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시대 일제강점기에 이역만리(異域萬里) 이국(異國)을 떠돌며 풍찬노숙(風餐露宿) 헌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국에서 묻혔던 홍범도 장군, 몇 해 전 그분의 영혼을 어렵게 고국으로 모셔왔습니다.작금, 일부 후대들은 그분에게 이념딱지를 붙이며 모시기를 거부합니다. 무슨 꿍꿍이 속셈인가요? 어허~그분 홍범도 장군, 조국의 완전한 독립 후 영구 귀국할 것을 약속하며, 재차 총을 들고 독립 전장으로 길을 떠납니다. 고령의 장군이 다시 떠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만, 시국이 하수상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몇 년이
나는 밤마다 두 분이서 주무시기 전에 그날 사고 판 떡볶이, 어묵, 꽈배기, 도너츠 등과 만화책값 대본료들을 합산하시며 상자에 넣는 또르륵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한 푼도 거짓이 없는 삶의 소리. 아버지는 병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싸우시고 불의한 자본에 대해서도 어머님과 더불어 거침없이 싸우시고 결국 이기셨다.나 같으면 그리 할 수 있었을까. 아이들이 셋이나 달려 있는데. 이 두 가지의 승리의 기억이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화 '한겨레그림판'으로 거침없이 싸울 수 있게 하였다. 두 분의 삶. 어머니가 기록한
아버지의 일기장 42부기가 너무 심해 점포에 나가지도 못했다. 마침 수동이 식구가 와서 도움이 됐다. 빙수를 많이 갈아 매상이 올랐다. 수동이가 오는 길에 수박을 사 와서 복수가 찬 몸이지만 몇 쪽 맛있게 먹었다. 방조가 벌집(애벌레)을 가지고 와서 삶아 두었다. 그리고 제수씨가 직접 채취한 아카시아 꿀을 갖고 왔다. 언제나 나를 위해 성의를 베푸는 제수씨께 감사힌다. 그리고 아버지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나셨다.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화를 하루 쉬고 나는 아버님 관 옆에서 위의 만화를 그려 보냈다. 당시 전교조 교사가 탄압 받고 사망하
我的童年記憶,竹叢雞羣。어렸을 적, 대나무 숲에서 모이를 쪼던 한 무리의 닭을 기억합니다.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아버지의 일기장 41신정 연휴로 서울의 재동이가 내려와서 오랜만에 부자간에 대화를 나누며 긴 시간을 보냈다. 재동이가 근무하는 신문사와 작품 문제 등등의 대화가 오갔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지만 지금 근무처인 한겨레신문에 상당한 기대를 하는 모양. 작품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바야흐로 서서히 미술 방면에 자리를 구축해갈 것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연구하고 자료 수집에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예술의 길은 험난하고 긴 세월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역시 예술인들은 가난하다는 것이 그들의 특유한
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아버지의 일기장 40서울에서 큰 며느리가 왔다. 시현이 솔나리 남매를 안아 보았다. 시현이는 오랜만이라 낯을 가려 내 품에 오지 않는다. 출생 후 처음 안아 보는 손녀다. 귀엽다. 아직 윤곽이 뚜렷하진 않지만 좀 크면 예쁜 아기가 될 것 같다. 손자, 손녀 모두 피부가 희다. 작은 며느리와 진일이가 미리 와 있어 세 손자가 함께 모였다. 흐뭇하다. 애당초 손자를 안아 본다는 것은 꿈꾸지도 못햇다. 그러나 요행이 지금껏 생을 유지해서 친손주 셋과 외손자까지 안아 보게 되었다. 행복하다. 긴 투병 생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 온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가을입니다.유럽 달팽이를 잡아 호박잎을 먹게하였습니다.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편집 :김미경 편집위원
누구도 찡그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 언제나 남을 돕는 사람. 기획의 천재, 방기식과 함께 인사동에서.지난 8월 망우리 마을만들기 박영윤 사령관님의 명에 따라 박찬우 작가와 함께 마을 어린이들과 엄마들 캐리커처를 그린 후 디자인을 도와준 박인옥씨 부부와 치맥을 먹으면서 두 부부를 그렸다. 박인옥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겨레신문을 견학 왔었고 그때 내가 잘 대해 줬다고 지금도 얘기를 한다. 휴~~~아침에 검도 연습을 하러 갔다. 산곡 초등학교에서 초·중학생들과 사범들과 연습을 했는데 중학생들이 무서웠다. 이넘들은 덩치도 나보다
지난 9월 9일 집회에서...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아버지의 일기장 39짧은 하루를 방 안에 틀어 박혀 수동이 결혼 청첩장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 청첩장을 쓰고 보내는 일도 이제 마지막이다. 3남매를 모두 시집 장가 보낸 것이다. 우리 부부는 서서히 외로운 노인 대열로 들어 가는 것일까. 근래 와서 많이 쓰이는 문구 중 '쓸쓸한 노년'이 떠오른다. 구 시대 노인들은 대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외롭지 않았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것이 보통이어서 손자 손녀와 더불어 황혼의 외로움을 달래고 가족들의 존경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며 여생을 편히 보냈다 할까? 경제적인 궁핍으로 힘들었겠지만
8월 중순 경 박영윤씨가 하는 망우리 마을축제에 기레기 저격수 박찬우 작가와 함께 주민들 캐리커처 그려주기 행사에 참여했다.그때 그려 준 아이 중 하나. 이름은 잊어 버렸다. 아영이라고 하자.- 아영아. 넌 공부하는 게 좋아, 돈 버는 게 좋아?-..............음..... 돈 버는 거요.- 돈 벌어서 자기가 쓰면 재밌겠지?- 예.- 인생이란 말이야.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자기가 쓸 때 그 맛이 있는 거야.- .... 그럴 거 같아요. 해든이는 내 짐작대로 할아버지가 해가 든다고 혹은 들었다고 지어 준 이름이다. 편집 :
아버지의 일기장 38팥빙수 가는 일이 하나 더 생겨 만두, 떡볶이는 내가 맡는 수밖에 없다. 하나 같이 많이 달라, 한 개 끼워 달라, 서비스하라 등 애교를 부린다. 귀여운 애걸이다. 그러나 많은 학생에게 공평한 서비스는 어렵다. 정에 약한 나지만 꾹 참고 거절한다. 어쩌다가 허술한 것을 덤으로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가씨도 아니어서 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제는 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우는 아이도 있었다. 결국 그 쥐는 잡고 말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이렇듯 손님 대하기가
아버지의 일기장 37어제는 서울의 큰 며느리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이가 둘이나 있어 직접 와 보지는 못하고 매우 안타까운 모양이다. 아비는 직장을 신문사(한겨레신문사)로 옮겨서 급료는 종전보다 못해도 전망이 좋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있으니 손자들이 더욱 보고 싶다. 특히 시현이의 재롱이 눈에 아롱아롱하다. 이번 주 내로 간조직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다음 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이제는 병원 생활도 몸에 배 가고 병원 식사도 잘 한다. 지금의 상태는 매우 좋은데 치료하는 데 아직도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한겨레 시사만화 한겨레
아버지의 일기장 36오랫동안 기다리던 재동이 결혼식이다. 예상 외로 많은 하객들이 와 주셔서 송구할 정도로 흐뭇하다. 축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식을 진행하면서 자칫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잘 참은 것이 지금도 다행이다. 내 스스로 칭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긴 투병 생활에서 오늘 같은 영광된 자리를 상상도 못 했다. 일말의 가느다란 희망은 있었지만 실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했듯이 좋은 규수를 맞아 우리로서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니 감개무량하다. 어쨌든 딸에 이어 큰 아이를 결혼시켰으니
아버지의 일기장 35작년 가을에 사 놓았던 빙수 기계를 풀고 청소를 하고 빙수 갈 준비를 하느라 오전 시간을 다 보냈다. 우리의 빙수 역사는 길다. 60년도에 부산에 내려가서부터 시작했으니 26년의 경력이다. 당시는 수동식이어서 힘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갓 서른이었고 나도 간혹 돌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큰 그릇에 수북이 갈아 주고 1원을 받은 것 같다. 하루 20관을 갈다 보면 아내의 팔은 피로가 연속됐지만 그때는 젊었으니 자고 나면 다시 활기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26년의 세월이 흘러 곧 지치고
어젯밤.... 노량진 전철역에서 내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가는 도중, 노량진 학원 골목 가장번화한 삼거리, 신한은행 옆 씨유 앞 테이블에 앉았다.이곳은 내 어렸을 적 고향 샘물 땅이라고 부르는 우물가(거기가 마을의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에 연자맷돌 큰 것이 놓여 있어 사람들이 저녁답에 쉬기도 하고 얘기도 했는데 이 테이블이 흡사 옛 우물가 같아 앉아, 나는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다.그렇게 사이다나 콜라를 사고 초콜릿 몇 알을 까먹으며 마치 고개를 넘는 길손이 고갯마루에서 긴 숨을 쉬는 듯 하루를 접는 것이다.그런 오늘 밤,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