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가 긴 여행입니다. 그 길목에서 숱한 만남과 헤어짐이 씨줄과 날줄로 이어지고, 인연 따라 발길 닿는 곳에서 이루어진 상처와 기쁨이 추억으로 남습니다.대만 친구들과 다음을 약속했던 티베트 여행은 일 년 반이 지나도록 요원하기만 합니다. 돌아보니 오랫동안 갇혀 지냈습니다. 아마도 내 운명에는 역마의 기운이 강한가 봅니다.만약 달구지나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떠돌이나 낭인 혹은 거지 등등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무역한답시고 이곳저곳 많이도 돌아다니고, 여행도 즐겁게 다닐 수 있었으니 모두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이 성격 또한 각양각색입니다.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낙천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과 내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 폭력성이 강하거나 음흉한 사람, 마음이 따뜻하고 어진 사람 등등 수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체질 또한 다양하게 나눕니다. 우리나라 한의학에서는 4상으로 체질을 구분합니다.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 태양인으로 나누며 증상으로만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체질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또 체형에 따라 오행 즉 목화토금수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체
한국의 경주와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가 타이난(臺南)입니다. 기원전부터 천년을 신라의 수도로 지내온 경주의 역사와 비교하기는 어불성설이지만 최초로 왕부가 위치했던 덕분에 4~5백 년의 역사를 가진, 흔적들이 남아있는 고도입니다.타이난에서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입니다.蔣介石을 따라 대만에 온 사람 중에는 뒷골목 출신들도 있었습니다. 장개석이 지하조직과 연관되었다는 이야기의 연장인데, ‘청방’이란 조직에 속한 인물 중에 머리가 있고, 학식이 좀 있는 사람이 타이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친구들과
외국인이 뽑은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위에 거의 매년 대만이 올라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만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만족도가 세계 1위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만족도는 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한국인은 어려서부터 경쟁에 몰리고, 자각이나 목표보다는 타인과 비교하는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항상 맨 앞줄, 꼭대기에 올라서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식이 남보다 처지는 꼴은 절대 못 보지요. 그런 동력이 짧은 시간에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자신보다 남의 눈에 어떻게 뜨일지 먼저 생각하며 살다보니 지나치
대만 남쪽에는 까오슝(高雄)이라는 제2의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2018년 개관한 웨이우잉(衛武營)국립문화센터가 있지요. 일 년에 두세 번은 다녀옵니다. 골프 친구가 협찬사를 통해 구해주는 공짜 티켓도 한몫 하는데, 음악회에 관해서는 언감생심, 감히 논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이번에는 지인이 애들 시험이 끝나면 춤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하길 기다렸습니다.조명이 들어오고 커다란 북 하나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작은 북 기다란 북들이 무대를 가득 메웠습니다.
가난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변하며 G2로 올라서던 시절, 그 극적인 변화의 시기에 10여 년을 선전에 머무르며 여러 가지 듣거나 경험을 했지만, 주변 사람이 당한 의료사고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더글러스 장모가 림프샘 암으로 판정되어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장모의 나이가 쉰을 막 넘었거나 가깝다는 이야길 들었고, 몸도 건강해서 바로 수술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닌 듯이 말했습니다. 더글러스 처도 크게 걱정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요.수술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수술이 잘못되었다며 가망이 없다는 황당한 이야길 들었습니
중국에서는 글리터 기계를 팔 수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기계를 수입하겠다고 선전(深圳)으로 두 사람이 왔습니다. 사장인 장인과 사위가 함께 왔습니다.자기들 제품에 사용할 글리터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제품이냐고 물었더니 카탈로그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주로 내장재로 사용하는 건조 페인트였습니다. 페인트를 종이처럼 얇게 건조하여 필요한 크기로 부스러뜨려 벽면에 뿌리는 제품입니다.백색에 약간의 흑색을 섞어서 뿌리면 대리석 느낌이 납니다. 우둘투둘 자연스러운 느낌과 다양한 색을 혼합하여 다른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자 2004년 경 선전(深圳)으로 갔습니다. 선전은 잘 아시다시피 홍콩과 다리 하나로 연결된 경제특구입니다.인구 30만의 작은 어촌마을인 선전은 1979년에 시로 승격되고 다음 해 중국에서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됩니다. 서방과의 교역 창구인 홍콩의 배후에 생산거점 도시를 만들어 중국의 산업화를 이끌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계획에 따라 탄생한 도시입니다.지금은 1,300만 명이 넘는 인구에 일인당 국민소득도 3만 불이 넘어가는 대도시이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도로에는 자동차와 소달구지 사람이 뒤엉켜 다녔지요.
더글러스가 한국에서 거주하며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투자회사인 대만의 光群雷射의 파견 직원 신분이어야 하고, 중국의 여자 친구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더글러스와 법적인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어느 시대나 다 그러하듯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욱 잘 사는 나라로 가기를 열망합니다. 당시 중국 여자들도 대만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땅, 그리고 가장 쉽게 또 편안한 마음으로 가고 싶은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만에서는 꽤 까다롭게 사실혼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와 결혼증명 사진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중국
지역 보건소 공무원으로 일하던 더글러스 부인이 부업을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이 쉽게 생각하는 돈벌이 수단으로 식당을 차립니다. 경험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팔다 남으면 가족이 먹으면 되고, 원가 대비 이윤도 높으니 위험 요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누구나 쉽게 뛰어들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쉽게 망할 수 있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려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발생하기에 온힘을 다해도 부족한 법이지요. 그런데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며 돈만 투자하여 번드르르하게 차렸으니 안 망할 수가 없습니다.더글러스는 부인이
일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거나 소식이 없어도 항상 곁에 있는 느낌의 친구가 있지요. 그런 친구 더글러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대만이야기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고, 그 말은 상당히 신뢰할 만합니다.대만에서 태어나 아주 똑똑하고 부모의 자랑거리였던 한 여학생이 고등학교 때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너무 갑작스러운
위기 다음에 기회라는 말이 스포츠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가까이 꾸려오던 무역회사를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막다른 상황에서 IMF 위기를 맞았습니다. 저에겐 그 위기가 기회가 되었고, 무역회사를 유지하며 스틸 볼 수출만으로도 연 매출 10억을 초과하였는데 홀로그램까지 가세를 하자 법인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개인회사 이름을 버리고 새로 회사명을 취하였습니다. 또한, 분양받은 아파트형 공장으로 이전하는 성장을 하였습니다.홀로그램 섬유와 비슷한 시기에 천안에 있는 담배인삼공사 공장에 홀로그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두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고전하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선전하는 국가가 대한민국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그만큼 튼실하다는 이유겠지요.조선, 자동차등의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 그리고 미래의 먹거리인 바이오, AI, 로봇, K-문화 등등 격세지감입니다.농업 이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던 우리가 중공업 국가로 넘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야가 섬유산업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로 많이 옮겨갔지만, 특수섬유나 기능성 섬유는 아직도 한국이 중요한 공급처로 알
동양대 표창장 파문으로 표창장 하단 왼쪽에 동양대 로고가 은박인가 금박으로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컬러복사기 성능이 좋아져 일반 인쇄물은 분간하기 어렵게 복사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금박이나 은박 부위를 복사하면 검게 나타납니다.그럴 경우 똑같은 형태의 금형을 만들어서 박을 쳐야 하는데 한 장을 위조하기 위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금형을 만들거나 박을 치는 공장에서 확인 안 하고 만들어주지도 않습니다.그렇지만 금박 은박은 시중에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기술이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아 위조방지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홀로그램 필름이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포장지와 쇼핑백 분야입니다.한국의 공산품은 일본 제품보다 저렴하고, 동남아 제품보다 품질이 뛰어나 수출이 잘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1인당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기고, OECD에 가입한 업적을 남기려는 정권의 욕심 때문에 원화가치를 높여 달러당 원화가 900원대(현재 1,120원)에 이릅니다. 그러자 한국제품의 위상이 가격은 비싸고 품질은 떨어진다고 외면받는 상황이 되었지요.IMF 금융위기를 맞이한 이유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1997년 전후 제가 주목하는 상황입니다. 당시 경기가
지금도 대만 공항에 내리면 약간의 설렘과 기대 그리고 고향에서 느끼는 포근함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대만사람의 기질은 사업에 특화된 민족 같습니다. 타인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문제를 제기하면 적극적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손해가 안 가도록 노력합니다.한국의 지인 중에는 ‘대만은 일본에 50년 지배를 받았는데, 대만 시장은 온통 일본 제품만 있냐?’고 묻습니다.대만은 작은 섬나라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언어와 종족이 다른 여러 민족이 이 섬으로 건너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山地族). 나중에는 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되새겨봅니다. 어느 순간의 짧은 눈빛 혹은 한두 마디 이야기가 어떤 일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비즈니스의 시작과 끝은 만남입니다. 삶도 마찬가지지요. 출생에서 죽음까지 만남의 연속인데 되돌아보니 모두가 필연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불평과 비난으로 10년의 만남을 유지한 나와, 처음 만남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반가운 미소를 전하는 또 다른 내가 10년 후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종종 그려보곤 하지요.1996년 중국의 대만 해협 봉쇄 후 수입이 없던
다음날 아침 스틸 볼 사장과 함께 무라타에 갔습니다. Peter Goh와 C. K Soh 그리고 Inspection 책임자 등이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충혈된 눈은 하루가 지나도 가라앉지 않아 초췌(?)하게 보였습니다.일부러 그런 것도, 연기한 것도 아니었는데 안면이 있는 그들이 오히려 저를 걱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명백한 저의 과실이라고 시인하고 불량품 전량 항공편으로 공수하고, 앞으로 매 생산 LOT 별 검사 데이터를 첨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스틸 볼 공장 사장이 방청 코팅 과정에서 이물질이 들어가지
C. K Soh와 일본인 직원이 돌아간 후 메일이 왔습니다. 싱가포르의 무라타 전자에 물건을 납품하려면 반드시 벤더(VENDOR) 업체로 등록되어야만 납품할 수 있다며 많은 양식을 보내왔습니다.사무실에는 마침 영창피아노 무역부서에서 일하다 독립한 영문과 출신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IMF 금융위기 무렵에 대만 가구업체 친구와 영창피아노 본사에 상담하러 들어갔다 만났습니다. 당시 피아노 의자 상담을 했는데, 피아노 의자를 고무나무로 만든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기에 잊혀 진 일이었습니다.어느 날 사전
Peter Goh가 예약해준 호텔에 짐을 풀고 다음 날 택시를 타고 회사에 갔습니다.편리한 교통과 깨끗한 도시로 여행객도 많이 찾던 싱가포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수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일인당 국민 소득은 항상 상위에 속한 나라입니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면적은 원래 서울보다 작았으나 간척사업으로 계속 확장하여 서울보다 넓고 인구는 대략 절반정도입니다.도시국가라서 무슨 공장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도심을 벗어나니 의외로 한적한 곳이 나오더군요. 이순 로드에 위치한 무라타 공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던 Pete
회사를 방문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라타 전자 말레이시아’에서 실제 테스트를 위한 물량을 주문했습니다.스틸 볼의 품질은 얼마나 고르게 원형에 가깝냐(진구도)에 따라 결정되더군요. 예를 들어 지름이 3mm인 작은 볼을 주먹만 하게 확대하면 찌그러져 있거나 표면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열처리를 통해 경도를 맞추고, 연마과정에서 오차는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지만 진구도 때문에 Grade를 올리지 못하는 공장들이 많았고, Grade에 따라 가격 차이도 크게 납니다.다행스럽게도 요구하는 볼의 Grade가 높지 않았습니다. 볼 생산
무역회사를 운영하려면 무역업등록증을 받고 무역협회에 가입해야 하던 시절. 무역협회에서는 회지를 발행하여 회원사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리 눈여겨볼 내용은 없었고, 뒤쪽에 해외 업체에서 수출하고자 하는 품목이나 수입하고자 하는 품목이 연락처와 함께 실리는 난이 있었습니다.등산장비와 관련한 문의를 보고 답신을 보내면 샘플 보내라는 회신에 허탕 치기 일쑤였습니다. 나이지리아 어떤 회사에선 10만 불짜리 조악한 어음을 보내며, 세계 무역박람회에 부스를 차렸으니 물건을 보내라는 회신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응하지 않았지요.그러다 말레이시아 회
가까운 대학 친구도 IMF 금융 위기를 맞으며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친구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을 물려받아 플라스틱 원재료를 사출 업체에 공급했고, 사출 업체는 가공품을 기업에 납품한 후 어음으로 결제 받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당시에는 3개월짜리 어음이면 양호한 편이었지요. 이 어음을 당장 현금화할 수 없으니까 어음 할인을 받아서 사용하거나, 공장과는 외상 거래를 합니다.공장은 외상이 많은 부실한 업체와 거래를 끊고 싶어도 그동안 쌓인 외상값을 받기 위해 또다시 외상을 주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외상은 늘어만 갔지요. 그러다
많은 음식물이 쓰레기장으로 향하고, 지나친 섭취로 인한 질병들이 걱정되는 이 시대에도 누군가는 맹물로 허기를 채우거나 아득한 절망의 세월을 살기도 합니다.보리밥일망정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게 가난하던 시절, 문밖에 서 있는 걸인에게 한 종지 곡식을 건네던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 떠올립니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하는 일은 참 싫어하지만,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괜히 신이 나지요.타이베이에서 Mr 정을 만났을 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며 자리를 마련하더군요. 꽤 큰 회사에서 경영을 맡았던 L 사장이 갑자기 잘려 어려움에 부닥쳤답니다. 그
Mr 정의 스틸 볼 사업은 자본만 뒷받침되면 나름 손쉬운 업종이었습니다. 녹 방지 처리만 하면 수십 년 보관도 가능하고, 원자재 값이 올라가면 물건 값도 덩달아 오르지요.볼이 필요한 공장에서 주문하면 수량을 늘려 수입한 후 납품하고 나머지는 재고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재고 자산은 소량 주문이 올 경우 더 많은 이익을 붙여 팔기에 창고에 있으면 그게 곧 재산이고, 볼이 다양할수록 재산 가치도 높아집니다.부인이 탈세로 Mr, 정을 고발하고 이혼할 무렵, 회사 경리를 부인이 보며 오랫동안 준비하고, 처남이 영업하고 있어서 타이베이 회사
7년여 순조롭게 성장하던 사업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절벽, 아니 낭떠러지 앞에 마주한 상황이었습니다.사업도 생명체처럼 영원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무척 노력하였지만, 그 또한 뜻대로 안 되더군요.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바이어가 주는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여 수출만 했던 사업이라 국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못 했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재력 경험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만 생기더군요.그래서 섣부른 결정보다 시간을 벌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쉽지 않지만 멈추는 일은 더 고통스러울
대만 시장으로 등산장비가 활발하게 수출되던 1995~6년경에도 항상 새로운 사업 종목을 찾기 위해 신경을 쓸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교역이 활발하던 때가 아니어서, 홍콩 업체의 도움을 받아 홍콩 국경에서 중국 입경증을 받고 선전(深圳)으로 들어갔으며, 광저우(廣州)의 켄톤(광동)페어도 참관했습니다.그때의 선전은 지금과는 상전벽해였습니다. 저녁 식사하러 가는데 호우가 쏟아지자 금세 배수가 안 된 물이 발목을 지나 무릎까지 차오르더군요. 식당에 갔는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암흑이 되더니 종업원들이 익숙한 동작으로 양초에
나비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도시에 취직하면서 연락이 여의치 않았다고. 당시는 전화사용도 쉽지 않을 때였고, 만나기로 했던 시간과 장소가 엇갈리면서 헤어지게 되었답니다.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여 적극적이지 못했던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아있었답니다.후에 현재의 부인과는 어머니가 찬성하자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어머니가 원한다면 결혼해주지 하는 반감이 깔린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는데 현재 요양원에 있습니다.그렇게 헤어졌던 여자
대만이나 중국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만만디(慢慢的, 천천히)’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꽌시(關係,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들어가는 저에게 대만 친구가 한 첫 번째 이야기가, ‘중국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살려면 ‘꽌시’ 즉 인간관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사업의 기회와 성패는 사람이 만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을 얻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얻는다는 것이 5천 년 역사의 핵심이 아닌가요? 하지만 대부분은 눈앞의
지금은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지 않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야영과 취사가 가능했습니다. 당시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값싼 가스버너가 다양하게 생산되었지요. 새로운 형태의 가스버너가 나오면 거의 모두 찾아서 수출하였습니다.그 중 첫 거래를 하는 사장에게 오더를 주었더니 부품 조달하느라 자금이 달린다며 일부 결제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빨리 보내야 시장을 선점하니까 원하는 돈을 결제하고 속히 납품하라고 했지요. 하지만 약속한 기일을 넘기며 여러 이유를 댑니다.나중에 대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오더한 물건이 이미 대만에 풀렸다고. 알
대만으로의 등산장비 수출은 순조로웠습니다. 버너, 코펠, 매트 등부터 바람막이, 눈이 내리지 않는 대만에도 3,000m 넘는 산들이 많다 보니 아이젠도 많이 나가고 돗자리와 의류도 나갔습니다.컨테이너로 대량의 물건을 보내니 수출 운임과 경비도 대폭 줄었습니다. 가격 경쟁력이 생겨 시장의 수요도 늘고, 다양한 제품이 들어오니 소비자들의 관심도 더 늘어났습니다. 자신의 매장에서 팔다가 업계 지인들에게 공급하게 되고,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도시와 지역을 나눠 중간 딜러들에게 공급하는 체계로 바뀌었습니다.어느 해 겨울에는 딜러들이 伍 先生
회사를 설립한 첫해, 여름이 오기 전에 두 번? 정도 수출을 더 한 듯합니다. 여름 되면 대만 등산장비 업계가 비수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지만,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그 여름은 동짓달 기나긴 밤보다 참으로 길고 길었습니다.한국은 반대로 봄부터 시작하여 여름이 되면 핫 시즌입니다. 그러다 8월 초순이면 공장들은 출고가 거의 멈추고 바닷물이 차갑게 느껴지는 8월 15일경부터 매장에도 손님이 한산해지는 구조였습니다.안정적인 내 사업장도 없고 수입도 없던 어려운 시절, 나와 이름 석 자가 한자까지 똑같은 한 사업가가 제안하더군요.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