편한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렸지만 결국은 출산에 대한 모든 생각과 경험을 바꾸었다.둘째 출산일이 가까운 3월 중순쯤, 마찬가지로 출산을 몇 달 앞둔 아는 동생이 출산에 대해 이모저모를 물어보길래 첫째 때의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핵심은 ‘무통주사’
혼자가 되어보기로 했다.사실 난 결혼 전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아이를 낳은 후엔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도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어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쉼 없는 육아로 지쳐있는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아이와 분리된 오로지 나와 나의 시간. 지친 나를 위로해주고 내 자신을 돌아보며 팍팍해진 마음에 시원한 바람을 넣어줄 시간 말이다.그래서 나는 하루에 한 번 점심 식사 후에 오는 아들의 낮잠 시간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
좋아하는 소설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책장을 넘기던 중 잘 말려진 단풍잎 한 장을 발견했다. 작년 가을이었을까. 재작년 가을이었을까. 단풍잎을 바라보다 보니... 가을볕에 물든 공원길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계절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늘 내 옆자리에 있던 귀여운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얼른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은, 아기티를 벗지 않은 아들의 얼굴이. 그리움에 젖어 지난날들을 천천히 꺼내 보았다. 아들과 함께 했던 천일의 행복한 기억을 말이다.신기한 일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에 풍화되어 아름다운 것들을
행복한 모유 수유 어느 쇼핑몰의 수유실. 한 남자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뚜벅 뚜벅 걸어 들어 온다. 아이는 보채 듯 “엄마 쭈쭈 줘!”하고 말하자 옆에서 수유 중이던 다른 아기 엄마가 놀라서 쳐다본다. 사실 민망한 일이 아닌데 ‘말하는 아들’을 수유하는 이 상황이 민망하기만 하다. - 2017년 어느 날 고통과 인내의 모유수유 끝에 이어진 모유수유는 ‘행복’이었다. 네 번의 계절을 지나 아이가 돌을 넘길 무렵, 내 젖을 빨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구김 없이 온전히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평화가 좋았다.
유별난 행복 육아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육아. 나에게도 그런 육아의 삶이 시작되었다. 육아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잠깐이었고, 이제는 어디서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모를 육아가 4년째 진행 중이다. 육아란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가지각색인 모양이다. 육아를 하며 맞닥뜨리는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내가 선택한 길은 좁고 외로웠다. 함께 걷는 이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드문드문 남겨진 발자국을 보며 희미한 동질감을 느낄 뿐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