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변 지역이나 조선족 사회에서 이화림(1905~1999)은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역사 교사들조차 이화림을 잘 모른다. 『한국사』 교과서 어디에도 이화림은 없다. 이런 역사 왜곡 현상들은 분단 상황이 초래한 결과다.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사회에서 코뮤니스트는 금기어였고 심지어 여성 코뮤니스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중으로 차별받은 탓이다.항일 독립투사 이화림은 유관순만큼 널리 알려야 할 역사 속 인물이다. 물론 교과서에도 당연히 상세하게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 ■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북 오송이 고향인
봉오동 독립전쟁은 승전일인 6월 7일 하루의 전투가 아니라 1920년 6월4일부터 6월7일까지 봉오동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흘간의 전투를 모두 포함한 전쟁을 의미한다. 김수빈은 이 사흘간 벌어진 전투를 하나의 그림에 모두 넣었다.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직후 봉오동에 본격적인 정예부대 가 창설되었다. 마적들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사병부대가 한일병탄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들은 1910년 전부터 10여 년 간 훈련된 완전무장한 정예 병사들이었다. 중국 동북삼성 군벌들 간의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을 비롯해 실
지난 12월 3일 향년 78세로 소천하신 고 송규완 선생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광주학생독립운동의 큰스승 송홍 선생이 태어난 마을)에서 태어나시어 초등학교 교사로서 후학을 기르셨다. 화순군 춘양면 춘양초등학교장으로 계실 때, 15년 동안 화순 초등교육에 헌신하고 특히 화순교육청 역점사업인 조백교육(皁白敎育)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6년 12월 29일 ‘화순교육상’을 받으셨다(화순군민신문, 2006.12.28.). 지금은 듣기 힘든 말이나, 조백(皁白)은 검은색과 흰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써 말과 행동이 올바르고 겸
산수몽의 효사(爻辭) 여섯 개 중 제3효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효사에 몽(蒙)이 보인다. 즉, 제1효사는 발몽(發蒙), 제2효사는 포몽(包蒙), 제4효사는 곤몽(困蒙), 제5효사는 동몽(童蒙), 제6효사는 격몽(擊蒙)을 각각 핵심으로 한다. 산수몽의 괘사는 동몽, 즉 아직 사리에 어두운 아이인 학생이 교육자(我·선생)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할 때, 그 교육자가 취할 태도는 바르게 함이라는 뜻으로 풀어진다. 이는 출가 수행자가 큰스님을 찾아 제자가 되겠다고 정중히 청할 때에, 여러 큰스님이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예컨대, 독립운동
안창호 선생이 덕·체·지 삼육, 무실·역행·충의·용감, 실력양성, 인격개조 등으로 표현되는 교육을 중시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다. 그런 교육사상의 전거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안 선생이 또 하나의 이름으로 스스로 지은 ‘도산’이다. ‘도산’이 내포하는 바는 주역 괘 제4번 산수몽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산수몽의 주제는 교육이다. 우선, 안창호 선생이 당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한 내력은 어떠할까?제1설은 대동강 도롱섬(현 평남 남포시 천리마구역)이다. 안창호 집안은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 대동강
"그랴 거기서 봐”어머니는 막걸리 친구들과 다음 날 점심 약속을 하고 계셨다. 아직은 6학년인 새댁들과 읍내에서 셋이 만나 서로 돌아가면서 지갑을 열고 막걸리 한잔으로 심심함을 달래신다고 젊은 아낙들이 나를 끼워줘서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시면서 들숨과 날숨을 연거푸 쉬고 계셨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 온 것 같다고 웃음으로 화답을 해주신다.■ 발끝에 밟히던 시체들, 피란길의 충격 6 25때
단박에 알아보았다. 어머니 댁을 찾고 있던 내 눈에 미소가 고운 어머니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명순 회장님이셨다. 처음 뵈었지만 나긋나긋한 말씨처럼 눈웃음도 미소도 어여쁜 어머니. 봉사단체에서 고추 따는 데 손을 보태고 오셨다면서 겨우 한숨 돌리고 교자상에 먹거리를 수북이 올려오셨다. 이야기도 풍성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앨범을 펼치자마자 영화배우 같은 두 아가씨의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여동생분이셨다.“나는 내 동생 반도 못 따라가 우리 동생은 영화배우처럼 예뻤어”라고 동생을 치켜세우셨지만 여든이 넘어도
경실련을 시작으로 30년여 년 언론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는 이태복 장관을 선배 노동운동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오동 청산리 독립전쟁 승리의 주역 최운산 장군의 삶을 직접 전해드리면서 역사가 이태복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인연의 깊이가 달라졌다. 간도 제일의 巨富 최운산은 마적으로부터 조선동포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사병부대를 운영할 만큼 군사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한일병탄이 되자 자신의 소유지 봉오동을 독립군기지로 개발하고 무장독립군을 지속적으로 양성했다. 1919년 3.1독립선언을 계기로 최운산의 사병부대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한 사건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신격화하여 그 후손 일왕을 ‘신’(神)으로 숭배하게 강요한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주(主) 이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기독교 제1계명을 어기는 행위였다. 그러함에도 제국주의 일본은 집집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단(神壇)을 만들게 했다. 게다가 학교와 공원에도 신사(神社)를 지어 아침 저녁으로 참배를 강요했다.신앙인에게 신사참배 문제는 일반 조선인에겐 바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를 암송하는 문제와
왜,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이 창단을 주도한 흥사단은 ‘기러기’를 상징으로 할까? 도산 선생이 점진주의(漸進主義)를 주장한 근거는 무엇일까?도산 선생의 자연에 대한 관찰이 돋보인다. ‘기러기’의 뜻은 두 가지다(흥사단 누리집). 첫째, 기러기는 반드시 떼를 지어 날아간다. 그러기에 단결과 협동을 본받자. 둘째, 기러기는 질서와 방향 감각이 뛰어나다. 그런 특성을 배우자. 이에 따라 흥사단은 그 기장(記章·어떤 일을 기념하는 뜻을 나타낸 휘장)을 사(士)자를 기러기 모양으로 도안하였다.도산 선생은 당시 우리 민족
제주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1만1000㎞ 평화 달리기 대장정을 하는 강명구(65)씨가 13일 오후 충북에 도착했다. 강씨는 이날 아침 7시 대전 용전동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출발해 신탄진-현도-청주 육거리시장 등을 거쳐 오후 3시40분께 평화 통일 수레를 앞세우고 충북도청에 다다랐다. 강씨의 대장정은 제주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희망래일,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등이 돕는다.그는 “정전 70돌이 되는 내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판문점에서 평화 미사를 집전하시라는 염원을 안고 달리고 있다. 제 뜨거운 평화 열망이 로마와 교황께 닿기를 바란
‘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계셨다. 빈 콜라병에 어머니가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 글씨를 써서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계셨다. 어느새 간장액이 묻었나 ‘집’ 자가 희끄무리하게 번졌다. 자녀분들이 오기 전에 챙겨줄 것들을 미리 준비해두고 계셨다.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나, 그리고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여”60년 넘게 담갔으니 어머니도 셰프님이다.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따라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다. 뭐 특별한 재주는 필요 없다. 그저 60년 넘게 담갔더니 진한 맛이 우러
땡볕이 극성일 때 어머니를 뵈었다. 능소화가 하나 둘 떨어져 내 발걸음에 밟힐까 사뿐히 내딛던 날에...그날은 염천임에도 절정의 가을날에 농익은 주황빛 과실을 맺어줄 감나무 잎도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능소화와 감 열매, 둘이 짝꿍이라는 건 주황빛깔의 따뜻함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예쁜 집 2층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여기에요”어머니의 80년 인생, 듣지 않고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2층에 오르자마자 인사보다 탄성이 먼저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전망. 살아서 움직이는 나뭇잎들을 감싸 안은 짙은 녹음, 빈 운동
2019년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 간행사엔 ‘특별판’에 수록할 인물로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의 훈장을 받은 애국지사 122분 전원과 ‘독립장’을 받은 애국지사 중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큰 공적을 세우고 희생당한 애국지사 및 외국인 후원자 22분을 수록”하였다고 밝혔다.공훈격 2등급에 해당하는 ‘대통령장’을 받은 의열단원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전하며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김좌진과
■ 뽕나무집 딸, 양잠학교 나와 양잠교사 되다1947년 읍 마항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옥천이 실을 생산하기로 한창 유명했을 때, 아버지는 뽕나무를 재배하셨다. 가족들이 일하러 가면 동생들을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고모와 번갈아가면서 하루는 동생들을 돌보고, 하루는 학교에 갔다. 그러느라 졸업이 조금 늦었나 보다.9살에 들어간 학교를 16살에 졸업했다. 어렵사리 삼양국민학교(15회)를 졸업했는데, 그땐 월사금을 안 내면 졸업장을 안 주는 시대였다. 고모랑 나랑 아버지를 붙잡고 ‘아이고 아버지’하고 울
옥천의 40년 된 생활유산인 노포(老鋪), 신기닭집한동네서 같은 일을 40년 한다는 건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 곧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유산인 노포(老鋪)의 점주들을 존경한다. 40년간 노포를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뵙기 전부터 인상 좋은 이웃 아저씨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신기닭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따님 수정씨의 인형같이 생긴 두 공주님과 아버님을 뵈면서 적잖이 놀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생기셨다. 영화배우 신성일과 닮으셨지만 더 잘 생기신 아버님. 아버님은 외모
우리나라 최고의 국어운동가이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목대잡이(지도자) 고루 이극로 선생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두고 ‘혁명애국투사’라고 칭송했다.중국 인민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돼 나오는 「호가장 전투」(1941) 당시,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일본군과 교전 도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던 연변 작가 고 김학철은 약산 김원봉을 이렇게 회상했다. “항일테러 조직 영수답지 않게, 그리고 목에 일제의 막대한 상금이 걸려 있는 사람답지 않게 병원 원장이나 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온화했으며 이야기는 가식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의열단
‘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 평화 마라토너 강명구씨가 내년 11월까지 19개 나라를 400일간 달리는 1만1000km 대장정을 시작했다.그는 지난 22일 오후 제주시 관덕정 앞 광장에서 ‘평화 더 뜨겁게! 더 간절히!’를 구호로 ‘400일 평화 달리기’ 출정식(사진)을 했다.강명구평화달리기 추진위원회(위원장 이한용)는 이날 “2018년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 남북대화가 단절되고 북미 간 긴장이 지속되는 분위기를 평화로 풀어내고자 전 세계 종교·평화 지도자와 한민족 동포의 해원 상생과 평화 염원의 뜻을 모았다”며 한국전쟁
고향 충남 예산을 떠나 옥천에 터를 잡고 52년을 보내기까지. 그 모든 시간은 건축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지금 그는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감리를 한다. 중학생 시절 그의 손재주를 알아본 은사님의 추천으로 입학한 대전공업고등학교의 건축과. 그곳에서 건축학도의 기반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군 제대 후 사회경험을 쌓고 옥천읍에 강계식건축사무소와 가족의 터를 잡기까지 돌아보니 80년이 훌쩍 지나있다. “이건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제도판이야.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쓰고있지.”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강계식(81,읍 문정리)소장을 만났다.■ 어린
이번 세미나에서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생애와 친일 논쟁’을 다룬 장우순 박사(안중근평화연구원)의 논문이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최진동 장군의 친일논란을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대하고 있었다. 주장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일’이라는 단어의 선정성에 갇혀 학자들도 외면하고 있었기에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러한 주장이 단지 소문으로 존재했을 뿐 학계에서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봉오동과
2주제 “봉오동전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최은주가 지난 100년간 역사학계에서 봉오동 독립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는지 기존의 연구를 모두 살펴보고 학술적 오류와 왜곡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 만주지역 무장투쟁사는 대부분의 연구가 일제 밀정보고서 등 일제문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고, 국내에서 사료 발굴이 어려웠던 탓에 교차분석을 통한 학술적 성찰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얼마든지 현장을 답사하고 중국자료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북
很高兴认识你,我们玩得很开心Hěn gāoxìng rènshí nǐ, wǒmen wán dé hěn kāixīn어르신이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 먼저 건네셨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흘려버렸다.“만나서 반갑고 우리 좋은 시간 보내요” 라고 대충 알아들었다. 뭐 대략의 맥은 통했다.어르신의 인생 강의를 한 수가 아닌 열 수는 배우고 돌아오는 길.발걸음뿐만 아니라 뒤통수까지 꽉 차게 훈훈했던 시간이다.중국어와 영어는 어지간히 한다고 하시며 당신이 소통하는 사람들이 고관대작이 아니니 그냥 저냥 필요한 말 정도 수준이라고 겸손의 미덕까지 보이셨다.
지난 6월 23일 국회 제3세미나실에서 “독립군기지 봉오동의 주역 최진동과 최운산 형제”를 주제로 (사)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7회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국회에 도착해 세미나 준비를 시작할 무렵부터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학술세미나를 마친 참석자들과 함께 폭우를 뚫고 뒷풀이 장소로 가야 했다. 신발도 옷도 등에 맨 가방도 물에 잠긴 것처럼 다 젖어버렸다. 우산을 쓰고도 속절없이 비에 젖으며 걷다보니 자연스레 102년 전 6월 7일 봉오동전투의 그날을 떠올렸다. 만주엔 겨울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봉오동전
박 청수 원로 교무님을 뵙기 위해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 다녀왔다. 이곳은 용인 헌산중학교 뒤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생이 담긴 박물관으로 꾸며 2008년에 경기도 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헌산중학교는 박 교무님이 세우신 여러 대안 학교 중의 하나인데 지금도 많은 학생이 밝은 표정으로 공부하고 있었다.박 청수 교무님은 1956년 원불교에 출가하여 60여 년 동안 라다크, 캄보디아, 스리랑카, 아프카니스탄,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세계 55개국에서 무지, 빈곤, 질병 퇴치에 힘을 기울여왔고 조선족, 고려인 등 해외 우리 동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한의사는 모두 8명이다. 2020년 11월, 여덟 번째로 대한민국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뒤늦게 추서한 분이 신홍균이다.그는 항일무장투쟁 3대 대첩 가운데 봉오동전투(1920)와 대전자령전투(1933)에 직접 총을 들고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물론 한의사였기에 독립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과 교전 상황에선 앞장서서 총을 들고 무장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대전자령전투(1933. 6. 30)는 조선 주둔 19사단에서 차출된 1,600명이 넘는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이기에 출처를 알고자 나름대로 알아봤으나 여의찮다. 지금껏 이 말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한국 내에서 2010년대 초경 인터넷에서 전파된 말이다. 출처가 불분명한데도 굳이 신채호라고 한 것은 신채호가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한 말로 기록했으나 링크가 사라졌다. 간혹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는 변형이 있지만, 이것도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말로는 독사신론에서
어모장군 전방삭의 행적을 에 28회까지 연재하고 잠시 멈추는지 벌써 28개월이 되었다. 아쉬운 일이다.그동안 전방삭 장군의 기념관 건립을 위한 절차를 밟는, 심한 씨름으로 매우 분주했다. 보통 어려운 절차가 아니었다.결국 전라남도의 승인하에 사업이 확정되었으나 부지 문제로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지금의 진행으로 보아 올해 추석 전에는 첫 삽을 뜨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너무나도 기쁘다.2015년에 창설된 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신의 계시였는지 우연한 기회에 이 매체와 인연을 맺어 첫 원고를
옥수 지업사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작은 난로위에서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 옹기종기 둘러앉은 친구 분들, 끓고 있는 물처럼 친구 분들의 담소도 따뜻한 훈기를 담고 모락모락 피어난다. 소박한 시골 점방(店房)을 그린 풍경화 한 편이다.도라지 물을 올려놓았지만 하루 종일 끓여서 마시고 물 붓고 또 마시고 물 부어서 사모님이 “이제 맹물됐어요” 라고 하시며 싱겁다는 표정이시다. 맹물이 아닌 불순물이 없이 여과된 물이라고 말한들 따져 물을 이도 없을 것이다.인생도 진한 삶을 살고 여과된 물만 남은들 어떠냐 옹기종기 모여서 한 모금씩 목을
운암 김성숙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존재이다. 의열단 선전부장과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아내 두쥔훼이(杜君慧) 역시 열혈 항일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서 맹활약했다. 아내 두쥔훼이(杜君慧)는 중국여성임에도 항일혁명의 동지이자 반려자로서 운암 선생을 사랑했다. 그녀는 스스로 '나는 조선의 딸'이라고 선언할 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운암 김성숙과 아내 두쥔훼이(杜君慧)를 잘 모른다.항일독립운동사에서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임에도 대중의 기억
청춘, 30대봄날이면 옥천의 벚꽃 길을 누비면서 봄을 만끽하시던 어머니.2019년 폭염으로 모두가 지쳐 있을 때 어머니는 성하의 계절에 가족들과 이별하고 떠나셨다.비록 고향은 옥천이 아니지만 남편이 은퇴하시고 소정리에서 작은 전원 집을 짓고 살았던 3년간의 옥천살이가 어머니의 화양연화였다고 따님이 전해주셨다. 교동 저수지 길을 끼고 벚꽃 길을 다니면서 탄성을 자아내던 어머니.그 어머니를 추억하며 따님이 전해주는 어머니의 80년 이야기.■ 이름까지 어여쁜 그 곳, 소정리대전에 살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문학소녀였다. 멀리 사는 여동생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는 최운산 장군 순국77주기 추모식을 개최하여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의 실질적인 주역으로 활약했던 최운산 장군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역사적인 사실을 짚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다. 항일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전적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대승에 힘입어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고 강압적 일제통치 아래에서도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 수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1919년 봉오동에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를 자력으로 창설하고, 최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