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친구로부터 어머니가 수확했다는 과일사진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에는 10여 종의 과일이 있는데, 그중에서 리엔우(蓮霧)의 독특한 색깔이 어린 시절로 저를 이끕니다.우리 집은 타이빠오 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자리하였으며, 인근에 사탕수수 운반 협궤열차가 지나는 철로가 있었지요. 사방이 모두 들판이고, 인가라곤 우리 집 하나뿐이었습니다. 사탕수수 성수기가 되면 오가는 열차가 말할 수 없이 빈번했지요. 한밤중에 열차가 지나가면 집안의 방이란 방은 모두 심하게 흔들려 다들 놀라 깨어났습니다.집 양편에는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유자,
무역회사를 운영하려면 무역업등록증을 받고 무역협회에 가입해야 하던 시절. 무역협회에서는 회지를 발행하여 회원사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리 눈여겨볼 내용은 없었고, 뒤쪽에 해외 업체에서 수출하고자 하는 품목이나 수입하고자 하는 품목이 연락처와 함께 실리는 난이 있었습니다.등산장비와 관련한 문의를 보고 답신을 보내면 샘플 보내라는 회신에 허탕 치기 일쑤였습니다. 나이지리아 어떤 회사에선 10만 불짜리 조악한 어음을 보내며, 세계 무역박람회에 부스를 차렸으니 물건을 보내라는 회신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응하지 않았지요.그러다 말레이시아 회
저는 타이빠오(太保)에서 자란 아이였습니다. 타이빠오는 작은 마을인데, 마을 안에는 왕더루(王得祿. 청나라 장군)가 거주했던 유적지가 있지요. 푸즈(朴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곧장 가면 허우탄(後潭) 촌을 지나 타이빠오 촌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다음 정류장은 룬딩(崙頂) 촌이지요. 만약 사거리에서 내려 맞은편으로 걸어가면 춘주(春珠) 촌입니다. 타이빠오 초등학교를 끼고 옆으로 가면 왼쪽에 타이빠오 초등학교 옆문이 나오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학교 대강당입니다.매년 장개석 탄생일이 되면 모든 선생님과 학생이
가까운 대학 친구도 IMF 금융 위기를 맞으며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친구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을 물려받아 플라스틱 원재료를 사출 업체에 공급했고, 사출 업체는 가공품을 기업에 납품한 후 어음으로 결제 받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당시에는 3개월짜리 어음이면 양호한 편이었지요. 이 어음을 당장 현금화할 수 없으니까 어음 할인을 받아서 사용하거나, 공장과는 외상 거래를 합니다.공장은 외상이 많은 부실한 업체와 거래를 끊고 싶어도 그동안 쌓인 외상값을 받기 위해 또다시 외상을 주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외상은 늘어만 갔지요. 그러다
많은 음식물이 쓰레기장으로 향하고, 지나친 섭취로 인한 질병들이 걱정되는 이 시대에도 누군가는 맹물로 허기를 채우거나 아득한 절망의 세월을 살기도 합니다.보리밥일망정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게 가난하던 시절, 문밖에 서 있는 걸인에게 한 종지 곡식을 건네던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 떠올립니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하는 일은 참 싫어하지만,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괜히 신이 나지요.타이베이에서 Mr 정을 만났을 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며 자리를 마련하더군요. 꽤 큰 회사에서 경영을 맡았던 L 사장이 갑자기 잘려 어려움에 부닥쳤답니다. 그
실험실은 2주 전 열었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신분검사를 거쳐야만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다. 새로운 룰도 생겼다. 실험실 안에는 2명까지만 있을 수 있고, 서로 2m 간격을 유지해야한다. 실험실은 보통 4-5명 인원이 같이 일하지만, 새로운 룰을 지키기 위해 다들 파트타임으로 실험실에 나온다. 실험을 시작하면 하루 종일이 요구되기도 하기에 파트타임으로 실험을 진행하긴 쉽지 않다. 기관은 오픈하였지만, 복도는 텅텅 비고, 사람은 찾기 힘들다. 또한 커피 타임, 미팅도 금지되어 항상 떠들썩했던 복도, 미팅 룸과 식당가는 좀처럼 활기를
Mr 정의 스틸 볼 사업은 자본만 뒷받침되면 나름 손쉬운 업종이었습니다. 녹 방지 처리만 하면 수십 년 보관도 가능하고, 원자재 값이 올라가면 물건 값도 덩달아 오르지요.볼이 필요한 공장에서 주문하면 수량을 늘려 수입한 후 납품하고 나머지는 재고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재고 자산은 소량 주문이 올 경우 더 많은 이익을 붙여 팔기에 창고에 있으면 그게 곧 재산이고, 볼이 다양할수록 재산 가치도 높아집니다.부인이 탈세로 Mr, 정을 고발하고 이혼할 무렵, 회사 경리를 부인이 보며 오랫동안 준비하고, 처남이 영업하고 있어서 타이베이 회사
7년여 순조롭게 성장하던 사업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절벽, 아니 낭떠러지 앞에 마주한 상황이었습니다.사업도 생명체처럼 영원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무척 노력하였지만, 그 또한 뜻대로 안 되더군요.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바이어가 주는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여 수출만 했던 사업이라 국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못 했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재력 경험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만 생기더군요.그래서 섣부른 결정보다 시간을 벌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쉽지 않지만 멈추는 일은 더 고통스러울
한국에 못 간지 벌써 일 년 반이 되어간다. 예정대로라면 올 4월 한국에 있었는데...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면서 비행기가 결항되었고 한국행 비행기도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지금 캐나다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연구실은 2주전 다시 문을 열었다. 다들 파트타임으로 실험실에 나오지만, 커피타임, 점심시간, 미팅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연구실은 아직도 으스스하게 사람이 거의 없다.3월 중순부터 격리되어 4월, 5월을 지냈다. 6월에 접어들자 날씨가 따듯해지고 꽃이 피면서 답답하고 우울했던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 4월 중순이 지나면서
대만 시장으로 등산장비가 활발하게 수출되던 1995~6년경에도 항상 새로운 사업 종목을 찾기 위해 신경을 쓸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교역이 활발하던 때가 아니어서, 홍콩 업체의 도움을 받아 홍콩 국경에서 중국 입경증을 받고 선전(深圳)으로 들어갔으며, 광저우(廣州)의 켄톤(광동)페어도 참관했습니다.그때의 선전은 지금과는 상전벽해였습니다. 저녁 식사하러 가는데 호우가 쏟아지자 금세 배수가 안 된 물이 발목을 지나 무릎까지 차오르더군요. 식당에 갔는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암흑이 되더니 종업원들이 익숙한 동작으로 양초에
미술가 David Hockney 작품에는 절대로 잊히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다. 모던하고 강렬한 스트로크와 입체적인 느낌을 주는 파랑, 핑크, 초록색의 조화는 그의 작품 특징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사물과 환경을 어떻게 저런 색으로 표현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시점에서 하루쯤 살아보고 싶어진다. 최근 David Hockney에게 특별한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색환각(chromesthesia)’이다. '색환각'은 청각부호를 받아들일 때 시감각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노
나비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도시에 취직하면서 연락이 여의치 않았다고. 당시는 전화사용도 쉽지 않을 때였고, 만나기로 했던 시간과 장소가 엇갈리면서 헤어지게 되었답니다.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여 적극적이지 못했던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아있었답니다.후에 현재의 부인과는 어머니가 찬성하자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어머니가 원한다면 결혼해주지 하는 반감이 깔린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는데 현재 요양원에 있습니다.그렇게 헤어졌던 여자
싱그러운 봄이 왔다. 코로나사태와 따듯한 날씨로 인해 혼자 산책을 자주 나간다. 혼자 걷다보니 자연과 자꾸 눈을 맞추게 된다. 캐나다의 긴 겨울이 가시자 연두 빛 잎사귀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개나리가 노릇노릇 올라온다. 다양한 색깔로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이 계절이 참 고맙다.모든 사람이 이런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초록색 잎사귀를 옅은 회색으로 보거나, 빨간색을 회색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색맹이라 부른다. 남성 발생률이 더 높다. 반면 여성 12%는 일반인들에 비해 100배 정도 색깔을 더
대만이나 중국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만만디(慢慢的, 천천히)’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꽌시(關係,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들어가는 저에게 대만 친구가 한 첫 번째 이야기가, ‘중국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살려면 ‘꽌시’ 즉 인간관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사업의 기회와 성패는 사람이 만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을 얻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얻는다는 것이 5천 년 역사의 핵심이 아닌가요? 하지만 대부분은 눈앞의
이번 글도 지난 처럼 ‘Fundamentals of Neuroscience, Part 3: The Brain’ 강의 내용을 공유해본다.우리가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심장을 뛰게 하고, 몸을 움직이는 이 모든 활동들은 생각을 해야 이루어질까? 잠시 고민해보자. 그렇다. 위와 같은 모든 활동들은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즉 우리가 음식을 씹는 활동, 식도로 넘어온 음식을 근수축과 이완을 반복해 위로 보내는 활동, 위에서 음식을 소화시키는 활동, 심장이 뛸 수 있도록 움직이는 근육과 혈액 세포들, 호흡을
코로나사태 이후 하버드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뇌과학 강의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 그 중 ‘Fundamentals of Neuroscience, Part 3 : The Brain’은 젊은 교수님이 수업을 이끌어간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영상으로 쉽게 설명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온라인 게시판에 질문을 올릴 수도 있다. 수업을 듣다보면 우리 신체가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기능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강의 내용 중 ‘해마’와 ’편도체’ 부분이 상당히 의미 있
3월 24일보스 스테판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2주간 예정됐던 자가격리 및 재택근무가 5월 1일까지 연장된다고 했다. 2주 자가격리 기간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데 부족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래도 지난 3월 14일 2주 격리를 시작했으니 4월 초순 지나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앞으로 한 달 넘게 출근도 못하고 연구도 못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집에서 혼자 온전히 버틸 수 있을지... 앞으로 진행하던 연구는 어떻게 할지... 재택근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캐나다에 남아있어야 하나.
지금은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지 않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야영과 취사가 가능했습니다. 당시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값싼 가스버너가 다양하게 생산되었지요. 새로운 형태의 가스버너가 나오면 거의 모두 찾아서 수출하였습니다.그 중 첫 거래를 하는 사장에게 오더를 주었더니 부품 조달하느라 자금이 달린다며 일부 결제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빨리 보내야 시장을 선점하니까 원하는 돈을 결제하고 속히 납품하라고 했지요. 하지만 약속한 기일을 넘기며 여러 이유를 댑니다.나중에 대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오더한 물건이 이미 대만에 풀렸다고. 알
3월 16일 (월요일)주말에 연구기관으로부터 실험은 최소화하고 집에서 일할 것을 촉구하는 이메일이 왔다. 월요일, 연구기관은 혼란 그 자체였다. 다들 정신없이 실험을 정리했고, 필요한 데이터를 본인 하드드라이브에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점심시간쯤 되자 기관은 텅텅 비었다. 마무리해야 할 실험이 있는 나를 비롯한 몇 명 학생들은 실험 결과를 기다리며 코로나와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았다. 뉴스를 스크롤 하던 중 심장이 덜컹하는 뉴스가 눈에 띄었다.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가 앞으로
대만으로의 등산장비 수출은 순조로웠습니다. 버너, 코펠, 매트 등부터 바람막이, 눈이 내리지 않는 대만에도 3,000m 넘는 산들이 많다 보니 아이젠도 많이 나가고 돗자리와 의류도 나갔습니다.컨테이너로 대량의 물건을 보내니 수출 운임과 경비도 대폭 줄었습니다. 가격 경쟁력이 생겨 시장의 수요도 늘고, 다양한 제품이 들어오니 소비자들의 관심도 더 늘어났습니다. 자신의 매장에서 팔다가 업계 지인들에게 공급하게 되고,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도시와 지역을 나눠 중간 딜러들에게 공급하는 체계로 바뀌었습니다.어느 해 겨울에는 딜러들이 伍 先生
3월 10일 휴대폰에 뉴스 알람이 떴다.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가 캐나다와 이탈리아를 오가는 모든 항공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12월 말 코로나사태가 터지고 나서 캐나다는 2월 경 중국 후베이성, 이란, 홍콩과 몇 아시아 국가 외에 다른 나라를 오가는 항공을 금지하지 않았다. 극적인 방법을 잘 쓰지 않는 캐나다가 이런 방침을 발표한데 놀랐다.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3월 11일 트럼프가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오가는 항공을 금지했다. 어제 이탈리아에 이어 유럽 전역을 상대로 금지할 줄은 예상도 못해 충격이 컸
회사를 설립한 첫해, 여름이 오기 전에 두 번? 정도 수출을 더 한 듯합니다. 여름 되면 대만 등산장비 업계가 비수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지만,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그 여름은 동짓달 기나긴 밤보다 참으로 길고 길었습니다.한국은 반대로 봄부터 시작하여 여름이 되면 핫 시즌입니다. 그러다 8월 초순이면 공장들은 출고가 거의 멈추고 바닷물이 차갑게 느껴지는 8월 15일경부터 매장에도 손님이 한산해지는 구조였습니다.안정적인 내 사업장도 없고 수입도 없던 어려운 시절, 나와 이름 석 자가 한자까지 똑같은 한 사업가가 제안하더군요. 당시
살면서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기간을 합치면 8년이 넘는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2년, 고등학교 1년 다녔고, 캐나다에서 학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박사과정까지 5년 4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다양한 외국인들과 쉽게 빨리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어떤 것에 감동받고 좋아하는지 잘 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친구를 만들기 위해 나름 터득한 지혜랄까? 기술이랄까?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은 개인주의자이고 친해지기 어렵다는 편견을 한국 사람들은 갖고 있다. 사실 문화와 언어,
89년 1월 회사 설립을 하고 첫 고객은 당연히 그동안 인연을 이어온 대만의 우웨이지엔(伍惟堅)이었습니다.갓 30을 넘긴 경험도 일천한 젊은이가 사장 명함은 과하지 않느냐? 차라리 과장 명함을 새기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중에 바꾸기도 귀찮을 것 같고, 세상 물정 어둡다 보니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말하자’라고 정리했습니다.당시 차가 없어서 우시엔성(伍先生, 미스터 우)이 한국에 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항과 업체를 방문했습니다. 부족함도 거짓 없이 드러내고 판단은 상대방이 하도록 하는 것이 순발력 제로에 눈치도 없고 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지점에서 20Km 이내의 공간에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3년여를 대만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인하여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더 확보하게 된 셈입니다. 비록 뒤늦게 사회에 나왔지만 오히려 생각할 시간도 더 많이 갖게 되었고요.사업은 이윤 추구가 절대 우선입니다. 하지만 이윤만을 따르다 돈의 노예가 되거나 인간말종의 괴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을 하며 나의 삶을 살 것인지 개념 정리가 필요했습니다.첫 번째는 살아남기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
지난해 12월, 실험실에 새 식구가 등장했다. 이름은 오스카(Oscar), 직책은 ‘Bio-informatician (바이오인포마티션)’,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Bio-informatician’은 생소한 직종이다. 생물 분야에서 데이터 생산이 대량 일어나면서 생겼다. 이 직종은 특정 분석 툴, 통계 그리고 코딩을 이용하여 데이터를 다양하게 분석한다. 생물학자는 이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바이오인포마티션과 상담을 하면서 또 다른 분석방법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 때문에 ‘Bio-informatician’은 생
새해 1월 11일 대만에서는 총통과 입법위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보수적이고 친중 성향의 국민당 지지자와 개혁적이고 대만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 지지자 사이의 갈등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치와 차이가 없습니다.선거 결과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압승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번 총통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였습니다.국민당 대선후보로 한꿔위(韓國瑜)가 지명될 때 대선 예측 여론조사에서 한꿔위 후보가 현 총통인 차이잉원 후보를 이길 확률이 거의 두 배였지요. 민진당 내부에서도 후보를 교체하자는
생물분야에서 박사과정 혹은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어떤 모습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부스스한 머리에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쓴 수줍은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나 역시 석·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 연구원은 연구실에만 박혀 사회와 교류가 적고 사회적 관계가 필요 없는 직종으로 생각했다.외향성과 내향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나는 연구실에만 박혀 실험을 한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묻고 또 묻는’ 내 성향을 파악한 부모님은 연구원을 권유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거부했다. 대학 졸업 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해외출장이 잦은 직종을
부천에 있는 코펠 공장에는 충분한 시간을 주고자 6월 말에 후임을 뽑으라며 12월 말까지만 근무를 하겠다고 알렸습니다.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월경에 등산장비판매점 아리랑산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만 바이어가 코펠을 찾는다며 공장에서 만나자고 합니다.안면이 있는 아리랑산맥 사원은 대만 보따리상으로 소개했습니다. 첫눈에 보기에도 세련된 비즈니스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요. 다행히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솔한 인간은 아닙니다. 특히 대만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친한 친구나 형제처럼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했습니다.原野登山行 상호에 伍
王子의 李建雄과 등산장비 사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도 관계는 지속하였습니다.李建雄은 당시 대만체육회 산하 대만스키협회 총간사(總幹事, 총무)였습니다. 대만은 눈을 거의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산에서 일 년에 1주일 정도나 볼까 말까 하지요. 스키를 좋아하는 대만 사람들은 스위스 캐나다 일본 등지로 겨울마다 스키를 타러 다닌다고 했습니다.李建雄이 저와 인연이 되면서 일본보다 저렴하고 편리한 한국 스키장에 관심을 두고 1989년인가 1990년 겨울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대만 스키협회에서는 한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우선 먹고 살아야했습니다. 단순한 저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는 ‘식당을 차리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였지요. 그래서 가족들과 교대 부근에 칼국수 음식점을 차렸는데 몇 달 했더니 매달 임대료 내기가 빠듯했습니다.당시에 깨달았습니다. "사람마다 얼굴 다르고 생각 다르듯이 아무거나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거 아니구나!" 음식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뭔가를 만들어 수익을 창출할 능력도 없다는 걸 알았지요. 나 스스로 제조업을 할 그릇이 아니고, 영업은 전혀 맞지 않
1970~80년대 등산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남대문, 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부근의 등산장비 전문점인 아리랑산맥을 기억하실 겁니다. 2대에 거쳐 운영하다가 지금은 사라져 아쉬움이 남습니다.대만에 수출할 첫 번째 품목은 텐트로 정했습니다. 당시 대만에서 본 텐트는 방수 처리한 원단을 사용하지 않아 무겁고, 바닥 면은 열에 쉽게 구멍이 나는 조악한 수준이었습니다.남대문 아리랑산맥에 가서 텐트 6동을 상표 없이 주문했습니다. 당시 사장님은 아들과 동갑인 나에게 많은 도움과 격려를 해주었지요.텐트는 몸체와 기둥 역할을 하는 폴,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