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조선의 동포여, 떨치고 일어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건설에 앞장서자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자손만대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인류의 명예를 위하여, 크게 새로워지는 새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지 아니하려는가. 생존경쟁의 국제생활의 옛 습관을 깨뜨리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질서를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하늘이 진실로 바라는 바가 바로 이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조선의 동포
8. 정성을 다하는 신성한 근로는 자기완성과 인류 신격화의 길그러나 근로가 배움과 하나 되게 하는 데에는 위에 말한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람을 신성하게 하고 사물을 신성하게 하는 일이다.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함으로써 인류를 신(神)의 영역에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신의 물건, 하늘의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를 위하여 짚신을 만들 때에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니 그 짚신은 이득을 위한 상품이 아니고 진실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신성한 물건이요 하늘의 물건이 되
6. 올바른 산업은 신성하고 유쾌한 근로를 바탕으로 한다.산업은 원래 인생의 의식주를 풍족하게 하고 안락하게 함이 목적이요 업자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다. 근대의 산업이 병적으로 발달하여 인생생활을 위하여 있을 산업이 인생생활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빈부의 차이,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혐오할 모든 사상과 행위가 국내의 정치적 투쟁과 국제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어서 인류 행복의 방편일 산업이 도리어 일대 혁명을 치르고서야 올바로 잡을 수 있는 문제점을 만들어 놓았다.세계의 산업은
4. 부강이 아니고 청빈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 국가를 건설해서 공존공영의 미래세계를 선도하자돌이켜 우리나라로 보면 36년간의 이민족의 굴레를 시원하게 벗어나서 이제 역사를 새로 바꾸는 때라, 모름지기 전 인류를 구제하리라는 큰 소망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적이고 남다른 국가를 건설할 것이요, 결코 옛것만을 답습하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 것이다. 대개 우리 민족이 혈통적으로 심히 우수하고 문화가 오래 되고 고상하여 능히 중국에 못 미칠 바 없으며, 신라시대에 이미 동아시아 사상을 모두 모으는 업적을 이루었고, 또 우리 민족의 지리적 조건이
2. 전쟁의 원인은 이기적인 탐욕, 승전국도 자기반성을 해야만 한다.대체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에 참여한 각 나라가 서로 상대 나라의 죄를 따지는 곳에 다 표시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은 이기적인 탐욕이 전쟁의 원인이요, 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가 영위하는 왜곡된 국민교육과 과도한 군비와 군비 중심의 산업이 전쟁을 도발하는 마력인 줄을 다 안다. 그러므로 패전국에 임할 때에 반드시 그 군비를 파괴금지하고 교육, 산업을 비경쟁적으로 개조함으로써 근본정책을 삼는다.이것은 모두 지당한 일이거니와 승전자가 자기
충남 계룡시 사랑채길에서 「옻칠로 꿈꾸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며 오로지 옻칠예품만 제작하고 있는 이해영 칠예인!「무공해 음식은 무공해 그릇에!」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옻칠공예품을 제작하고 있는 이해영 대표. 옻칠기물은 그 자체가 99% 항균이 되어있다. 소독하거나 삶지 않아도 스스로 항균이 되며 유해 전자파를 30~70% 이상 스스로 흡수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200℃까지 내열에도 견뎌내는 신비스러운 도료 옻칠 관련 예찬론자 칠몽(漆夢)대표 이해영2017년 우수 소상공인 표창을 받은 이 후 2017년 옻칠연구개발
대동인, 대동사회, 대동국가, 대동세계는 이종만 선생의 일생의 꿈이었고 대동정신, 대동사상, 대동주의는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환갑이 되던 해 1945년에 해방을 맞은 이종만은 그 감격과 기쁨 속에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 ‘대동의 나라’ 건국의 대망을 품고 국민정신 개혁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그러나 당시 미 군정하의 남한의 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를 실현하고자 북을 선택했다. 북에서도 대동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세월의 흐름 속에서 는 역사의 파편으로 땅속에 파묻혀
봉오동의 가을이 그립다.가을이 오면 봉오동을 둘러싼 예쁜 단풍이 눈에 선하다. 만주 봉오동은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저 멀고 황량한 만주 벌판 어디쯤이 아니라 독립군이 되고자 마음먹은 청년들이 얼마든지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두만강에서 15km, 보통 걸음으로 두세 시간, 훈련된 장정이면 한 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니 봉오동은 두만강변의 도시 도문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약속이 없이 봉오동에 도착해 도문에 살고 있는 6촌에게 전화하면 자전거로 15분
이제 나의 벗들은 아내 그리고 텃밭의 살가운 녀석들. 나이 들면 잠도 없어져 동트기 전에 눈이 떠진다. 아내도 부시럭 거리는 걸 보니 잠에서 깬 모양이다. 슬그머니 일어나 할 일이 없어도 뒤꼍 텃밭에 나가 새끼 같은 녀석들을 살핀다.내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라주는 녀석들. 말대꾸 안하고 잘 자라주니 어쩌면 더 살가운 녀석들이다. 그 하늘하늘한 줄기로 비바람을 다 막아내면서 살아내는 것을 보면 큰 소리만 치는 우리 남자들보다 갑절은 낫다.한마디 아우성도 없이 말이야.자칫 쓸쓸할 뻔 했던 나의 노년을 아내가 따뜻
옥천신문에 두 번 나왔을 걸요? 옆에 TV도 있지만 지난해에 방송에도 나오고, 경상도, 서울, 대전, 옥천··· 사방에서 취재한다고 오더라고. 이 자리에서만 양복점 한 지 65년 됐지. 나이는 여든여섯, 1935년생이니까. 예전에는 양복, 학생복 맞춤을 많이 했지. 요즘은 옷이 작게 나오지만 예전엔 옷소매 자체가 컸거든. 통이 넓었으니까 재단도 자주 했지. 양복 트렌드야 뻔하지, 나이 대에 따라 다 맞추고 그랬으니까.집은 바로 옆에 있어. 원 고향은 일본 출생이야. 해방하면서 이원으로 왔어. 외갓집이 여기여. 아버지 고향은 영동인데
■ 마당예야 뜰팡예야 내 이름 순례는 어디로 숨었을까어릴 적 내 이름은 마당예였다. 어머니가 일하다가 마당에서 나를 쑥 낳았다고 마당예라고 불렀는데 간간이 놀림말로 뜰팡예(마당)라고도 불렀다. 순례라는 내 이름은 어디로 숨었는지. 태어난 날의 돌발 상황이 바로 이름이 되었다. 여자 알기를 손톱 밑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시절이다. 부엌에서 밥 짓다가 세상 구경했다면 부엌예라고 불렀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11남매 낳았는데. 나는 열 번째였다. 다 황천길로 떠나고 둘 남았다. 잼마을(구술자의 발음대로 표기_편집자주)
■ 옥천 날쌘돌이 영승이군대생활 할 때와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를 제외하고 옥천군 외 다른 곳에 주소를 둔 적이 없었다. 나는 삼양국민학교 다닐 때 육상선수였다. 육상선수의 자격으로 청주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선수로의 포부도 있었지만 운동선수로서의 인연이 끝까지 닿지 않아 학창시절 날쌘돌이라는 추억만 남기고 아련한 기억으로 마음 한편에 묻었다. 선수시절에는 100미터 200미터 단거리 종목을 석권했는데 중학교 때 12.6초의 기록을 냈다. 당시 시골학교에서는 전국체전에 나갈 수 있는 기록이었다. 중학교 때 청주 가서 12.6
지난 5월 미국에서 돌아가신 김동수 교수/장로 유산 좀 물려받았습니다. 고인 유언에 따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제가 재산 일부를 상속 받은 거죠. 다양한 사회사업과 평화운동으로 재산 모을 틈이 없었을 텐데도 전두환 전 재산의 7배나 됩니다. 선생의 거룩한 삶과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며 평화와 통일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 여러분에게 조금씩 나눠 드리겠습니다.먼저 김동수 선생을 소개합니다. 1898년생 아버지 김예진은 1917년 평양숭실대 2학년 때 자주독립을 위한 애국 연설하다 무기정학 당했습니다.
“열아홉, 스무살 때 이원면 동네 할아버지들이 내 할아버지가 이원만세운동에 나섰다가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8개월이나 치르고 나왔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해주셨다. 동네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관심도 많은 분이셨고 했다. 공주형무소에서 나오신 뒤엔 고문 후유증으로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다”조광식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조이남 선생의 전부다. 조씨는 이원만세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조이남 선생의 손자다. 조이남 선생은 1919년 이원만세운동에서 주역 9명 중 한 사람이다. 당시 헌병대가 만세운동 주모자들을 잡아가자, 주민들은 구금자 석방을 강력히
목포! 어떤 상징, 인물, 용어 등이 머리를 스치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삼학도, 고하도(이순신 장군 유적지), 가수 남진, 유달산 등이리라. 충분할까?목포 ‘공생원’(共生園)이 우선 떠오르지 않으면 목포를 잘 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이다. 왜 그런가? 한두 편의 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목포 공생원 사랑 이야기’를 올리고자 한다.문자대로 풀어보니, 공생원(共生園)은 함께 사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다. ‘더불어 사는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국군의 날이 시작된 것은 6.25 당시 3.8선을 넘은 날을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역사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은 미군이 3.8선을 넘은 10월1일이 아니라 일제와 독립전쟁을 했던 만주독립군 창설일을 국군의 시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런데 만주독립군 중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 대안으로 논의되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광복군은 1940년 9월에 창설되었다고 한다. 그보다 20년이나 앞서 대한민국 군대가 일본군을 격파한 승리의 역사 봉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뉴스를 보면서 정말 생각이 많았던 올해 광복절이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유해 봉환 소식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약칭 극동민족대회)를 기록한 영상이다. 극동피압박민족대화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대회에 우리나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여운형, 김규식을 비롯한 정치가들과 최진동, 최운산 형제와 홍범도 등 독립군 단체 대표들도 참석했다. 1921년 11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아시아와
100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에 최운산 장군 일가의 준비와 헌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 최근에야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여러 놀라운 내용이 많지만 오늘은 무림고수 최운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북간도 봉오동에 터를 잡고 무장투쟁을 이어간 그의 삶에서 어린 시절에 익힌 전통무술이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1800년대 말, 당시 북간도는 조선의 영토였고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연길에 살면서 연변지역 조선인들의 안위를 책임졌던 연변 도태 최우삼은 漢族들을 연변으로 이주시키는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필명 김 자현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나는 이곳을 떠나련다개 짖는 마을들아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잘 있거라별이 있고하늘이 보이고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위는 “고별”이라는 제목의 시 마지막 구절이다. 노천명 1951년 작품으로 라는 시집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전쟁 중 감옥에 있었던 그녀는 여러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피난 가지 못하고 있다가 임화 등과 함께 에 참여하는 등으로 9.28 수복 후 부역 죄인으로 20년 형을 선고 받지만 같은 문인들의 탄원으로 6개월여 옥고를 치르
얼마 전, 성동구청에서 마련한 성수역 구두 테마 공간 환경개선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현재 성수역에 전시된 구두 테마 공간이 점점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시설물도 낡은 상태라, 기존의 구두 테마 공간을 개선해서 성수동 수제화 거리를 알리고, 지역 활성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성동구청의 환경개선 계획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현재 성수역 구두 테마 공간에는 구두의 역사와 제작과정을 모여주는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구두의 역사에 대한 콘텐츠들은 구두 테마 공간에 필요한 것이긴 하다. 테마 공간을 살펴보면 지금
복숭아가 제철일 때 만나 뵈었다. 어르신이 복숭아를 깎아주시며 시집가기 바로 전까지 복숭아 간소메(통조림) 공장에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셨다. 복숭아 백도 통조림, 간소메라는 일본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기억이 추억이 되었다. 젊은 날에는 고생만 하고 살았던 기억밖에 없어서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는 어르신. 살아보니 다들 저마다 고단한 짐을 다 짊어지더라.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옆 사람 보면서 못난 나를 담금질 할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라고 명쾌한 해답을 내 놓으셨다. 배움
오래된 그리움의 끝은 어디일까. 세월의 나이테를 쌓아가는 흔적은 깊어지는 주름으로 새겨지지만 어린 시절 영혼을 사로잡았던 마음의 상처도 내내 마음자리에 각인되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헤어지던 여섯 살의 기억을 갖고 계시다는 이 선생님. 내내 그날의 기억을 붙잡고 77세까지 오셨다. 1945년 해방둥이지만 아직 마음은 여섯 살에 멈춰 버린 것 같다고 하시며 언제나 진짜 어른이 될까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지난 삶이 후회와 아쉬움, 그리움으로 켜켜이 쌓였다고 하시며 인생이 때론 헛헛하다고 씁쓸한 마음도 숨기지 않으셨다. 하늘
6.25 동란이라는 한국전쟁 주기만 다가오면 곳곳에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낭송된다. 자연스럽게 작가 모윤숙과 더불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 해방정국에서 한국에 파견된 유엔본부 위원장의 이름으로 인도인이다. 수십 년 외교관 생활 속에서 여인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던 것은 전무후무하게 한국에서 모윤숙이었노라, 술회한 사람으로 당시 세간에서는 모윤숙을 건국의 어머니, 메논은 건국의 아버지라 비아냥거렸다. 단독정부는 절대 안 된다는 메논의 생각을 몸 바쳐 바꿈으로써 우리의 조국을 동강내는데 그녀는 일조하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주택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김한섭 전통갑주 연구소⌟시대 전통 갑주, 등채 등을 복원연구 제작 공방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조촐하고 빈약해 보였다.김한섭 명인은 투구 등 군복은 물론 조선 시대 무관들이 입고 사용하던 갑주들을 전반적으로 재현, 제작해내고 있는데 특히 등채(藤策) 재현·제작에 집중적으로 심혈을 쏟고 있는 장인이다.등채!조선 시대 무관들이 구군복[具軍服]이나 융복을 입고 궁궐이나 관청을 출입할 때 들고 다니던 일종의 신분 상징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등채를 보면 다섯 가지 색깔 즉
한 이십여 년 만에 순대를 만들어 보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고기를 절제하고 있지만 어릴 때 먹었던 북간도 음식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맛이다. 만두나 순대는 둘 다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는 음식이다. 혼자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양이 많아 혼자 만들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음식,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야 하는 음식이란 점에서 공동체 문화를 잘 보여주는 음식인 것 같다. 특히 순대는 소와 돼지를 잡을 때 내장과 피를 잘 활용하기 위해 생긴 음식이었지만 순대가 완성되
봉오동 출신이라 그런지 우리 가족은 모두 고기를 좋아한다.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돼지고기도 살코기만 있는 것보다 비계가 적당히 섞인 것을 더 좋아한다. 우리 집의 명절 음식은 떡국과 송편, 부침이 아니라 만두와 순대였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만두나 순대를 만들었다. 만두보다 순대 만들기가 훻씬 힘들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에게 만두나 순대 중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 모두 순대를 택할 것이다. 순대는 집에서 만들기 쉽지 않은 음식이다. 우선 축산물시장에 가서 피와 창자를 사와야 하고, 냄새가 나지 않게 창자를 뒤집어
‘한국인의 밥상’ 프로그램 제작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광복절 특집으로 독립군의 밥상을 만들고 싶다고, 혹시 봉오동에서 독립군들이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 볼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만주 독립군의 일반적 이미지는 헐벗고 굶주리는 독립군이 연상되지만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이고 북간도 봉오동의 독립군은 제대로 된 군복과 무기를 지급 받을 만큼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고, 봉오동 자체가 식량이 충분했던 곳이라 오히려 잘 먹었다고, 군인들이 잘 먹지 않으면 어떻게 훈련을 하고 전쟁을 수행했겠냐고, 만약 영화 봉우동전투처럼 감자 한 알을 열 명이
“우리 막둥이 선자, 큰놈은 진순이, 둘째는 윤옥이” 어르신께 며느리들 이름을 물었더니 이제 며느리는 없고 딸만 남았다고 하시며 한 분 한 분 불러내셨다. 청산면 끄트머리 예쁜 이층집, 키 작은 잔디들이 정갈하게 터를 잡고 앉았다. 어르신 막내아들 이름의 문패가 걸렸지만 주말이면 어르신의 호위무사들이 녹음이 드리워진 뜰에 줄지어 차를 댄다. 어르신은 깊은 세월, 70년을 아내와 둘이 걸었다. 두 손 잡고 작은 소롯길을 지나서 자녀분들과 같이 신작로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다. 한때는 드넓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부레 없는 상어처럼 고
다시 고찰해야 할 친일세력!산업화와 민주화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국민, 그 국민의 상식으로 출발하겠다는 윤석열이라는 야권의 대선주자! 그는 위와 같은 번드르르한 말로 대선 도전의 포문을 열더니 날마다 일제 앞잡이와 다름없는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한일 수교 이후 최악의 한일관계라고 지적하면서 자꾸 들먹이는 위안부 문제와 철 지난 죽창가를 부르는 바람에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고 전 조국장관과 현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흡사 일본인이 대한민국 대권에 도전하러 대한해협을 건너온 것일까. 버젓이 우리나라 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張載性) 선생이시여! 후학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선생께서 용서하신다고 하셔도 저희가 그 용서를 어찌 받잡겠습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선생께 서훈(敍勳)하지 않았습니다.선생께서 가신 지 70년이 흐른 2020년에 이르러서야 신원운동(伸寃運動)이 일어났습니다. 작년 5월 27일 창립식을 연 ‘장재성기념사업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 73인의 서훈 요청서를 보훈처에 전달하였고, 7월 5일 최초로 ‘장재성 선생 추모제’를 열었고, 10월 30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에 흉상 ‘장재성 선생상’을 제막했
고은광순씨는 “운명처럼 옥천이 내게 왔다”고 말했다. 한의사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바쁜 삶을 살아 온 고은광순씨는 2012년 청산면 삼방리로 왔다. 그의 명상 스승이 정해준 장소였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며 평안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옥천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쥐어줬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산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치고 들어왔다’고. 그렇게 동학농민혁명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다큐소설을 기획해 2015년 를 출간했다. 마을 공동체도 꾸려나갔다. 행복마을사업을 기획했고 올해 3월 그
흑백사진 속의 청년과 새댁은 50년의 세월 속에서 이승과 저승으로 갈 길이 달라졌다.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꿈에서 안 보이면 서운하고 보이면 걱정이다. 고속버스 안내양이던 시절 만나 연애 결혼을 한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고속버스 안내양으로 근무한 2년간의 짧은 기억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하신다.■ 50년 전 선망의 대상, 고속버스 안내양이제 추억으로만 남은 나의 22살.옥천여중을 졸업하고 대전여상에 합격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딸 중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던 대전여상, 인물이 좋고 공부 잘하던 아이들이 은행으로 취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