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 간행사엔 ‘특별판’에 수록할 인물로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의 훈장을 받은 애국지사 122분 전원과 ‘독립장’을 받은 애국지사 중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큰 공적을 세우고 희생당한 애국지사 및 외국인 후원자 22분을 수록”하였다고 밝혔다.공훈격 2등급에 해당하는 ‘대통령장’을 받은 의열단원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전하며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김좌진과
우리나라 최고의 국어운동가이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목대잡이(지도자) 고루 이극로 선생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두고 ‘혁명애국투사’라고 칭송했다.중국 인민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돼 나오는 「호가장 전투」(1941) 당시,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일본군과 교전 도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던 연변 작가 고 김학철은 약산 김원봉을 이렇게 회상했다. “항일테러 조직 영수답지 않게, 그리고 목에 일제의 막대한 상금이 걸려 있는 사람답지 않게 병원 원장이나 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온화했으며 이야기는 가식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의열단
고등학교 학력을 평가하는 수능시험은 평가의 객관도는 높지만 평가 타당도는 낮다. 다시 말해 고등학생들이 간직한 진정한 능력을 측정하는 평가도구로선 하급인 셈이다. 교육선진국인 독일(아비투어 시험)이나 프랑스(바칼로레아 시험), 하다못해 영국(A레벨 시험)조차도 논술형 문제로 평가한다.한국 사회는 평가 타당도엔 관심이 없다. 평가의 객관도만 높으면 그 시험을 ‘공정하다’고 믿는 신화가 우세하다. 5지 선다형 찍는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능력’보유자로 대학 사회가 공인까지 해주니까! 그런 탓인지 높은 수능점수로 대학을 정시로 입
항일독립투사 김명시는 코뮤니스트로서 전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러나 남과 북 어디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했다. 해방된 지 77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김명시에 대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로 했다.2019년부터 항일독립투사 김명시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과 재심을 촉구하며 거리 홍보를 주도했던 마산지역 NGO 「열린사회 희망연대」가 거둔 소중한 결실이다. 「열린사회 희망연대」는 지난 8월 12일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김명시에 대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로 결정했다는 공문을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항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한의사는 모두 8명이다. 2020년 11월, 여덟 번째로 대한민국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뒤늦게 추서한 분이 신홍균이다.그는 항일무장투쟁 3대 대첩 가운데 봉오동전투(1920)와 대전자령전투(1933)에 직접 총을 들고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물론 한의사였기에 독립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과 교전 상황에선 앞장서서 총을 들고 무장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대전자령전투(1933. 6. 30)는 조선 주둔 19사단에서 차출된 1,600명이 넘는
남동생 내외가 유학을 떠난 건 30년 전이다. 남동생 내외가 떠난 지 10년쯤 뒤에 누님네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올해로 20년이 돼 간다. 남동생 내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조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조카들과 미국으로 이민 간 조카들이 미국에 자리를 잡고 하나둘 결혼을 했다. 세월이 그만큼 한 세대를 흘렀다.누님네 둘째 희승이가 맨 먼저 딸을 낳았다. 세영이는 웃는 모습이 천사 같다. 동생 준호를 살뜰히 돌보는 모습이 천사들의 놀이 같아 보는 사람들을 마냥 행복하게 해준다.비록 인종
선친께선 1930년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고향인 임실군 관촌면과 달리, 삼계면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오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곳이니 도로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친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 도깨비불을 보면서 산길을 걸어 다니셨다고 했다.할아버지 묘소를 비롯해 선산이 그곳에 있기에 1990년대 초 가끔씩 삼계면을 들르면 큰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그때마다 큰할아버지는 사람을 피해 방구석 저쪽으로 얼른 몸을 숨기곤 하셨다. 일제강점
늘샘이 시도한 '김수영론'은 작가 김수영의 정신세계를 다룬 색다른 비평서이다. 기존에 존재했던 김수영 찬양 일색의 주례사 비평이 아니다. 거꾸로 신동엽을 의식하며 김수영을 신화화하려는 흐름을 비판하는 공모비평도 아니다. 나아가 김수영 시 작품이 지닌 난해함을 드러내며 내리까는 부박한 골목비평도 아니다. 오히려 늘샘의 '김수영론'은 기존 문단 내 '패거리' 성격을 띤 비평계 관행을 비판하며 김수영에 대한 부박한 지식과 연구자가 보인 게으름에 일침을 가한다.한 마디로 김수영 작품 세계가 함축한 철학에 대한 가능성을 분석적으로 논구한다.
이틀 전이 어머니 생신 일이다. 그러나 이젠 어머니 얼굴을 봴 수 없다. 부산 영도엘 가도 어머니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반기던 그 모습이 그립다.장인 어른 추모 기일을 맞아 나흘 전 부산엘 내려갔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가 가만 가만 어머니 유품을 만지다 그만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제 2주가 흘렀다. 여전히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고 꿈만 꾸는 것 같다. 슬픔을 위로 받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엔 여전히 그리움과 슬픔만 가득하다.올해를 마
오늘날 교회 주일 학교 탄생의 이면에는 18-19세기 노동자의 비참이 존재했다. 산업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 사회에서 어린이 노동은 19세기 자본주의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동 계급의 경우, 6-7살 어린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는 일은 없었다. (구로역사연구소.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 서울 : 거름. 1991. 14-15쪽.) 더구나 어린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를 가는 게 아니었다. 공장이나 탄광으로 내몰렸다. 당대 산업 자본가들은 성인 노동을 대신해 값싼 어린이 노동을 선호했다. 성
올해는 김수영 탄생 100주년 되는 기념해이다. 올 한 해 동안 학술대회, 연극, 전시회, 기념관 건립, 시낭송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한겨레』에선 100주년을 기념해 『거대한 100년, 김수영』을 기획 연재하기도 했다.김수영은 20년이 넘는 작품 생활 동안 170편이 넘는 시와 평론을 합치면 2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푸른 하늘은」(1960) 「사랑의 변주곡」(1967), 「거대한 뿌리」(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1965), 「풀」(1968), 「시여 침을 뱉어라」(1968)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나 삶의 흔적은 그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저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글쓴이는 플라톤이 쓴 「크리톤」과 「변명」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왜 부당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플라톤의 저작은 모두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다. 그 중에 가장 짧은 대화체 형식의 글이 「크리톤」이다. 「변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정에서 사형선고가 부당함을 소크라테스가 조목조목 변론한 내용이다.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기원 전 5세기 때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현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검찰은 서울 진보교육감을 전격 기소했다. 공수처가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이첩한 지 112일만이다. 2018년 해직교사 특별채용 과정에서 교육감이 직권을 남용해 권리행사를 방해하고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다. 조희연 교육감은 검찰의 기소에 즉각 유감을 표명했다. 입장문에 따르면 조 교육감은 “공개전형으로 적법하게 채용했고 법령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교육감 권한을 행사했다.”고 항변했다. 나아가 “교육감으로서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고 담당공무원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은 노동운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해 왔다. 노동의 힘이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북서유럽의 역사가 그것을 반증한다. 세계 최상의 복지사회를 구축한 북유럽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중도좌파의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사민주의 정치세력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요구를 대변해 온 탓에 오늘날 수준 높은 복지사회를 이룩했다.2000년대 초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이끈 노회찬의 민주노동당에 전교조 교사 천여 명이 당우로 가입하고 후원을 했던 사건은 북유럽형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열망한 때문이다. 그들 북유럽 국가들은
1986년 1월, 친구에게 편지 형식의 글로 쓴 ‘H에게’는 O양의 유서가 되었다. 당시 O양은 서울사대부속여자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 15살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바로 O양이 쓴 편지글 형식의 유서다.이 글에서 O양은 당대 입시경쟁교육으로 치닫던 우리교육현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친구조차 사귀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입시공부만 강요하는 분이 바로 사랑하는 어머니임을 15살 어린 소녀는 그 모순된 현실 앞에 가슴 아파했다. 결국 O양은 죽음으로써 당대 ‘병든 교육’을 질타했다. 더 이상 어린
2010년 6·2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진보단일후보 곽노현은 1.1% 표 차이로 보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보수 후보의 분열은 뼈아픈 패인이었다. 그렇게 서울 최초 진보교육감이 탄생하였다. 서울 진보교육감의 출현은 2009년 전국 최초 진보교육감인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을 위시해 강원, 전남, 전북, 광주 진보교육감과 함께 진보교육벨트를 형성하는 쾌거였다. 이는 다가오는 2014년 6·4 교육감 선거 당시 13곳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진출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진보교육감의 등장을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자 위기로 인
총성이 울리고 포탄이 떨어져 시체가 나뒹구는 현실만이 전쟁은 아니다. 집단의식을 산산 조각내 색다른 의식으로 포박하는 행위 역시 또 다른 전쟁이다. 영화로, 연극으로, 드라마로, 책으로, 학술대회로, 그리고 학교교육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매일 계속된다. 역사 청산이 전무했던 우리 사회에선 어쩌면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세월호 참사를 단순 ‘해상 교통사고’로 치부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한 술 더 떠 “세월호로 회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먹는다.”고 했다.‘시체 팔이’ 장사를 운운한 적도
교육과정 총론을 비롯해 2022 교육과정 전면 개정을 앞두고 공청회가 지난 10월 22일 열렸다. 교육부는 “국민과 함께 만드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교육을 담당할 현장교사의 집약된 목소리엔 모르쇠로 일관한다.왜냐하면 「전국 사회교사 교과모임」(약칭 전사모)에선 2019년 10월에 「시민」 교과를 개설하기 어렵다면 현행 「사회」 교과를 「시민」 교과로 명칭 전환을 전격 선언한 적이 있다. 민주시민교육을 추진하겠다는 교육부의 의지가 퇴색돼 가는 현상을 우려한 최후의
박종철 군 아버지 고 박정기님은 생전에 그러셨다.“나는 아들로 인해 다시 태어났고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민주화운동가로 살아갈 거” 라고.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원통한 죽음 앞에서 흐느끼셨다.“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그러나 임진강에 아들의 유골을 흩뿌리면서 아버지는 다짐했다.“지나온 삶이 부끄럽다”며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평생을 살겠다고! 그렇게 아들의 삶을 이어가겠다고!” 22살로 죽은 아들을 떠나보내며 흐느꼈다.전두환 정권 시절 자행한 잔인한 녹화사업으로 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의문사한 최우혁 군(21세)도
국가의 흥망은 교육과 국방에 좌우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선각자들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관을 양성한 이유이다. 대한민국 군사력은 오늘날 세계 6위에 오를 만큼 강대하다.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가 올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국방비 지출규모가 480억 달러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의 군사력은 영국과 프랑스를 제칠 정도로 강대한 반면, 북쪽은 35억 달러로 군사력 순위가 28위에 그쳤다. 그러나 대한민국 교육은 그렇지 않다. 교육의 목적인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데에 번번이
내 그대를 그리워함은내 영혼이 한없이 서성이는 그 곳에 당신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맑은 영혼이 가을 하늘처럼 맞닿은그 곳엔 별빛 같은 사랑만이 촘촘히 남아긴긴 세월을 가슴으로 가슴으로 보냈었노라고 어둠이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저녁 무렵당신이 없는 빈 방에 앉아 가만히 마음에 새겨놓겠습니다. 바람이 불고눈이 내리고다시 꽃이 피고 지기를 몇 해가슴에 간직한 그리움은 봄빛으로 하얗게 되살아옵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삶은 냉철한 것이라고덧없는 세월이 소리 없이 가르쳐 줄 것입니다. 어느 날 바람이 불고 꽃이 지는 그 날에우리의 그리
"살아오면서 가족을 위해 가장 노릇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남편의 감옥살이가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그 힘든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아내를 생각하니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긴 세월을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것도 모자라서 제 아내에게 이런 불행이 일어나야 하는지 가슴이 미어지고 서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자 전 인천시교육감 이청연 선생의 편지글이다. 그는 불명예스럽게도 뇌물수수 혐의로 복역 중이다. 그는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6년과 벌금 3억원, 그리고 추징금 4억 2천만 원을
지난 8월 30일 공수처 공소심의위는 조희연 교육감에 대해 며 기소의견을 냈다. 전교조 해직교사 4명을 포함해 5명을 특별 채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 사건은 감사원(고발 당시 최재형 감사원장) 고발로 시작되고 공수처 수사 대상 1호로 선정돼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서울시 교육감이 공수처 수사 대상 1호로 선정된 순간 그 자체가 뉴스거리였다. 절대 다수 국민들이 의아해 했다. 주류언론들은 전교조 해직교사 특별채용이 부정한 방식으로 진행된 듯이 보도했다. 공개채용을 전교조 해직교사들에게 무슨 특혜를 준 것처럼
1984년 3월, 내가 첫 학교 발령을 받은 곳은 구로고등학교였다. 80년대 학교풍경이 그렇듯이 100m 달리기가 가능한 일자형 학교 건물과 삭막한 운동장이 전부였다. 꽃과 나무는커녕 운동장엔 학생들이 앉아서 쉴 만한 벤치조차 없어 삭막했다. 지어진 지 딱 3년째 되는 학교였다.지금은 남녀공학이지만 당시엔 남자고등학교였다. 한 교실엔 60명이 넘는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한 학년 15학급씩 45개 학급이니 전체 학생수가 2,500명을 훌쩍 넘었다. 교사 숫자가 90명 안팎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형적인 거대학교요, 과밀학급이었다.월
오늘의 시대, 교사가 된다는 것은 고단한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갖 사회 역사적 모순이 중첩된 학교현실에서 ‘선생’노릇 제대로 하기가 어느 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불안’이 엄습해서 어떨 땐 미련 없이 떠나고 싶고 변화의 미동도 없는 교직생활이라고 느껴질 땐 그만두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사람의 삶은 그리 간단치가 않아서 무 자르듯 생각대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모순으로 뒤얽힌 불의한 세상, 오늘의 교사는 사회개혁의 ‘장두’(狀頭)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구로고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학으로 직행했습니다. 강서·남부지역 학교대표자 모임이 있는 날을 피해서 1주일에 1번 야학에 나가서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야학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통해서 한국사회 교육모순, 나아가 사회모순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야학 교사들끼리 가끔씩 세미나를 통해서 한국사회 현실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조금은 이해하였습니다. 80년대 전반기에는 구로 3공단 지역에서 공단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군사정권하 정보 경찰의 촉수에 걸려들지 않기
「독립유공자법」(1994)과 「동학농민 명예회복법」(2004)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보다 우선해야 한다. 1994년과 2004년에 국회에서 통과된 상위법이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는 일종의 시행령에 지나지 않는다. 1962년에 친일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제정한 것이다. 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벌써 59년이나 지난 낡은 규정이다. 그동안 항일독립운동사는 내용이 풍부해졌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엔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 포함)조차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고 있다.특히 87년 이후 학문
이한빛 피디는 JTBC 정치부기자 시험과 CJ E&M 피디 시험에 동시에 합격했다. 선택의 순간 이한빛 피디는 당대 최고의 시청률과 최고의 저널리스트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던 JTBC 방송국 기자를 포기했다. 이 시대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영상물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소외되고 고통 받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감동적인 휴먼 영상물을 제작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작은 희망을 주고 적지 않은 힘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한
Ⅰ.교사로서 언제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88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구로고등학교 제자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2003년에 산화한 노동자 김주익님의 죽음입니다. 88년 늦여름 새벽 3시에 저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여의도 한강다리 옆 파출소에 도착했습니다. 파출소 경찰관으로부터 제자의 죽음과 유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허망했고 또한 황망했습니다.너무도 해맑게 웃던 제자였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지요. 제자는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만큼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죽기 3일 전 꼿꼿한
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습니다. 해방 후 40년 넘게 한국사회는 지긋지긋한 독재체제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온 국민이 변화를 갈망했던 시대였지요.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각 부문운동 역시 분수처럼 용솟음쳤습니다.한 마디로 80년대는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전두환 5공 군부독재정권을 쓰러뜨린 87년 6월 시민항쟁은 그 결정체였지요. 그 당시 저는 보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연로한 할머님 한 분이 플랫폼 바닥에 신문을 펼쳐 들고 6월 항쟁 관련 기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 모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발전을 퇴행시키는 것에는 낡은 도 한 몫 한다. 특히 왜곡된 는 진실을 가리고 현상을 굴절시킨다. 현상의 굴절은 우리의식의 굴절로 이어진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 걸 방해하고 나아가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것 또한 어렵게 한다. 거짓 는 특히 우리의 의식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진실의 궤도열차를 종종 탈선시킨다.박정희 가 우리사회 왜곡된 의식과 사회갈등을 촉발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박정희 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실질적 주체였던 이 땅의 수많은 ‘전태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관리번호 2612번)엔 항일독립투사 김맥동(金麥童)에 대한 이 다음과 같이 짧게 기술돼 있다.“1920년 경남 함양 및 밀양에서 중국 만주에 본부를 둔 광복단과 기맥을 통해 지역 내 부호 수 명에게 군자금을 요구하고 비밀결사조직을 도모하다 체포됨”보다 상세히 검색하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에는 다음과 같이 다소 자세히 기술돼 나온다.“1918년경 만주(滿洲)로 건너가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20년 7월 남부 만주 일대에서 조직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해 활동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