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선진국으로 국가적 불공정, 양극화 및 사회갈등 등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21세기 세계 주도의 핵심사상이라 일컫고 있으며 아시아 중원・동부・만주 대륙에서 우리 동이한민족의 건국・통치이념이었던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위한 여건조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필자의 학술논문 결과들에 의거 홍익인간・재세이화・성통공완 개념 및 현대적 의미 등을 공유하고자 한다. 임기추박사의 저서 "홍익인간의 인문학 강의노트(2023)"를 바탕으로 연재한다. 필자는 홍익인간의 개념을 인간을 모두 이롭게 적용할 수
조선 풍속 화가 신윤복의 는 조선 시대 실상을 표현하고 있다.이는 17~19세기 조선 시대 풍속화 소재 발굴을 통해서다. 이 시기의 현실 재현은 조선 시대 사회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화가 혜원 신윤복은 다양한 소재를 얻을 수 있었다.조선 후기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여속 女俗 과부 寡婦 기생 妓生 승려 僧侶 등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다.그림에 형상화된 양반들의 모습은 사대부의 양반 놀이라고 축소해 볼 수 없고 이전의 조선 풍경화나 초상 등의 그림들과는 비교되는 확장된 소재로 구현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선진국으로 국가적 불공정, 양극화 및 사회갈등 등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21세기 세계 주도의 핵심사상이라 일컫고 있으며 아시아 중원・동부・만주 대륙에서 우리 동이한민족의 건국・통치이념이었던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위한 여건조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필자의 학술논문 결과들에 의거 홍익인간・재세이화・성통공완 개념 및 현대적 의미 등을 공유하고자 한다. 임기추박사의 저서 "홍익인간의 인문학 강의노트(2023)"를 바탕으로 연재한다. 필자는 홍익인간 사상을 홍익인간 양성수련법인 성통・공완의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선진국으로 국가적 불공정, 양극화 및 사회갈등 등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21세기 세계 주도의 핵심사상이라 일컫고 있으며 아시아 중원・동부・만주 대륙에서 우리 동이한민족의 건국・통치이념이었던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위한 여건조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필자의 학술논문 결과들에 의거 홍익인간・재세이화・성통공완 개념 및 현대적 의미 등을 공유하고자 한다. 임기추박사의 저서 "홍익인간의 인문학 강의노트(2023)"를 바탕으로 연재한다. 필자는 홍익인간의 개념을 기존의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
최운산 장군의 순국일은 한여름인 7월 5일이다. 뜨거운 여름 장마가 한창일 때 추모식을 여는 탓에 해마다 추모식을 준비하며 가장 노심초사하는 부분이 날씨다. 올해도 며칠간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내려 장마 속 장대비를 뚫고 오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추모식 당일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더니 햇빛이 뜨거웠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뜨거운 햇볕과 무더위도 만만치 않다.2016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출범 후 2017년 7월 5일 인사동 관훈클럽 세미나실에서 첫 추모식을 개최했고, 2018년부터는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시운 목목문왕 오즙희경지)爲人君止於仁(위인군지어인) 爲人臣止於敬(위인신지어경)爲人子止於孝(위인자지어효) 爲人父止於慈(위인부지어자)與國人交止於信(여국인교지어신)【번역】時經(시경)에서 말하기를 덕이 충만하신 문왕이시여! 아! 그 빛나는 모습은 지향하는 곳을 공경히 하시는구나! 사람의 임금 된 자는 仁(인)을 향해 가야 한다.사람의 신하 된 자는 敬(경)을 향해 가야 한다.사람의 아들 된 자는 孝(효)를 향해 가야 한다.사람의 아비 된 자는 慈(자)를 향해 가야 한다.국인과 더불어 교제할 때에는 信(신)을 향해
詩云 邦畿千里 唯民所止 詩云 緡蠻黄鳥 於丘隅 (시운 방기천리 유민소지 시운 면만황조 어구우)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자월 오지 지기소지 가이인이불여조호)【번역】시경에 나라의 영토 천리는 백성이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시경에 '지저귀는 꾀꼬리 언덕 숲 속에 안전하게 머무네' 라고 했다. 공자가 말하셨다. “꾀꼬리도 머물 곳을 알고 머무는데 사람이 어찌 새만도 못하겠는가.”【해설】여기부터는 大學之道 在止於至善(대학의 도는 지극한 선에 머무름에 있다)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인용되는 시경의 시와 지어지선과의 관계를 억지로 찾
湯之盤銘曰 苟日新日日新又日新(탕지반명왈 구일신일일신우일신)【번역】탕(湯)임금의 세수대야에 새긴 글에 “진실로 날로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라고 하였다.【해설】동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꾼 인물은 탕(湯)임금이다. 3600년 전, 그는 폭군이었던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을 쳐부수고 상(商 : 일명 殷)나라를 세워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을까? 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리를 규합하거나 군대를 양성하
왕양명(1472~1528)은 주희 이후 최대학파인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이자, 뛰어난 군사전략가였다. 절강성 여요(餘姚) 출신으로 본명은 왕수인(王守仁)이다. 주희(朱熹)의 격물치지를 공부하다가 대나무를 잘라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리해도 이치를 알 수 없었다. 대나무 관찰이 ‘格物’이다. 실망한 그는 문장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도를 깨우치지 못했다. 다시 도전한 주희의 학문은 의문투성이였다. 좌절한 그는 입산까지 결심했다. 홀연히 성인의 도가 이미 사람의 성(性)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희의 격물치지가 진리에 이르는
康誥曰 克明德(강고왈 극명덕) : 康誥에 이르기를 능히 德을 밝히라 하며 太甲曰 顧諟天之明命(태갑왈 고시천지명명) : 太甲에 이르기를 하늘의 밝은 命을 돌아보라 하며 帝典曰 克明峻德(제전왈 극명준덕) : 帝典에 이르기를 능히 큰 덕을 밝히라 하니 皆自明也(개자명야) : 다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해설】하늘같은 밝은 마음, 명명덕(明明德)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하늘을 지목하여 ‘밝음’이라고 했다. 하늘같이 투명도(透明度)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양심을 어둡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양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서, 본
팔조목(八條目)이란 삼강령을 실천하기 위한 여덟 가지의 작은 항목을 말한다첫 번째는 ‘격물(格物)’이다.‘사물에 이르다’ 또는 ‘사물을 바르게 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주자는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접하고 사물에 다가가야 한다고 했고, 왕양명은 양지(良知), 즉 바른 지식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사물을 직접 대하고 난 다음에 사물의 본질과 모습을 알 수 있고, 그런 다음에 지식을 완성하게 된다. 오늘 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내일 또 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大學之道(대학지도) 在明明德(재명명덕) 在親民(재친민)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대학의 경(經) 일장(一章)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하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큰 사람이 되려는 학문의 길과 교육의 목표가 삼강령이라면 팔조목은 그 공부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다.본문에서는 삼강령과 팔조목을 2회에 걸쳐 강론한다.삼강령(三綱領)이란 세 가지 커다란 줄기라는 뜻이다. 대인(大人), 즉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우는
사서(四書) 중의 대학(大學)은 본래 고위 관리의 학습용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사람의 근원적 윤리에 대한 원리가 있어 유학의 경전이 되었다.선인들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착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두 갈림길에서 善한 길을 놔두고 선하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울었다는 고사가 양자곡기(楊子哭岐)이며, 착한 것을 놔두고 착하지 못한 것에 물들었음을 보고 울었다는 고사는 묵자읍련(墨子泣練)이다.이는 회남자(淮南子)에 기록된 내용으로 유안(劉晏)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들을 모아 21권이라는 거질(巨帙)의 백과사전으로 집대성한 책이다.
우리나라 옛 국호인 조선시대에 가장 치욕적이요 굴욕적이며 분통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국민의 주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나라를 구해낸 분들의 희생 정신은 억겁이 지난들 잊을 수 있으리오.그분들이 이름하여 「임란공신」들이다. 선조 조정에서는 지휘관급 이순신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다음의 장수와 병사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구분하여 책록하고 녹권을 하사했다.이들의 선정 과정이 행여 사사로움이나 세도가의 억압으로 공적의 진실이 조작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발동하여 참고 자료를
우리 민족은 1919년의 독립선언으로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온 백성이, 온 민족이 함께 일어났다. 3월 1일 서울에서의 하루만이 아니었다. 3월의 모든 날은 우리의 독립선언일이었다. 4월의 모든 날도 그랬다. 3월과 4월을 가득 채운 독립선언은 5월에도 이어졌다. 독립선언은 마치 릴레이 경기를 하듯 전국으로 번져갔다.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모든 동포들이 손을 잡고 민족 자존과 독립을 외쳤다. 그러나 독립선언 104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만주 지역의 독립선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일 병탄 이후 일본의
우선, 무진보 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발문대체로 주역에 따르면,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와서 천백만에 이르기까지 무궁하면, 여러 종친의 집안은 그 처음은 하나의 크나큰 뿌리이다. 자자손손이 번성하여 뻗어 나아감에 이르니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이치는 아닌 게 아니라 큰 하나이다. 대저 우상공[右相公·邢昉·형방·숭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서윤공 형군소와 병사공 형군철의 5대조부]부터 이후 뿌리가 깊고 줄기가 커서 진양군(형공미·서윤공과 병사공의 증조부)에 이르러 문벌을 열게 되었고, 서윤공(형
우선, 무진보의 세 번째 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서대체로 사람은 줄기와 가지, 즉 종손과 자손을 둔다. 이는 나무에 뿌리와 줄기가 있고, 물이 그 흘러나오는 근원과 물갈래를 둠과 같다.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물의 근원에서 물갈래가 생긴다고 한다. 우리 여러 종친은 서로 하나의 큰 근원과 하나의 큰 뿌리를 두었다. 세대가 멀리 흘러서도 자손이 번성하여 널리 퍼짐은 소중한 일이로다. 그래서 족보에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을 밝혀서 갈래를 잘 나누어 기록한다.대개 진양군(晉陽君·형공미)부터 그 이후로 이름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성에서 이,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이, 3월 1일 서울에서 이 선포되었다. 독립선언은 들풀처럼 일어나 온 나라의 민중을 깨웠다. 국내를 넘어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거족적으로 독립선언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고취된 독립정신으로 연해주와 중국,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이후 세 지역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자주독립의 열망이 고조되던 1919년 당시 북간도 봉오동에는 정식 군사훈련
연천군 남면 호로고루에 북녘에서 온 광개토대왕비가 우뚝 서 있다.북한에서 직접 모형 저작(著作)한 국보급 광개토대왕비를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 목적으로 남한에 제공한 것이다.이 비를 보관하고 있던 민족화해협럭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2015년 연천군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을 여기 호로고루에 보관 관리하고 있다.호로고루(瓠蘆古壘)는임진강 북안에 있는 현무암 절벽 위에 세워진 고구려성 이름이다.갈대에 덮여 있는 표주박 모양의 옛 성(古櫐)이라는 뜻이다.삼국시대부터 임진강의 이 일대를 호로하(河), 호로탄(灘)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고구려가 백
2023년 현재 진주형씨의 양대산맥은 판서공파와 병사공파다. 1706년 병술보와 1763년 계미보는 판서공파 중심으로 구성됐다. 병술보의 서문을 지은 형사범 선생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전남 화순 능주와 경남 밀양에 사는 종친을 족보에 싣지 못한 점을 매우 아쉬워하고 모든 종친을 아우른 족보가 간행되기를 염원했다. 그 염원은 드디어 1808년 (이하, 무진보)의 간행으로 이뤄졌다. 이는 판서공파 형효동 선생과 병사공파 형택규 선생이 무진보 서문을 각각 지은 사실에서 간단히 확인된다.나의 7대조 형택윤(邢宅閏) 선생의 6촌
1808년 순조 임금 순조 8년(즉위년 1800년은 포함하지 아니함)의 경제상황을 알아보려고 (sillok.history.go.kr)을 찾아봤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윤5월 25일: 비가 3촌(寸) 2분(分) 내렸으므로 기우제를 정지하고, 제관(祭官)에게 시상(施賞)하였다. / 음10월 29일: 수원부(水原府)와 영남(嶺南)·호남(湖南)에서 가장 기근이 심한 고을에 새 환미(還米)를 면(面)·리(里)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정퇴(停退)하게 하고, 호서(湖西)의 아산(牙山) 등 열 고을에는 새 환미 및 신역(身役)에
1763년 영조 임금 39년 음력 5월, 조선의 경제 사정은 어떠했을까? 에서 경제 관련 기사를 찾아봤다.관서(關西)에 가뭄이 들었는데, 도신(道臣)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 명하였다. 함경도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와 조를 손상시켰다.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칙유(飭諭·칙서로 타이르고 깨우침)를 내렸다. 기근이 든 제주에 호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하라고 명하다.임금이 기우제를 명하고, 칙서를 내리고, 진휼을 명할 정도였으니, 당시는 가뭄이나 우박으로 인하여
우선, 숙종 임금 32년 병술년 서문 2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형씨족보 수정 서문 2뭇 사람이 족보에 관심을 둔 지는 대체로 오래되었다. 족보란 돈종돈목(敦宗敦睦), 즉 종친끼리 서로 화목한 정의(情誼)를 나누자는 의의를 지닌다. 족보를 보고 조상을 알고, 조상을 보고 씨족을 알고, 씨족을 보고 그 파(派)를 알고, 파를 본 다음에 조상이 되고 선조가 됨을 알아보게 된다. 족보는 인륜에 크게 관련된다.시조가 자손을 둠은 나뭇가지에 잎이 나고 물에 물갈래와 물길이 생김과 같다. 처음에는 하나의 큰 뿌리와
1706년(숙종 임금 32년) 병술년 (이하 병술보)는 2023년 기준 간행된 지 317년이 됐다. 2019년 가을, 전남 구례군 구례읍에 거주하는 형철우 종친을 찾아뵈었을 때, 그분이 대대로 소중하게 간직하여 온 병술보의 실물을 나는 처음 봤다. 형철우 종친과 그 조상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우선, 병술보 서문 1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형씨 족보 수정 서문족보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계통, 즉 세계(世系)를 명확히 하고 종친 간에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세계가 명확하면 효도하고 우애하는
지난 11월 12일과 13일,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자연휴양림을 긴급 수배하여 다녀온 곳 장수는 지역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금강과 섬진강의 긴물(長水)이 시작되는 뜬봉샘이 있는 곳이다. 뜬봉샘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산 109번지인데, 수분리(水分里)는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금강과 섬진강으로 나뉘어 흐르는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전라북도는 동부 산악, 서부 평야의 지형을 가진 곳으로 동부의 무주군,장수군,진안군에 걸쳐있는 진안고원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아늑한 분지로 이루어져 요즘은 여가나 휴식을 위한 별장이 많이
2022년 11월 11일 조선 태조 어진이 봉안되어 있는 경기전을 다녀왔다.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경기전은 지금과 같은 규모가 아니고 다소곳했던 모습이다.정문도 전주성심여고 사거리 쪽 동남향에 있었고 뒤편엔 초등학교가 있었다.언제나 지저스가 반겨주시는 전동성당에 주차를 하고 새로워진 경기전을 방문해 본다.평일인데도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손님들이 갖가지 옷모양새로 한가득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정전의 모습은 왠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조금 세련되거나 정돈되지 않은 느낌. 좀 더 깔끔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까
확대가족에서 핵가족 그리고 축소가족으로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인의 의미는 무엇일까.조선시대의 혼인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시집가는 풍속은 우리나라 고유 풍속이 아닌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식 혼인 풍속이다.조선의 혼인 제도는 17세기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하는 '남귀여가혼'을 따랐다. 혼인하면 남자는 처가에 들어가 (장가를 간다) 살았다. 신혼 살림을 꾸리고 살다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크면 시댁으로 들어갔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혼인 풍습으로 성리학을 표방했던 조선 전기까지 지속되었다.고려 이전 신라 시대 때
우리의 역사에 잊히지 않는 가슴 아픈 전쟁사가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있었지만, 그 중의 왜(倭)의 침략으로 순식간에 국토가 초토화되어 국운이 백척간두에 놓인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비극은 우리 국민의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커서 자손만대에도 잊히지 않으리라 본다.이렇게 도탄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구하려 분연히 일어선 애국 충신들이야말로 익히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휘하에서 손과 발이 되어 목숨 바친 병사들에게 우리는 어떤 예우를 했는가 반성해 본다.필자는 다행스럽게 선
지난 5월 34년간 몸담았던 첫 직장을 졸업하고 이번 9월에 방송대 학생으로 복학하였습니다. 라는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 느낀 점이 많아 내용을 복기하고 잠시 같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중국 간도와 함께 해외 항일운동의 중심지 1.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러시아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된 계기는 1860년 제정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베이징조약- 1863년 한인 열 세 가구가 연해주 남부 연안의 포시예트 지역
아래 사진은 필자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일제 강점기 때 사진이다.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일본인들은 완도까지 밀려와 정착하였다. 완도가 어장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완도 신기리를 이 지역에 자리잡고 살던 일본 사람들은 가마구미(駕馬仇味)라 불렀다. 이곳에 터를 잡고 16세대나 되는 연립주택을 짓고 생활하면서 고기잡이를 하였다.사진에 보이는 초가집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후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 지어진 것이다.일본 사람들은 긴 세월이 지난 70년대 초반에 자기들이 살던 이곳을 다시 찾아왔다.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가 일본 延曆寺 文殊樓(大津市 坂本本町 220) 옆에 세워졌다. 한.일의 역사와 문화, 경제, 외교에 있어서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일본 연역사 圓仁 스님의 관계는 오늘날 재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 완도군이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에 의뢰하여 세운 것이다.장보고는 서기 820년 경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 교민들을 규합하여 중국 동해안과 산동반도, 대운하변, 장강하류, 절강성에 이르는 거대한 해상상업 세력을 구축하였다. 824년에는 무역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당시 동아시아 해상에서 횡행하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82
현재의 인류는 유사 이래 최고도의 문명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 세계를 여유 있게 즐길 준비가 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소위 말하는 문명 세계의 현실은 어떠한가. 폭염과 폭우를 동반하는 전지구적인 기후 위기는 갈수록 더해가고 있고,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국제적인 갈등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다. 제국주의의 발톱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발톱을 숨긴채 평화의 사도처럼 행세하고 있을뿐 본질은 비슷하다. 어디 그뿐인가. 2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