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렸을 적 울산의 농가 변소는 큰 독을 묻고 위에다 발판을 걸쳤다. 아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기에 구더기가 파리로 변화하는 과정을 다 관찰할 수 있었다. 아래가 물이 많이 출렁일 때는 똥을 떨어뜨리고는 엉덩이를 옆으로 틀어서 비켰다. 화장지로는 짚을 쓰다가 신문지로 진화했다. 오줌통을 모두 거름으로 썼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 똥을 누고 오면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내 동생 수동이는 꼬마 때 불장난하다가 동네 목재에 불이 번지자 학교 변소에 혼자 종일 숨어 있기도 했다. 이 그림은 성북초등학교 화장실이다. 초등학교 변소엔 특유의
어릴 때 내가 생각하던 행복은 이런 장면이었다.1. 교과서에 실려 있던 개미들이 땅속 집에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놓는 장면2. 울산 우리 초가집, 왕거미 집 빗는 저녁, 하루 농사일을 마친 식구들이 마당에 멍석 펴고 밥 먹으며 하루 일 얘기하는 장면.3. 냇물이 졸졸 흐르는 위의 그림 같은 집에서 사는 것(4학년). 그땐 최고 력셔리 집이라고 그렸는데 지금 보니 허름해 보이네. 어쨌거나 세 번째는 아직 이루지 못했구나.편집 : 김미경 편집장
지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옛날이 지금보다 산에 숲이 더 우거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거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에너지가 나무를 땐 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무를 베어 산이 황폐해졌다. 우리 고향 모래골에 모래가 많았던 것도 나무가 없어 토사로 모래가 계속 실려 왔기 때문이다.우리 어렸을 땐 나무를 해야 했다. 나라에선 벌목을 감시했다. 그러면서 녹화사업으로 나무심기를 장려하였으나 결정적으로 산을 푸르게 한 것은 연탄과 가스의 보급이다. 탈북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이 남한의 푸른 산이라 한다. 애림녹화를 장려하
전포동의 아이들은 "김주열 눈에 이따만 최루탄이 박혔대"라며 그 전 해에 일어났던 4.19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우리는 혁명 공약을 외웠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나 우리 집이나 마을에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선생님들은 재건복이라고 부르는 코르덴 옷을 똑같이 입고 다녔다. 우리는 '5.16혁명' 관련 노래를 배웠다.'낙동강 굽이치는 태백산 줄기, 옛 가야 선 나라 유서 깊은 내 고장, 기름진 산과 들에 씨뿌리는 일손들, 혁명으로 뭉친 마음 꽃피는 남도, 새 역사 이룩하세 우리의 경남' 그리고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우리 동네를 파스텔로 그렸다. 그런데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색채를 썼다. 초등학생이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색채를 썼을까. 생각해보니까 국제신보 파스텔 대회에서 준특선을 했는데 특선한 그림이 놀라웠다. 5학년이 그린 해변 절벽 그림이었다. 반 고흐 풍으로 다양하게 작은 터치로 찍은 듯 그린 것이어서 새롭고 멋있었다. 나도 그 풍으로 한번 그려본 게 아닌가 싶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살기 위해서 묵나 묵기 위해서 사나' 이런 수수께끼를 얘기했듯 당시는 먹을 것이 귀했다. 추석날이 되면 갑자기 너무 많이 먹고 탈이 날까 봐 교장선생님도 항상 주의를 주었다. 새 고무신도 얻어 신을 수 있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석이었지만 부산의 우리집에서는 꿀 수 없는 꿈이었다. 추석과 설은 대목이라 떡볶이, 어묵, 도너츠 등을 파는 만화방인 우리 집은 오히려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손 잡고 달맞이 가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지금 보니 나와 두 동생인 것 같다.편집 : 김미경 편집장
지난해 몇 차례 세미나를 거치니 윤석열정권의 검찰세력은 뿌리부터 잘못된 기형적인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앞잡이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드러난 것이죠. 오로지 애국지사를 괴롭혀서 쌓은 탄압의 기술로 대한민국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글을 얼마 전에 한겨레온에 기고한 바 있습니다.[이원영 칼럼] 한국 검찰, 해체되어야 할 이유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04일독을 권합니다.이런 어처구니 없는 정권을 만든 일등공
나는 학교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 한번은 정말 궁금한지 어느 선생님이 물었다."재동이 니는 어쨰 그림을 그리 잘 그리노?"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잘 그리는데요?' 할 수도 없고 해서 가만히 얼굴만 붉혔다.지금 설명을 한다면 오랜 전생부터 꾸준히 그려온 '실적'이 '소질'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었다 나타날 뿐인 현상이다.4학년 때 그린 이 그름은 '저렇게 포플러 잎 하나하나의 명암까지 관찰하여 그린 아이는 나뿐일 거야.'라며 자부심에 가득 찼던 그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30년 후 누군가가
우리 집 만화방 문예당에서 본 공터 풍경. 돌을 그릴 때 어떻게 저리 여러 색으로 썼는지 지금도 신기하다. 인제 보니 당시엔 말 구루마(달구지)로 돌을 운반했구나.이때 본 잊을 수 없는 장면 둘.첫째, 아침마다 문에 꼭 붙어 "밥 좀 주소 밤 좀 주소" 하던 전쟁고아. 밥 주기 전에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밥 없다 소리 듣고 돌아가면 하나도 못 얻어먹는단다.둘째, 지게에 석유통을 지고 석유 팔러 다니던 청년. 우리 집에 와서 당시 1원 하던 풀빵 두 개로 한 끼를 때우던 그 청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편집 : 김미경
(사)평화어머니회가 다음과 같이 출범식을 갖습니다.1. 일시 : 2022년 11월 5일 오후 3시2. 장소 : 충남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마을회관2016년 시민단체로 활동해온 ‘평화어머니회’는 2022년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였습니다. 2022년 9월 말 통일부에서 (사)평화어머니회는 설립 허가를 받았고, 11월 4일 옥천군 등기소에서 법인 등기부등본을 받았습니다. 고은광순이 대표를 맡습니다.평화어머니회는 2015년 청산의 동학을 알리기 위한 소설 13권을 출간한 후 전쟁, 무기회사 없는 평화운동 하기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시민단
염양호는 4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다. 서로 죽이 맞아 늘 같이 붙어 다녔다. 양호집에 가서 늦도록 깨가 쏟아지게도 놀았다. 우리가 하도 친하게 지내자 철공 기술이 있는 양호의 형이 우정의 징표로 한 뼘 크기의 작은 단검을 두 개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단검을 늘 매만지면 소중히 간직했다. 6학년이 되자 반이 달라지고 말았다. 반이 갈리면 우리의 우정도 끝나는 것이다. 반편성 발표 날 우리는 불가항력의 운명 앞에 둘이 말없이 목조건물 나무벽에 단검을 툭툭 던져 꽂을 뿐이었다. 이 그림은 양호네 집에서 그런 것이다. '고놈
초등학교 4학년 때 국군장병 위문편지로 한 아저씨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림을 만화식으로 섞어가며 재미나게 썼다.'눈 덮인 높은 산에서 눈덩이가 굴러오는데 구르고 구르고 일 년간 굴러 엄청나게 커진 채로 팍 깨졌다. 그 눈덩이 안에 뭔가 쓰인 종이가 있었다. 무슨 글자일까요?' 하면 아저씨는 ' 하하하, '거짓말'이라고 쓰여있지.' 하고 주고 받았다.어느 날 아저씨가 제대하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숨었다가 얼굴만 보고는 또 숨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알 수가 없다. 이 그림은 그 무렵 그냥
우리 할배는 1898년 땅 없는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도쿄항에서 하역노동을 했다. 마침 관동(간토)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할배는 하숙집 주인이 다락에 숨겨줘서 살았다. 고향에 돌아와서 논을 사고 꿈에 그리던 자영농이 되었다. 그때 이 집을 지었다. 그 집 마루에서 본 풍경이다.내 초등 1학년 때였던가? 울 할배가 울산 장에 가서 사카린을 한 봉지 사오셨다."재동아, 우리 사카린 물에 타 묵자"한 알 두알 탔는데 도대체 달지 않았다."할배야, 안 달다.""이상하네?"한 봉지 다
나는 미술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을 탔기에 월요일마다 상 타는 아이로 유명했다. 학교 복도에는 늘 내 그림이 붙어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미술 시간에는 나보고 수업을 하라고 했다."풍경을 위에서 보면 지평선이 내려가는 거 아니가? ""아임니더 선생님요. 위에서 보면 지평선도 따라 올라갑니더. 이 책상을 요래 함 보이소""거 이상하네" 이 그림은 외삼촌이 준 얼굴 그리기 책에서 본대로 눈, 코, 귀의 위치를 그려 봤다.이 나이에 이런 연습을 하는 아이는 나뿐일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편집 : 김미경 편집장
나는 지도 그리기를 좋아했다. 잘 그려지기도 했고 큰 땅을 한꺼번에 내려다보는 즐거움이 솔솔 했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향 울산 초가집에 있을 때 등잔불 아래서 북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고조선 영토를 보면서 웅대한 꿈을 키웠다. 한반도를 그리면서는 마치 내 몸을 그리듯 살갑게 그렸다. 수풍댐과 각도의 도청 소재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지나다보니 그림도 찢어지고 북쪽 지도도 바뀌고 모든 게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언제 다시 새로운 우리나라 지도를 그릴 때가 올 것인지.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아마추어 화가부터 프로 화가까지 &새파란 청년화가는 물론 팔팔한 시니어 9학년 청년화가까지「모바일미술로 화가가 제일 많은 나라 대한민국으로~」 갑니다.세상에서 가장 멋진 국민정서를 가진 나라 대한민국으로 가 봅시다. ㅎㅎ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바랍니다.· 전시 기간 : 2022.11.5.(토)~11.13.(일) 오전· 전시 장소 : 롯데몰은평점 모바일아트갤러리(롯데몰은평점 지하1층 지하철 구파발역 연결 통로)고수향, 김문환, 김영민, 김효경, 문창규, 민계진, 박대석, 박인
풀빵을 팔며 만화방을 하던 때 당시 '친절'이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인이 자기가 장사를 한다고 나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환자임에도 기어이 쫓아내어 아주 조그마한 곳으로 옮겼다. 거기서도 장사가 잘되자 또 쫓아냈다. 4학년 때 그 위쪽으로 옮겼다. 새로 옮긴 곳 역시 장사가 잘되자 주인이 또 쫓아냈다. 다행히 재광이 엄마, 계희 엄마가 돈을 빌려주어 새로 집을 짓게 된다. 앞쪽 울산집 옆 양화점 자리다.편집 : 김미경 편집장
내가 봐도 매력적인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아, 오명천 선생이 있었지! 오명천 선생은 라이파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특이한 서부극 '싼디만'을 그렸다. 후에 택견소년 창, 칼, 탕, 길 등 외자 제목으로 매혹적인 작품을 쏟아냈다. 주인공이 창! 하는 의태어와 할께 나타나 만화에 사운드 임팩트 효과를 처음 도입하기도 한 분이다. 물론 택견이란 무술을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오명천 선생은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오세영이란 정상급 드로잉 작가를 키우기도 했다. 나는 오명천 선생의 작품을 보며 틈만 나면 동네 당수도 무덕관 문에
이 시기엔 '철인 28로' 탓인지 로봇보다 인조인간이나 철인이라는 말을 많이 쓴 것 같다. 그 때는 물론 철인 28호가 당연히 한국 만화인 줄 알았던 때다. 나도 한 번 철인 만화를 그려볼까 하고 초안을 잡아봤다. 주인공 철민이와 문제의 조종기, 악당은 라이파이에서 등장하는 의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스토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잊을 수 없는 로봇 만화는 공장 굴뚝 안에 살면서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삐삐' 로봇 만화다. 정겨운 로봇이었다. 김경언 선생의 작품으로 기억한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울산 범서면 서사리, 어른들은 모래골이라고 불렀던 내 고향. 낮에는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밤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다방구를 하면서 놀았다. 꿀을 보고 달다고 하지 마라. 그 맛이 얼마나 단지... 자야 고모가 멀리서 부른다."재동아 밥 묵자!""안 묵는다!""아부지한테 일러 준대이!"그리고 묵는 꽁보리밥. 우리의 소원은 하얀 쌀밥을 묵는 불가능한 소망. 그 소원이 드디어 풀린 건 부산에 전학 오면서 매일 흰밥을 묵게 된 것. 그러나 공기나 물과 햇빛이 달라 맛이 없었다. 고향의 꽁보리밥이 백배 낫구나! 방학만 되면 그저 고향 갈 생각
만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해야겠다. ‘라이파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매혹적인 악녀 녹의 여왕은 원래 잉카제국 공주였다. 마야제국과의 핵전쟁을 피해 광자로켓을 타고 그린스타라는 외계 행성에 살았다. 거기엔 세포를 늙지 않게 하는 푸른 보석이 있었다. 영원히 살게 되었지만 고향 지구가 그리워 그 보석을 지구에 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 돈으로 잉카 성을 복원하고 지구정복을 시작한다. 워낙 앞서 간 과학병기 앞에 지구 연합군은 모조리 괴멸된다.희망은 오직 한국의 라이파이 뿐. 라이파이는 녹의여왕과 공방을 벌이며 싸우는 중에 묘한 유
(사)숲과문화연구회에서 ‘남산 소나무림에 관한 세미나’를 아래와 같이 개최한다.남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서울을 대표하는 산이다. 서울이 커짐에 따라 서울의 한 중앙에 위치하여 N 타워와 더불어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요한 녹지공간으로 서울 시민의 허파로 기능하고 휴식 장소로 사랑을 받는 곳이다.남산은 2021년 ‘서울 남산 소나무림’으로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시인 묵객의 자취가 이어져 왔고, 대한민국에서는 애국가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
해방 직후 눈보라 치는 만주 벌판에 고아로 버려진 훈이와 순이가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마적인지 일본 앞잡이 출신 범죄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긴박하게 부모님을 찾아 헤매는 두 주인공이다. 제목은 들장미, 1960 혹은 61년 작품으로 내가 필사적으로 수집해 둔 만화이다. 순이는 후에 미미로 성장해서 미미를 사이에 둔 훈이와 라이벌 몬도와의 갈등으로 60년대 소년과 청년을 사로잡았고 후에 독고탁의 숙이, 준이에 이어 까치, 엄지, 마동탁 구조의 원형이 되었다.이 우수에 찬 매력적인 반항아 훈이로 일제와 폭력과 가난에 저항하며
어느 날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고 싶어서 모델을 부탁했다. 아들이기도 하지만 화가로서 정중한 요청이었다. 아버지는 책 보는 걸로 하고 어머니는 뜨개질하는 모습으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아픈 몸으로도 만화방을 보고 빵을 굽거나 팥빙수를 갈았다. 어머니는 동명이를 업고 아버지 병수발에 팥을 삶고, 밀가루를 젓고, 잠 부족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수동이는 입학 전이라 여기저기 뛰어놀았지만, 학교를 갔다 오면 나도 만화방을 보거나(거의 나의 만화 독서 시간) 빙수를 갈고 빵을 구웠다. 모두 다 이렇게 바쁜 나날, 이렇게 앉아 아버지, 어머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감꽃을 아시는지? 감나무 밑에 조롱조롱 떨어져 있는 감꽃으로 목걸이하고 공기놀이하던... 시간이 좀 지난 감꽃은 갈색 빛을 띠면서 달콤해지지 않던가! 그 오롯한 감나무 그늘의 그 달콤한 시간은 아아... 그래, 언젠가 그려 봐야겠다. 부산에 와 있던 나는 고향을 너무나 사랑해서 고향 집 감 가지를 꺾어 와서 벽에 걸어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고향 폴란드를 너무나 사랑하여 고향 흙을 상자에 담아 프랑스로 왔다는 쇼팽의 얘기를 듣고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려놓고도 감탄한 그림이다.
철원 국경선평화학교에서 10월 22일 (토) 오후 2-5시 상량식과 단체 협약식 그리고 바자회와 음악회 등이 열립니다. 지난달 소개한 자랑스런 제 연자누님도 장학금 3천만원 전달식을 가질 테고요.관련기사 : http://cms.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208학교 터가 고려 왕건이 궁예 부하였을 때 살았던 철원 월하리, 한국전쟁 총탄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는 과거 북한 노동당사 근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가까이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안내판으로 널리 알려진 월
4학년 때 내 최초의 자화상. 이 아이는 5학년 때쯤 '밀레는 어렸을 적 종이가 없어 땅바닥에 숯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듣고 머리에 섬광을 맞은 듯 '이 길이야말로 나의 길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그림쟁이 외에는 어떤 것도 꿈꾸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아파 집은 가난하고 만화가게에다 풀빵, 떡볶이, 어묵, 팥빙수, 도넛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천국의 황태자로 지내면 엄청난 만화 독서량을 자랑한다. 미술대학을 나와 서울의 휘문고와 중경고 미술 교사가 된다.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시사만화 '한겨레 그림판'을 담당하여
‘한겨레’ 신문이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한 지면에 실었다. 한편으로는,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의 ‘제왕적 대법원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임기를 시작했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법농단의 주역 양승태가 설립하려 했던 대법원 상고심사제도를 “사법부의 숙원과제”로 시급히 마무리해야 하는 개선작업으로 꼽고 나섰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61107.html상고심제 관련하여 ‘한겨레’는, ‘
제가 서울에서 30년을 넘게 살다 보니 한국 전통문화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전통 문화란 사람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지식을 모두 배울 수도 없지만, 만약 자기 나라의 전통 문화가 없다면 마치 뿌리가 없는 것과 같아서 사람의 정신과 문화는 죽은 거와 같지요.저는 한복과 한옥을 가장 좋아합니다. 예스러운 빛과 향의 전통한옥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에 이곳에서 살 수만 있다면 정원지기나 청소부가 되어도 좋겠다고 여기지요.한지민속화를 배운 후, 제 마음속 영혼의 욕망을 메우려고 그림 속 인물의 의복은 제가 좋아하는 한복의
외할아버지는 울산의 나름 이름 있는 선비였다.(어머님 회고) 어릴 때 자려고 하면 옆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시를 읊었다. 한 구절 하면 한 구절 받았다. 당시 콜레라가 창궐해서 한 마을사람들이 몽땅 죽었을 때 저 위쪽마을 장사지낼 사람이 없다고 하자 외할아버지가 간다고 하셨다. 식구들이 말리자 "내가 안 가면 우짜노" 하고 가서 일을 다 보고 오셨다. 강제 노역이 있을 때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가셨다. 아이가 나면 이름도 지어주고 혼인날을 잡아주고 묘지 터도 잡아 주셨다. 우리나라 선비는 이런 일을 했던
삼촌은 선을 볼 때 부엌에서 밥하는 처녀 모습을 보고 결혼했다. (우리 어머니는 물을 이고 오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 한다) 숙모님 하면 늘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재동아 목 마르제"하고 주시던 물 한 사발이 생각난다. 물 이야기하나. 숙모님 아들 태야가 초등학교 때 집에 오면 "아이구 덥어라, 아이구 덥어라"하면서 마당을 왔다 갔다 한다. 그럼 할매가 "자 물 마셔라"하면 “그걸로 안 된다. 아이구 덥어라, 아이구 덥어라" 한다. 결국 할매가 아이스케키값을 줬다는 그 태야의 아들 영재, 딸 채원이가 벌써 십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