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민속화가 나문황(羅文凰)은 대만 중남부 도시 가의(嘉義)시의 형제가 많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만의 전통과 문화를 잘 간직한 가의시는 민족성이 강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매우 큰 도시로 대만의 민주화 운동에 늘 앞장서는 곳이다.나작가는 집안이 어려웠던 관계로 일찍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대만의 중부 지역에 있는 타이중(臺中)시의 용총 종합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병원 건너편에는 대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정과 자유스러운 교풍으로 유명한 동해대학(東海大學)이 자리 잡고 있다.동해대학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사드반대! 대화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은 한국에서 어떠한 군사행동도 조장하지 말라.' 이요상 한겨레 주주통신원(전 전국운영위원장)이 미국 백악관 앞에서 사드반대 피켓을 들었다. 그는 11일 아침 SNS를 통해 이 소식을 알렸다. "오늘 백악관 앞에서 1인 시위 시작했습니다. 현지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준비했던 구호 다 내걸고 현지 시간 10일 오전 11시부터 지금까지 7시간째 씩씩하게 진행중입니다." 워싱턴에 아는 사람 한 명
“한겨레 주주가 되려고 아내 몰래 새벽까지 택시를 몰았죠” 토종 밀 지킴이 김동환 창간주주(66)는 30년 전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문화공간 온’을 찾아온 그의 거칠고 주름진 손에는 주주총회장에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구겨진 ‘한겨레’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토종 밀을 알리고 식량주권을 되찾자는 운동에 전념하던 1987년 말 한겨레신문이 창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어땠나.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된 택시기사 시절이었지만 주주가 되려고 평소보다 두 시간 연장해서 일했다” 당시는 하루
1988년 ‘한겨레’ 창간 때부터 애독, 양평동 사옥 인근 관악고 교련교사, “독재유산 군사훈련 폐지 주장” 사표 표명렬 장군 ‘한겨레’ 기고 보고 동참, 조부 최구현 의병활동 뒤늦게 ‘발굴’ “촛불정신 이어갈 젊은 민주군인 기대” “1988년 5월15일 창간호를 몰래 숨어서 읽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마침 서울 양평동 관악고에서 교련 교사로 재직중이었는데 바로 인근에 한겨레신문사가 들어섰잖아요? 너무나 바르고 옳은 기사들이 한가득 실려서, 어찌 이런 신문이 나왔을까, 한편으로 주위 시선이
[편집자 주] 인생은 마라톤이라 했던가? 쓰다는 걸까, 달콤하다는 걸까. 기원전 490년 한 병사가 마라톤 광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뛰어와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는 이겼노라” 말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숨졌다는 고사를 보면 결국은 달콤한 것인가 보다. 여기 달콤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이가 있다. 대기업 홈쇼핑회사 임원, 서울시 옴부즈맨을 지내고 지금은 문화공간 온 협동조합의 이사다. 그는 석락희 한겨레 창간주주다. 마라톤은 자신의 삶과 나란히 가는 인생이다. 지난 17일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 보스톤
"딸 사위들에게 세뱃돈 대신 한겨레 주식 사주었지요" 지난해말 한겨레 주주가 된 김근수씨의 말이다. 한겨레 창간 무렵 전북 정읍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며 한겨레 창간을 맞았다. "당시 한겨레 정읍 지국장이던 분과 가까이 지내며 한겨레 구독 운동도 열심히 했지요. 나도 당연히 창간독자입니다." 그는 배달이 펑크나면 지국 배달사원 봉사도 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창간초기에는 주주가 될 형편이 아니었어요. 지난 겨울 주주 모집 광고를 보고 이번에 주주로 참여했습니다."29년 한겨레 사랑이 가득한 그는 한겨
와 6만7천여 주주 사이의 '소통과 상생’을 표방하고 문을 연 이 새해 첫날 창간 두 돌을 맞는다. 두 살밖에 안 되었지만 괄목할만한 결과물을 냈다. 지난 2년 동안 약 100여 명의 주주통신원이 3400여 건의 기사를 생산했다. 5000회 이상 조회된 기사는 13건이고, 1000회 이상 조회된 기사도 310건이 넘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5월 주주통신원들이 주도해 만든 ‘문화공간 온’은 문을 연지 6개월 만에 시민의 대표적 어울림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박근혜-최순실 국면이 시작된 지난 10월 이
지난 29일 1시 국립산림과학원 국제회의실에서 '2016년 산림문화전집 발간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숲과문화연구회가 주관하고 국립산림과학원이 주최하며 산림청이 후원하는 이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의 미술과 산림문화’란 주제와 ‘마을숲과 산림문화’란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미술과 산림문화’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궁중회화, 구곡도, 명승 유람지, 한양과 그외 도시, 조선후기, 근.현대 미술작품 속에 담겨있는 산과 숲과 나무. 그것들이 지니는 의미를 고찰했다.‘마을숲과 산림문화’에서는 마을숲의
신문이 목숨을 내놓고 기사를 쓰면, 국민은 목숨을 내놓고 그 신문을 지킨다.연극쟁이의 삶방은미씨는 연극쟁이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배우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극단 을 거쳐 1991년 만 30세 되던 해에 극단 에 입단하여 46세까지 몸담았다.그녀가 많은 극단 중 에 적을 두게 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은 달달한 연애나 소소한 일상보다는 민족의 문제, 역사의 문제, 이 사회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춘 극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극단 를 창단하여 ‘안중근’ 같은 공연도 제작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우리 꽃’ 보전과 홍보하는 일로 제2의 인생을 (사)한국교사식물연구회에서는 2016. 10. 29(토)부터 11. 2(수) 까지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우리 꽃을 찾아서’ 란 주제로 강남구민회관 1층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13회째 열리는 전시회다. 전시한 사진들은 오로지 우리 땅에서만 자라는 자생식물이다. 대부분 희귀하거나 멸종위기에 놓인 자생식물이다. 사진은 모두 한국교사식물연구회원들이 직접 자생지에서 찍어온 것이다. 전시회를 개최하는 이유는 우리 꽃이 사라져 가고
백남기 농민 빈소가 마련되어 있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노란색 포장마차가 보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로 ‘희망포장마차’ 앞에 모인 사람들이다.'소나무'(실명 오영애, 57세)라는 분이 있다. 소나무는 노사모 아이디다. 이 분은 ‘희망 포장마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무현 전대통령 후보시절, 경선과 대선 후원금을 모았다. 이후 아프고 힘없는 약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소나무님의 ‘희망포장마차’가 뜬다. 약자들과 연대하는 배고픈 이들에게 간
[덧붙이는 말] “요즘 보면 한겨레가 참 많이 느슨해진 것 같다. 어떻게 만든 한겨레인데 매너리즘에 빠져있나?” 작고 다부진 몸매에 동그란 눈, 동그란 얼굴, 흰머리를 말총처럼 묶고 앉아 있는 그를 처음 만난 건 11년 전이다. 주주와의 소통을 다시 복원하자는 뜻으로 내가 매달 열리는 주주독자 모임에 회사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부터다. 이 모임은 ‘한겨레신문사랑모임’(‘한겨레신문발전연대’의 전신)으로 한겨레신문 창간 이후 매월 30여 명의 한겨레 주주·독자들이 저마다의 한겨레 사랑 실천 이야기를 공유하고 어울리는 모임이다. 필명 ‘흰
우리는 '문화공간 온'에서 만났다. '문화공간 온'은 한겨레주주와 독자, 일반 국민 누구나를 위한 문화의 공간이며, 열린 사랑방으로 서울 종로에 있다. 이 날은 개업을 4일 앞둔 5월 13일 12시 30분이었다. 와 '문화공간 온'의 무궁한 발전을 예시하듯 창밖은 따사로운 햇볕이 골고루 내려앉았고, 실내의 분위기는 아늑했다. 임대표의 첫인상은 다소 날카로웠지만, 대담을 나눌수록 따뜻한 내면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회의 부조리와 정권의 부정을 성토할 때는 어느
제28회 주주총회장으로 들어서는 젊은 얼굴이 보였다. 데스크 앞에 섰던 그녀를 기다렸다. 일을 마친 그녀의 소매부리를 잡아끌며 인터뷰 요청을했다. 예상대로 자신은 주주이신 아버지를 대신 해서 온 대리참석자라고 했다. 김영일(59세, 강서) 창간 주주의 딸이다."그래서 더욱 더 인터뷰 대상입니다." 라는 말에“저에게 얻을 것이 없어요.” "알아요, 그냥 말을 걸어보고 싶어요. 특별한 무엇이 없다는 것은 저도알지요." 아버지가 바빠서 대신 여기까지 왔다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면 특별한 것이다.“저는 김소담 이고, 취업준비생이예요.” “아
언제나 가도 그가 있다. 나와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나는 어쩌다 가는데 그는 거의 매일 온다는 이야기다. 서울대 병원 앞에서 매일 4시에 진행하는 '백남기님 쾌유를 비는 미사'에 날마다 오는 당산동에 사는 81세 최종대(세례자 요한) 어르신 이야기다. 그는 올 2월 10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27일까지 17일 동안 진행한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국가폭력 책임자 처벌, 민주주의 회복! 행진’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보로 행진한 최고령 어르신이다.
이요상 한겨레 주주통신원이 지난 14일 전북 군산에서 열린 제1기 한겨레주주통신원 전국총회에서 한겨레주주통신원회(이하 약칭 '한주회') 전국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첫날 이 위원장 인터뷰를 위해 집을 나섰다. ‘메일로 주고받고, 부족한 건 전화로 통화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직접 만나서 인터뷰 하라는 거지? 기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던데.’ 또 이 위원장을 처음 뵙는 것도 아닌데 뭐 특별한 게 있을까 싶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서울 성북동 시민사랑방에서 약 두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 간단히 본인 소개 바랍니다.
지난 9일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인 이규옥 한겨레 주주를 인터뷰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으로 된 기록물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는 주주다. 야학 활동을 함께 했고, 선생님에게 몇 년간 , , , , 를 배웠던 스승과 제자로 또 가끔 만나 대화를 나누는 지인의 연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였다. 현대 것을 따라가기도 바쁜 시대에 살며 얼핏 고리타분하다 여길지 모르는 한문을 배웠고 고전의 되돌아봄을 뜻깊게 여기는 그는 창간 주주다. 고전은 한문, 즉 한자로 적힌 글이다
정현걸(55세), 경주 양남의 월성원자력 옆 마을 양북 출생. 그는 28세의 총각일 때 한겨레주주가 되었다. 겨우 6주를 가진 3만원의 소액(?)주주다. 소액은 적은 돈을 말한다. 3만원이 하찮은 돈일까? 낯선 사람이나 단체가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잔돈푼인 3만원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면, 그저 쓸모없어진 10원짜리 동전 세 개를 미련 없이 던지듯, 그런 것인가?나는 주주센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1주를 가진 주주가 가장 소중한 주주일 수 있다. 왜냐면 한 됫박의 쌀을 살, 정말 여의치 않은 형편임에도, 한겨레 창간에 애틋
지난 4일 늦은 오후 정우열 통신원(79) 자택에서 인터뷰를 청했다.정우열 선생님은 원광대학교에서 1978년부터 2003년까지 25년간 한의학을 가르쳤고, 퇴임 후 10여 년 간 진료활동을 하다가 2013년부터는 인천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김포시장애인복지관에서 진료 및 의료봉사, 장애인치료, 독거노인봉사, 빈첸시오회 봉사 뿐 만 아니라 매월 은퇴원로 지인들과 역사탐방을 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선생님은 앉자마자 "젊은 사람들이 바빠야 한다" 며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셨다. 또한 요즘 경기침체와
[편집자 주] 안도현 / 한겨레 주주 · 시인'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의 시집 (2004)에 담긴 라는 제목의 시다. 1981년「낙동강」으로 등단했고 같은 해 전북 이리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지 5년만에 복직되었으며, 19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고, 1997년 전업작가가 되었다. 2004년 이후에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30년 넘게 시를 써 왔고 10
[편집자 주] ‘김태갑’. 한겨레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부드럽고 밝은 인상보다 강하고 전투적이며 거칠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한겨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한겨레 주주사랑방을 연다”는 그를 만나러 28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 별채를 찾았습니다.서울에 이런 곳이 있던가 할 정도로 시골스런 동네 골목을 돌아 올라간 길 끝에는 그의 별채가 푸르름과 수줍게 핀 꽃들에 둘러싸여 앉아있었습니다. 봄비가
부부가 함께 주주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거기다 자제 분들까지 모두 주주인 경우는 더욱 드물 것이다. 더구나 두 분은 요즘 세대가 아니다. 은발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원호(71), 백청자(75) 노부부는 노을에 물든 가을 논배미처럼 잔잔했다. 태풍에 헝클어져 비틀린 벼를 닮지 않았다. 쓰러져 비바람 맞아 군데군데 썩기도 하는 그런 벼를 닮지 않았다. 삶의 궤적은 노후의 풍모에 고스란히 우러나오는 법이다.현재 성남 분당에 사시는 두 분 앞에 앉은 나도 바람 자는 날의 가을 억새처럼 잔잔해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두 분은 창간
다소곳하고 아름다운 배연옥 씨는 창간 주주였다. 나는 그녀를 처음 순간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떠올랐다. 햇살 고운 마당가에 천상의 선물처럼 곱게 피었던 모란. 그러나 여름에 피는 모란처럼 따스함을 풍기는 외모와 달리 그녀의 이야기는 적확하고 단호했다. 당시 유치원교사였던 그녀는 암울한 시대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민주적이고 삭막한 시대를 깊이 고민했다. 그녀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을 실현할만한 공간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침잠해 있었다.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길을 가다 말고 명동 한복판의 전봇대에 앞에서 걸음을
[편집자 주] 백기완 선생한겨레 창간주주. 박정희ㆍ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ㆍ민중ㆍ통일운동의 상징.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0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 쓴 시 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편집자 주] 이재정 / 한겨레 창간 주주이고 지난해 제16대 경기도 교육청 교육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딴 그는 성공회대학교 총장,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통일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낸 책으로 (2000)과 산문집 , 함께 지은 책으로 (2003) 등이 있습니다.----------------------------------------------------------------------------------------------
정연주 /
홍세화 : 우리나라 대표 지식인입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귀국하여 기획위원, 시민편집인, 편집인을 지냈습니다. 2011년 진보신당 당 대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지금은 사유-실천 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조합이 발행하는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 발행인입니다. 지은 책으로 , , , , 등이 있고 다수의 함께 지은 책과 번
나는 바다 한가운대의 섬인 완도의 가마구미(駕馬仇味)라고 하는 전형적인 어촌의 가난한 어부에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다, 배, 고기잡이, 가난뿐이었다. 바다와 배를 무척 가까이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1967년 군복무를 마치고 잠시 방황하기도 하였으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시급하여 1969년 배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자라면서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자랐기에 그 일이 쉽게 보여서 배 만드는 일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판 송상(松商)의 상도(商道)세상을 북촌에서 펼친다는 소문의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북촌의 중앙에 위치한 경복궁 담 넘어 ‘큰기와집, 궁중음식연구가 한영용’에서 앞으로의 북촌을 살리는 청사진을 이야기하는 주인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입니다. 1.4후퇴 때 보름간 남쪽으로 피난을 나가라는 치안대의 명령에 따라 월남하는 6살짜리 손자에게 개성이 고향인 외할머니는 장사하는 집의 애들하고는 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자랐지만, 이번 세월호의 참사를 보면서 그 이유를 알듯 합니다. 이문을 남기
비온 뒤의 가을은 상큼하다. 술래가 되어 주주를 찾으러 나서며 살짝 들떴다. ‘우리 주주’라는 말이 김 오르는 찐빵처럼 따끈하게 가슴을 데웠다. 따뜻한 찐빵을 반으로 툭 잘라 나누어 먹듯 그런 자리를 기대했다. 옷차림에도 신경 쓰느라 흰색 레이스 장식의 베이지색 원피스로 은은한 부드러움을 살렸다.모든 처음은 늘 설렌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지난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는 초저녁 술이 얼큰한 상태였고, 지인의 소개로 ‘한겨레주주’의 반가움을 아주 잠깐 나눈 게 전부다. 근데 첫 대면부터가 삐끗했다. 지인을 통해 미리 방문을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