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은 슈만을 의심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슈만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젊은 슈만이 열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다이아나에게 일찌감치 결별을 선언했으며 그동안 이혼을 준비중이었다느니, 심지어 슈만이 스페인 어느 휴양지에서 묘령의 젊은 여인과 낯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봤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무성하게 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이아나의 남편 슈만은 강연 스케줄이 있어서 다이아나가 사망하기 사흘 전부터 체코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슈만의 알리바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로나 마을에는 경찰이나 검찰 같은 수사
커뮤니티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담하고 곱게 생긴 여인이 다이아나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며 말을 걸었다.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다이아나와 인류학 연구 및 여행 커뮤니티에서 함께 활동하는 사이였다. 인류학 연구라고 거창하게 이름붙였지만 사실은 레비스트로스라든가 말리노브스키, 마거릿 미드 같은 인류학자의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책에서 다루어진 나라나 지역으로 정기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커뮤니티였다. 이를테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를 읽고 난 후 브라질 아마존 유역으로 여행을 간다든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메로나 마을의 현자 다비드가 주민들에게 공지문을 돌렸다. 5년 이상 부부생활을 한 기혼 남자들을 대상으로 경시대회를 연다는 것이다. 현자 다비드의 공지대로 남편들은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다비드는 백지를 나누어 주며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고 했다. 남자들은 열심히 행복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왜 굳이 결혼 5년차 이상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경시대회를 연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메일로 답변서를 제출하라고 해도 되는데 마을 대회의실에 모여서 직접 수기로 쓰라고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던 폭염도 물러가고 선선한 찬바람이 불 즈음의 어느날 남부 유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현자 다비드가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일찍이 T.S.엘리엇이 말한 바대로 우리는 탐구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팬데믹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자 인간의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인류사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복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며 몸부림쳐왔으나 행복과는 갈수록 멀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팬데믹이 일어나기 몇십 년
코로나 예방 접종률이 높아 각종 규제를 풀던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등의 국가들이 델타 변이로 무장한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남미에서는 람다 변이바이러스가 기세를 부리고 있다. 처음 등장할 때와는 또 다른 위협이다. 예방접종률을 높이면 코로나사태가 해결될 거라는 예상과 희망이 일거에 무너지고 있다. 과연 코로나가 겨냥하는 칼끝은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인류문명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으로 새 문명이 예고되는 시점에 맞춰 코로나가 등장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다고
2. 성배의 민족"그 민족이 지구의 영성 회복을 책임지고 있다면 그런 전망에 대한 전 지구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그 민족의 가능성에 대한 전 지구적인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완전히 준비된 수준은 아니고 서서히 준비를 마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그 민족이 지구를 이끌만한 초강대국의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말인데 초강대국이나 초일류국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구를 선도할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라도 있소?""그 민족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현재 강대국의 면모를 갖
1.긴급 청문회언제부터인가 지구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은하계를 떠돌고 있었다. 지구의 종말이 임박했다느니, 기후위기로 지구가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거라느니, 온갖 정체 불명의 소문들이 우주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소문은 태양계와 우주를 연결하는 통로를 통해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있던 운석의 구멍은 한 때 우주로 연결되는 '우주의 구멍'으로 알려졌다가 지구인들에게 발각되어 폐쇄되었지만 숨겨진 다른 구멍들이 있었다. 그 구멍은 아인슈타인 로젠 다리( Einstein-Rosen bridge)라고도 불리우는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우주에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구의 먼지가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인의 혼탁한 영적 기운(靈的 氣運)이 우주에서는 먼지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총괄하는 각 은하계 대표들과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지구를 어찌할 것인가. 살릴 것인가 멸할 것인가 방치할 것인가.성미급한 우주방어 사령관이 포문을 열었다." 더 이상 지구를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작전을 시행할 때가 되었습니다."그러자 은하계 대표들이 반발하고 나섰다."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듯이 지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현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현상유지론자가 있는가 하면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가는 부류가 있고, 과거 속에 머물러 옛날이 좋았다며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부류도 있다. 이름하여 멈추는 놈, 전진하는 놈, 가라앉는 놈이다.이론적으로는 과거로 회귀하는 놈이나 현재에 머무는 놈보다는 앞으로 전진하며 나아가는 놈이 제일 좋고 바람직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해 말해서 이들 중에 어떤 종류의 인간이 제일 바람직한가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고 버릴 바와 취할 바가
Artist의 사전적 의미는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예술가'이다. Artist라는 말은 멋진 말이다. 듣기만 해도 멋져 보인다. 인생을 Artist처럼 살고 , 주위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Artist로 인정받는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멋진 인생일 것이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삶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주연급 역할을 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조연을 맡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엑스트라나 스턴트맨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역할이 다양하게 차별화되는
개미와 베짱이, 서로에게 배우다개미가 일을 열심히 하여 추운 겨울철을 따뜻하게 지낼 때 놀기만 좋아하던 베짱이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겨울이 지나 다시 봄여름이 왔을 때 베짱이는 그냥 놀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공연을 하여 돈을 벌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되어도 굶지 않고 개미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개미는 다음 해 봄에 베짱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만 하던 개미는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추어 공연은 실패로 끝났고, 겨울이 되자 추위와 배고픔에 시름시름 앓기까지
누군가 자신에게 어리바리하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대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처음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는 29연대 소속의 상사였는데 저녁 점호시간에 우리를 질타했다. 자신이 논산훈련소에서 하사관 생활을 한 지가 10년이 지났는데 이번 기수처럼 어리바리한 놈들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겨울에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에서 얼 차례를 시켰다. 그 때 알았다. 어리바리한 것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어린 시절에 많이 생각했었다. 나의 인생은 어찌 될까,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나에
경호원들이 모연중 일당을 단숨에 제압하자 초순진이 한강왕에게 달려왔다.“진정한 왕이 되셨군요. 모두의 소리를 듣게 되셨습니다.”초순진은 모연중 일당에게 벗어나게 된 것보다 그것이 더 즐거운 듯 보였다.“이미 경지를 넘으셨고 도달하셨으니 제가 더 이상 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지금 이르신 경지 말입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라고 했고 중국에서는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라고도 했지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초능력의 샘왕에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역모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누구든 기민하고 현명한 대처에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내가 인질로 잡혀있고 호태종마저 포박되어 끌려온 마당에 한강왕으로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모연중은 나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했으며 나에게 심리전술을 구사하며 압박했다. 호태종과 초순진을 부녀사기단으로 몰아가며 자신이 인터폴이라고 떠벌거렸지만 그가 한 말들은 이미 신빙성을 잃었다. 그는 옥새를 탈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이다. 호태종은 여전
호태종은 발해의 마지막 신녀 훤희가 예언했던 시기를 주목하고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한민족의 정기가 바닥을 치고,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자신의 뒤를 이을 79대 한강왕의 재임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한강변에 터를 잡은 고구려와 발해, 백제 유민의 후손들 모두가 79대 한강왕에게 주목하고 있는 이유이다.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해왕족의 후예를 자처한 모연중이 한강왕위를 찬탈하고자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구축하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모숭산이 아들 모연중을 부추겼으리라. 모숭
호태종은 발해가 국운을 다할 즈음에 발해의 마지막 신녀(神女) 훤희(萱禧)가 했던 예언이 떠올랐다. 그 예언은 발해가 멸망한 이후 한강에 스며들은 발해왕족의 후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호태종은 부왕(父王)이었던 천부종(天附宗)으로부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은 바 있다. 신녀 훤희(萱禧)는 별자리로 미래를 예언하여 왕족의 두터운 신망을 얻은 신녀이다. 신녀는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주몽 사당에서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 그리고 주몽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국운을 잘 맞추는 신기(神氣)를 인정받아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大&
예전에 박사 위에 육사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박사 위에 잡사(雜事)가 군림한다. 박사는 한 분야의 전문가일 뿐이지만 잡사는 모든 세상일에 전문가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학이요, 잡설이다. 잡학잡설(雜學雜說)이다. 또한 어떤 전문가의 주장이나 이론으로 세상을 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융합의 시대이다. 그래서 세상의 난설과 난상을 집결해야 한다. 난설난상(亂說亂想)이다. 앞으로 이런 잡학난설 혹은 잡설난상을 생각나는 대로 적고자 한다.세상의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잡다한 견해와 생각들을 표주박으로 한 바가지 퍼
한 달 전, 오토왕으로부터 모연중에 관한 첩보를 입수한 호태종은 비밀경호단장에게 모연중이 국내에서 누구와 접촉하고 어떤 일을 꾸미는지 은밀히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한편으로 모연중의 부친인 모숭산의 국내 동향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오토왕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연중은 발해왕족의 후예를 자처했다고 한다. 호태종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와 발해! 그 기나긴 역사를 어찌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쯤해서 한강유역에 흘러들어온 고구려 유민과 발해 유민 사이에 얽힌 역사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유민들중 일부
클레어로서는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제레미를 예의주시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제레미와 사귀게 된 것도 그를 근접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없지 않았던 터였다.바짝 긴장한 클레어는 인터폴 파리지국장 자크베르에게 긴급 보고를 했다. < 제레미 M. 랜들에 대한 긴급 보고 >1. 한국 출생으로 10년 전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국적 취득. 한국이름은 모연중. 부친은 한국인 모숭산, 모친은 프랑스계 영국인 제인 W. 랜들이며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거주. 최근 6개월간 유럽보안용역업체의 계약직으로 인터폴 파리지국에서
모연중이 발해 왕국의 후손이라 해도 그것이 글로벌제왕협회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 클레어는 글로벌제왕협회라는 조직에 대해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 왕족에 대해서라면 클레어도 할 말은 있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클레어!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말고 살거라. 우리는 이래 봬도 그 옛날 화려한 영광을 누리던 로마노프왕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으니 말이다."어릴 적 들은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랍긴 하다. 하지만 과거의 왕족이 무슨 의미가 있다
13. 파리의 제레미79대 한강왕을 만나기 한 달 전, 모연중은 파리의 미라보 다리에서 연인 클레어와 같이 있었다.저녁 무렵 미라보 다리는 파리의 연인들로 북적이며 다리 아래 흐르는 세느강을 배경으로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곳이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와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이 사랑을 나눈 곳으로도 유명하다. 제레미, 한국명 모연중이 클레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클레어! 인터폴 업무가 체질에 맞는 거야? 얼굴은 곱상해가지고 말이야."아담하고 귀여운 얼굴의 클레어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제레미를 쳐다보며 웃는
12. 옥새의 행방모연중이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한 말투로 나의 심중을 떠본다."처가댁이 재벌은 아니어도 준 재벌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별세하신 아내분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수백억, 수천억 원은 될 터인데 아내분이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거액의 자산가가 된 것을 벌써 잊었나요?"이 자가 나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아내의 죽음으로 돈방석에 앉았다는 등, 화장실에 가서 혼자 껄껄거리며 웃고 있는 걸 봤다는 등 별의별 악소문으로 시달리다가 이제 마음을 추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모연중이 눈을 가늘게 뜨
11. 인터폴 수배자명단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태종의 딸 초순진과 사랑을 나눈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이 무슨 해괴한 주장인가.초순진의 거짓 고변은 귀엽게 봐줄 수나 있었지만 이 자는 작정을 하고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정체가 무엇이길래 감히 왕을 능멸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글로벌제왕협회에 내가 정회원으로 가입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나의 득달같은 질문에 모연중이 거침없이 대답했다."글로벌제왕협회요? 흥! 해외에 서버를 두면 그런 건 일도 아니지요. 그들 모두 국제 사기단으로
10. 부녀 사기단79대 한강왕으로 책봉된 지 얼마 안 되어 호태종의 딸 초순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비록 자신의 부친이 실성했다는 거짓 고변으로 나를 잠시 혼란에 빠트리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초순진과의 혼례와 합방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는가.선유도 정자에서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청초한 초순진의 얼굴이 떠오른다. 초순진과의 대화는 흥미로웠다. 학창시절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기도 했으며 아버지가 한강왕인 줄 모르고 있다가 아차산의 고주몽 제례에 다녀온 후 한강왕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
백상훈이 순진을 보고 있었다.어둠 속에서도 확신과 미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고 무엇에 대한 미안함일까. 먼저 얘기하지 못한 미안함이었을까.언젠가부터 백상훈이 계속 순진의 눈에 들어왔다.그 친구를 처음 본 날부터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한자를 좋아해 고등학교에 들어와 중국어 한시 동아리를 들었다. 동아리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데 늦게 동아리방에 들어온 한 친구가 눈에 띄었다. 키가 컸고 눈썹이 진하고 눈매가 매서웠다. 들어오자마자 자기소개라며 시조를 한 수 크게 외웠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
“어디 친척 집 가시나유? 한복 빼입고 가시는 거 보니께 그런거 같은디”“......”순진의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택시 기사님 혼자 질문과 답으로 택시를 채워나갔다.“강변북로는 왜 이렇게 막히는겨. 한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중요한 길은 한 10차선으로 빵빵하게 뚫어놔야 하는 거 아니여? 김종필이 대통령이 됐으면 왕복 6차로가 뭐여, 12차로도 가능헐 것인디. 서울 사람들은 다 꿀을 많이 먹어서 근가. 사람 말을 개 방귀로 아는 게 분명한겨. 우린 핫바지가 아닌디.”이미 택시는 모던기와커피를 지나 유턴을 해 우미내길 우측을
7. 초인(超人)의 기억 : 초순진 회상 세번째 이야기순진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다음 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에 멍하게 아버지가 해준 말만 반복해서 생각했다. ‘79대 한강왕이 될 것이다. 내가 왕이 된다니. 아니, 여왕인가 그럼.’수업이 시작됐지만 순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그 한 가지 생각만 잡고 있었다.창밖으로는 가을 운동회를 준비하기 위해 나온 초등학생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어떤 율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맨 앞줄에는 회장으로 보이는 듯한 아이가 뭐라고 소리 지르며 계속 한
트럼프는 피타고라스에게 자신의 운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잘만하면 운명의 탈출구라든가 운명을 바꾸는 비법까지 알아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운세가 스탈린과 비슷하다는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스탈린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트럼프(이하 '트'로 칭함) : 제 운세가 스탈린과 비슷하다면 저도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릴 수 있을까요?피타고라스(이하 '피'로 칭함) : 이오시프 즈가시빌리. 스탈린의 본명이지. 스탈린이 무슨 뜻
6. 초인(超人)의 기억 : 초순진 회상 두번째 이야기순진이 문지방을 넘었다.서재 바닥에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문을 잠글 새도 없이 다급하게 나가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렸을 때는 자주 들어와 책도 읽고 아버지와 대화도 하고 이런저런 놀이를 했던 방인데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누구든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고 조심했다. 순진은 굳이 아버지의 예민한 장소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고,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으니
5. 초인의 기억 : 초순진 회상편초등학생 때부터 순진은 이름 때문에 많은 놀림을 당했다. 반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놀림은 반복되었다.“초순진 왔다. 아니 얼마나 순진하길래 초순진인거야?”“아니던데? 저번에 입고 온 옷 보면 그렇게 순진하지 않은 것 같던데?“그럼 초날라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하하하하”“초바보가 아니라 다행이지.”아이들은 자신들의 대화가 얼마나 유치하게 들릴지 생각지도 않고 그냥 떠들어댔다. 아마 그들의 목적은 순진을 놀리는 데 있다기보다는 약자를 해하는 유치함과 사악함을 공유함으로 어리석고 쓸데없는 순간적 동
4. 탁한 세상을 맑은 세상으로한강변은 젊은 청춘들이 낭만을 즐기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며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강을 정원으로 조성하여 백성에게 개방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왕으로서 이보다 더 뿌듯할 수는 없다.게다가 왕 스스로 낭만적인 분위기까지 누릴 수 있다면 부러울 게 없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아리따운 여인과의 밀회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인과 나는 마치 오랜 지기라도 되는 듯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인류의 미래를 논하기도 하면서 달밤의 분위기에
3. 황홀한 일탈자칫 잘못하면 내가 실성한 노인에게 놀아난 꼴이 된다. 이마에 진땀이 나려한다. 여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왕이었던 건 한낮의 헛된 꿈이었던 게 된다. 여인은 또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인가. 여인의 처지가 애닯기 그지 없다. 이는 남자로서 연악한 여자에게 느끼는 보호본능이기도 하지만 왕으로서 백성에게 느끼는 애민(愛民)의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노인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력을 지녔다. 나 또한 왕위를 승계 받으라는 제안에 '이게 웬 떡이냐'며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