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무출이 고모는 나보다 세 살 위라서 친구처럼 지냈다. 무출이 고모 역시 노래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성격도 참 좋았다. 그때(벌써 60년이 넘었구나!)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가 앵두나무로 울타리를 해서 봄 되면 앵두가 빨갛게 열렸다. 그런데 나는 앵두를 거의 맛보지 못했다. 울타리 사이로 달려 있는 몇 개를 따 먹었을 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60년 수수께끼는 얼마 전에 고모에게 물어보면서 풀렸다. 일찍 일어난 고모들이 이미 싹쓸이해버린 것이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인 고모부를 보내고 임영, 대영,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내겐 고모가 다섯 분 계셧다. 서생 고모는 오래전 돌아가셨다. 찔레로 나를 달래던 이화 고모와 똑똑한 또출이 고모도 돌아가셨다. 넷째 고모인 자야 고모는 어렸을 때부터 예뻤고 노래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했다. 특히 이야기를 잘했다. 중학교 때 내게 들려준 '지게의 여행' 이야기는 어찌나 재밌는지 삽화까지 그려서 기록해 뒀다. 자양고모는 결혼 후 고모부가 튀밥 뻥튀기 장사를 처음 했다. 기계를 다룰 줄 몰라 뻥! 하고 터지고 난 뒤 보니까 옥수수 튀밥이 공중에서 눈처럼 휘날려 기가 막혔다는 이야기를 손뼉을 치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 자
2022년 10. 9. 한글날, 한글판 블랙개그 국어테스트 및 설문조사를 실시하니 블루개그로 참여 바랍니다.위 그림에서1. '혀 깨물고 죽지'의 함의는?① 어려운 시기이니 모두 ‘혀 깨물고 죽자.’의 뜻② 그렇게 사느니 나였으면 '혀 깨물고 죽었다.'는 발언자 의지의 표현③ 그렇게 사느니 ‘혀 깨물고 죽어라.’라는 자살 선동의 표현④ 주관식 답변:2. 어느 나라 국O에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십니까?① 먼 옛날 옛적의 당나라 국O② 개판 전쟁을 치루는 푸틴 나라 국O③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국O④ 주관식 답변:3. 이런 국O의원을
주주 필진이며 (사)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인 두시영 작가와 두혜정 작가가 아래와 같이 전시회를 엽니다.1. 전시명 : 2022년 10월의 '아리랑-아름다운 동행' 전2. 일시 : 2022년 10월 4일 ~ 17일 (주말, 휴일은 쉼) 3. 장소 : 국회의원 회관 로비 1층(서울 영등포구 의상대로 1 국회의사당 내) 4. 작품 : 두시영 작가 '영원의 빛 아리랑' 외 9점, 두혜정 작가 '생-꿈-회전 목마' 외 8점 [편집자주] 두시영 작가 프로필 : 두시영 아리랑 미술연구소대표.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부문장관상 수상, 현:(
내 동생 수동이는 네 살 아래다. 수동이 네댓 살 때다. 나는 차를 매우 좋아해 나무를 깎아 근사하게 차를 만들었다. 차를 보자마자 수동이는 울면서 내 차를 모조리 뺏어갔다. 나는 너무나도 억울해 아버지에게 호소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줘라'였다. 이후 나는 자동차에 관한 관심이 다 사라져버렸다. 대신 수동이는 70년대에 이미 마이카시대를 예견하고 자동차를 몰아 지금은 고향에 가면 언제나 나를 태워준다. 한때 타이슨처럼 싸움을 잘했는데 어느 순간 문학청년이 되어 시를 썼다. 지금은 울산대학교 총무처장으로 은퇴하고 산악자전거를
울산 선비의 딸. 어머니는 친구들과 ‘누구에게 시집가고 싶냐’는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다리가 하나 아파도 정신이 똑바른 사람한테 가고 싶다"고 말해 놀라게 한 처녀였다. 결국 소원대로 정신은 똑바른데 몸이 아픈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힘든 나날을 맞이하였다. 아버지 병환으로 부산에 떨어진 어머니는 부산에서 무얼 하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고향 울산에 가봐야 땅 팔아먹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 살 동명이를 업고 아버지 병수발을 하면서 연탄 배달, 풀빵, 팥빙수, 어묵, 떡볶이 장사를 하였다. 하루 3시간 주무시면서
아버지기 만들어 주신 스케치북에 풀빵을 굽고 있는 아버지를 그렸다. 아버지는 6·25 때 학도병으로 갔다가 부대가 괴멸되어 겨우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또 영장이 나와 5년을 복무하고 범서국민학교 교사로 복직하였다. 제대군인 재교육으로 수업을 못해 수업진도가 떨어진 아이들에게 보충수업을 하다 무리가 되어 폐결핵에 걸렸다. 간경화로 전이되어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산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 전포동에 만화방과 풀방 가게를 차렸다. 책상 옆에 '금전을 잃으면 작은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큰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
신새벽 어두움과 빛生과 死사람과 사람 사이남과 북 국가와 국가 간이념의 경계란 무엇인가?새벽 강물에 빛으로 내려와경계는 무의미 한 것이라고생명의 시원(始原)처럼 경계를 허문다높고 낮음 따로 없고늦고 빠름 비교할 수 없는 생고요할 때 더 선명해 지고걸어온 길 성찰한 만큼가야할 길 뚜렷이 보인다.새벽잠을 깬 노동의 어깨 위와무거운 십자가 진 삶의 무게와어둠의 강을 건너온 영혼들이여명의 신 새벽을 연다.2022. 10 [편집자주] 작가 프로필 : 두시영 아리랑 미술연구소대표.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부문장관상 수상, 현:(사)민
늘 별로 말없이 만화가게를 보거나 빵을 굽거나 방에서 쉬시던 아버지는 내가 그림 그리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케치북을 하나 주시는 것이었다. 그것도 당신이 종이를 구하여 거기 출석표 표지 같은 것으로 직접 칠을 한 것으로. 나는 놀랍고도 기뻐 당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그림이 이거다. 어디선가 본 그림인지 사진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많은 여운을 주며 생각하는 장면이었다. '생각하게 하는 그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어지진 못했다. 어떻든 미술반 활동과 아버지의 스케치북으로 4학년 나는
편집 : 김미경 편집장
4학년이 되자 파스텔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내 막내 여동생 동명이를 그렸다. 동명이는 대학을 가지 못하고 학교 교감실에서 경리 일을 했다. 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교감선생님에게 "저는 경리 일로 왔지 교감 선생님 커피 타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 커피는 손수 타 드세요" 했다. 그 뒤로 교감선생님이 손수 타 마셨단 이야길 듣고 아버지는 "과연 내 딸이다"라고 했다. 결혼 후 잘 지내다가 재생불량성 빈혈로 아들 도형이, 우혁이와 어진 남편 장서방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 때 무덤 앞에서 남자는 울지 않는다고 울음을 참았던 것이 억울
당시는 군사 정변 1년 후. 주로 증산, 수출, 건설로 공장에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가는 그림이 많았다. 아울러 이런 포스터도 장려되었다. 나는 당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총명하고 예쁘고 단정한 아이를 그렸는데 우연히 눈썹과 눈 사이에 파르스름한 색을 넣으면 갑자기 예뻐진다는 현상을 발견했다. 나는 매우 기뻤다. 나중에 보니 이게 아이섀도였다. 이 포스터를 보고 아버지는 ‘배워야 산다’라는 표현은 너무 나간 거 아니냐. 그럼 못 배우면 죽으란 말이냐. 그러니 ‘배워야 한다'로 고치기를 권했다. 아... 그건 너무 밋밋했다. 어린
미술반은 2학년부터 6학년까지 방과 후에 옹기종기 그림을 그렸다. 6학년 허성칠 형, 5학년 형과 누나, 우리 4학년은 심해주, 안순금, 나. (또 남자 친구 하나는 이름을 잊어버림) 그리고 담당 김명규 선생님이 야외 스케치를 많이 데리고 다녔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허성칠 형은 후에 만화가 문하생으로 갔고, 안순금은 지금도 서울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그림은 동래 정씨 사당. 성칠 형이 조금 지도해줬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와 그리는 게 머리가 좀 아팠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4학년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도 미술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린 첫 그림이 '비 오는 날 풍경'이다. 내가 봐도 어른스럽게 아주 잘 그려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소실점을 썼다. 밝음과 어둠을 갈라 입체감도 내었다. 흐뭇, 뿌듯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차! 사람 크기는 그렇다 쳐도 앰뷸런스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닌가!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편집 : 김미경 편집장
당시 서면 전포동은 부산이 다 그렇듯 판잣집으로 가득했다. 전쟁 통에 피난 왔다 눌러앉은 사람들, 농촌에서 유입된 주민들은 다닥다닥 모여 살았다. 화장실도 하나라 같이 쓰고 전기도 저녁에만 잠깐 들어왔다. 집들이 허술해서 불도 자주 났다. 그래서 우리는 불조심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이 내가 몹시 아끼는 포스터다. 불을 너무 실감 나게 그리다 보니 '이거 불을 찬양하는 포스터가 되는 거 아냐?' 싶어 겁이 났다. 그래서 알리바이로 옆에 불 끄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우리 반 뒷벽에 오래도록 붙어 있었다. 편집 : 김미경 편집
1961년, 3학년 1학기에는 울산 시골 서사 국민학교에서 5·16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혁명공약을 달달 외웠다. 2학기에는 부산 서면 전포동 성북 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오~~ 쎄무 구두 어느 놈이 신고 갔니'(새드 무비 노래), '싱싱싱싱 아부지 바지 핫바지 싹싹 잘라서 맘보바지 만들자'(싱싱싱싱 에브리바디 스타트 투 싱)을 부르며 학교에 다녔다. 농촌에서 수없이 부산으로 아이들이 쏟아졌다. 그때 그린 학교 전경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설렘이란 무엇일까?젊어서는 좋아하는 옷이나 패물을 보면 설레어 사고자 했습니다. 근래에는 나를 설레게 하는 물건이 더는 없는 듯했지요.어느 날, 호주의 한 사진작가가 촬영한 기니피그 활동 전집을 보았는데 너무 귀여웠고, 갑자기 설레는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기니피그가 마치 허공에 매달린 듯이 먹고자 하는 과일을 먹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웠습니다.그래 그려보자. 생각이 들자 붓을 들었습니다.하지만 욕망이 실력을 앞선 충동이었는지 그리기가 쉽지 않음을 알았고, 성공할 확률도 높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그림은 실패하고 수채화 종이 뒷면에 또
집사람이 오늘 아침 열 시에 집수리 기사님이 오니까 방을 치우란다. 클났따! 정신없이 치우고 있는데 기사님이 오셨다. 나는 팔을 부여잡고 진심으로 말했다.“아이고. 제가 그림 그리다 보니 집이 엉망입니다”“ㅎㅎㅎ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집사람이 미리 예방 주사를 놓았나 보다. 기사님이 이방 저방을 다 둘러봤을 때, 창고방 문을 못 열어 일을 못하고 있는지 몇 달째라“저기요. 이방이 닫히더니 안 열려요"“송곳이나 젓가락 같은 거 있나요?”나는 쌩 날아서 젓가락을 가져왔고 손잡이 옆에 있는 작은 구멍에 쑤시니... 짠! 오 마이 갓!“
만화 다섯 권으로 3학년 1학기가 지나갔을 때 삼촌이 내 손을 잡고 '이제 아버지가 계시는 부산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며 데리고 갔다. 부전역에 내리자 차들이 많은데 놀랐다. 서사마을에서는 1년에 고작 몇 대를 봤는데 여기는 한꺼번에 다섯 대가 몰려다니는 게 아닌가?저녁 전봇대를 따라가서 멈춘 우리 집 문에는 '만소잡 화설지'라고 붙여 놓았다. 이게 뭐지? 하며 들어가 보니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만화책이 천지사방에 가득했다. 말로만 듣던 보물섬이 여기로구나! 게다가 우리 집은 팥빙수와 풀빵도 팔았으니 만화책을 실컷 보고, 팥빙
내 맘대로 그리는 그림은 신은 났지만 며칠 안 가 더 그릴 게 없어졌다. 풍경화도 주춤한 때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몸이 아파 부산에 계시던 아버지가 오셔서 책을 다섯 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근데 이 책은 전혀 보지 못한 책이 아닌가. 글과 삽화로만 되어 있는 책이 아니라 그림이 이어져 있고 말도 풍선 같은데 넣어 알기 쉬웠다. 더군다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만화였다.나는 우리 동네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최고 볼거리를 확보한 내게 모두들 잘 보여야 했다. 그 만화들은 ‘칠성이 탐정’, ‘이순신 장군’, 그리고 순정만화 등
풍경화, 인물화 등에 힘들어진 나는 다시 찾아온 외삼촌에게 어렵사리, 그러나 작정하고 물었다. "외아지아(외삼촌),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려도 되나?" "응. 된다" 그때부터 종이를 디따 펴고 배를 깔고 누워 신나게 그리기 시작했다.텡크, 비행기, 자동차, 전투기, 칼, 총... 나의 본색이 폭발했다. 그 때 그림들 다 없어지고 어머니 밥 짓는 그림 뒷면에 그린 이것만 남았다. (재동 '재'자는 왜 김제동 '제'자를 써가지고~~~) 편집 : 김미경 편집장
모래골이라고 불린 내 고향 울산의 농가 서사마을. 따지고 보니까 제일 재미있었던 건 화투 게임이었지만 꽃 따먹기, 미꾸라지 잡기, 땅따먹기, 자치기, 다방구의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놀다 배가 고프면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숟가락 끝에 달랑 찍어 먹는 고추장이 얼마나 달던지...그렇게 노는 중에도 나는 마음 한 켠이 늘 무거웠다. 외삼촌이 준 매일 한 장의 그림 숙제. 이번에는 더워서 밖에서 밥 짓는 엄마를 그렸는데... 또 무얼 그리나... 점점 힘들어져 갔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편집 : 김미경 편집장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린 그림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외삼촌은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당시로는 구하기 어려운 비싼 도화지 백 장을 사다 주면서 “하루에 한 장씩 그려라”고 해서 그린 첫 그림이다.소 먹이러 뒷산에 올라가면 늘 보이던 풍경. 그런데 뒷면이 재미있다. 아이들 이름이 있고 무슨 점수 같은 게 있다. 그걸 보고 아~~~ 알았다. 어린 시절 하면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장면이 떠오르지만 실은 모여 ‘나이롱 뽕’ 화투 치던 때가 제일 재미있었지 않았을까? 편집 : 김미경 편집장
6살 무렵, 울산 범서에서 살았다. 한 번은 바다를 처음 보았는데 그 파도가 얼마나 멋진지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화지도 연필도 크레파스도 아무 것도 없었다. 송곳 하나가 있어 그걸로 장판을 찍어 그렸다.촤촤촤 파도 소리를 내며 나는 어찌 이리 잘 그릴까 하는데 아버지가 오셨다. 물끄러미 장판을 보시더니 “잘 그렸네” 하시고는 장판을 고치셨다. 나는 지금도 잘 그렸다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고 있다.편집 : 김미경 편집장
1956년, 어머니는 네 살 된 나를 데리고 군인인 아버지 부대에 면회를 갔다. 이후 부대 근처 왕십리에서 한 달간 하숙을 했다. 그때는 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엔 늘 비행기가 떠 다녔다. 그 중에도 잠자리비행기라고 불렀던 동그란 유리통 속에 조종사가 훤히 보이는 헬리콥터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그걸 그리고 싶었다. 땅바닥에 그렸는데 너무 잘 그려져서 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아~~ 나는 화가로구나!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나는 그림을 그려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한
매년 가을이면 광명시에서 '전국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한다.올해로 20회가 되는 행사로서 광명시와 광명문인협회가 공동 주관하여 그동안 많은 신인 문학인을 배출하였다. 특히 기성 문인이 아닌 순수한 일반인의 작품을 모집하므로 문학을 지망하는 일반인에게 폭넓은 기회가 되고 있다. 대상 1명, 최우수상 1명, 우수상 3명, 장려상 5명 등 총 10명의 수상자에게는 각각의 상금과 상패를 수여하며 본인이 원하면 광명문인협회의 회원이 되어 기성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인으로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금년 '광명 전국신인문학상' 작품응모 기간
오늘은 한가위!둥근 달처럼 사람도 둥글게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멀리 타향에서 가족을 생각합니다.저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인물화 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4년 전 큰 남동생 부자와 함께 일본 여행 중에 부자간의 따뜻한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수채화를 배운 후 그 뒷모습을 꼭 그려보고 싶었습니다.인물화를 그리기가 쉽지 않음을 알지만, 혈연의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뜨거운 피가 올라오며 다그칩니다. “그려봐! 그려봐!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그래서 며칠을 투자하여 그렸습니다. 그림을 완성하였을
지금은 돈만 가지면 지구 어디나 갈 수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세상.오직 한 군데 북녘은 금단의 땅입니다.지구상에서 유일한 3대 독재의 철조망이 근원이지만이를 풀어내지 못한 남녘의 이념 갈등과 능력의 한계그리고 관련 열강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한몫씩 합니다.한때,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개성공단 협력과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어져평화통일이 가까워지는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는 총소리 한 방에모든 게 한낱 물거품이 되었습니다.큰 소망 접어 미루더라도통한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빨리 이뤄지기를 염원해 봅니다. - 2022년 추
필진 여러분. '月심'으로 위로받으세요. 마음가득 보름달처럼 풍성한 추석 한가위 명절 되시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소망합니다.화가 두시영 드림편집: 김미경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