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이 위나라에 이어 대나라를 정벌하고 조나라로 진격을 하려는데, 유방은 형세가 위급하다며 한신의 병력을 차출하여 초나라 항우를 막기 위해 데려갔습니다. 한신은 정예병을 보내고 새로 개편한 오합지졸 2-3만을 끌고 정형으로 진군하지요. 당시 조나라에는 20만의 군대가 대비하고 있었습니다.조나라 이좌거는 왕과 실력자 진여에게 청하기를, ‘3만의 군사를 자기에게 주면 수백리 길을 이동하느라 지친 군사들이 정형으로 들어오는 좁은 지형에 길게 늘어졌으니, 샛길로 가서 보급을 끊어버리면 열흘 안에 한신의 목을 바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류는 많은 세월을 이어오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동력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더 크고, 더 높고, 더 화려한 꿈을 이루려는 선조들의 지난한 노력이었습니다.하지만 그들이 높게 쌓아올린 탑만큼이나 행복하였을까요?위진동은 30대 후반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생각만큼 큰 행복을 주지도 않고, 오래 가지도 않더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위한 삶을 위해 17년 전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그가 추구하는 삶은 『단순, 청정(고요)』입니다.“단순과 청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예로부터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치기일망정 싸우다 죽기를 원했습니다.그렇지만 다른 의미로 제가 자주 언급한 인물이 한신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죽음보다 더한 치욕도 견뎠고, 찬밥 한 덩이도 기꺼이 얻어먹었습니다.한신은 살아서 평생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이란 욕(과하지욕,胯下之辱)을 먹었고, 역사에서도 개국공신이라는 미명보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으로,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토사구팽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지난 수천 년의 역사에서 항우만큼 탁월한 장수는 거의 유일무이합니다. 전술, 전투, 개인의 역량 모두 나무랄 데가 없는 용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혜를 함께 주지는 않았습니다.전장에서 함께 싸울 때는 몰랐지만, 막상 논공행상에 들어가면 섭섭함이 생기지요. 항우는 객관적이지도 남들을 납득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즉흥적이고 기분 내키는 대로 자리를 주다보니 불만이 거셌고, 이는 따르던 사람들이 쉽게 떠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비록 진나라에 망했어도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자가되었던 환공 이래로 제나라는 강력한 나라를 유지했었지요.
대만이야기 34화 ‘한고조 유방’과, 35화 ‘논공행상’에 이어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초한대전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고조 유방은 초패왕 항우보다 15세 연장이고, 항우는 8년 동안 전장을 휩쓸다가 30살에 자살을 합니다. 항우가 죽고 유방은 45살에 한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후 재위 7년만인 52살에 생을 마칩니다.항우는 초나라의 명망 있는 장군가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항연은 초나라의 마지막 장군이었지요. 초나라가 망하고 작은아버지 항량의 손에서 자랍니다.항우하면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서 어원을 따져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말들이 꽤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변명하지 마!’라는 말이 있지요. 변명의 한자를 보면 ‘변별하여(辨) 명확하게 밝히다(明).’라는 의미로 사용을 하여야 마땅하나, 현실에서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말하다.’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왜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할까?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하는 부모들의 조급증은 ‘변명하지 마!’라는 한마디로 가슴속에 불신과 증오를 자라게
‘래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 이 말은 청나라 문인인 조익(趙翼)이 쓰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노자의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을 변형해서 사용했습니다. 둘 다 어렵지 않은 한자이지만 그 뜻은 기억해둘만합니다. ’좋은 뜻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는 조익의 글과, ‘말 잘하는 사람치고 나에게 이로운 사람 없다’라는 의미의 노자 이야기, 마땅히 새기고 경계를 해야겠지요.우리 조상들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망하는 계기도 아시는 바와 같이 래자(來者)를 다스리지 못한 탓입니다. 주왕조의 봉건 국인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역 3성, 즉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 지린(吉林, 길림), 랴오닝(遼寧, 요녕)성 역사에 관한 연구공정입니다. 자기들 땅에서 자기 역사를 어떻게 하던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할 이유도 없고, 하고 싶은 맘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고구려와 그 유민이 세운 발해 그리고 백제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왜? 무슨 이유로 남의 역사까지 가져다 주장을 해야 하는지 조금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동북공정은 과거 역사의 문제임에 비해 현실에선 훨씬 심각한 문제가 서북공정과 서남
그동안 신장 북쪽을 여행하였다면 마지막 회는 톈산(天山,천산)남쪽으로 이동하여 키질 석굴이 있는 쿠처(庫車,고차)에서 출발 쿠얼러(庫爾勒,고이륵)에서 일박하고 우루무치(烏魯木齊,오로목제)로 되돌아가는 약 900여 킬로미터를 이틀간 이동하는 신장의 남쪽 여정입니다.들어가는 입구에 蓮海世界(연해세계)라고 큰 표지판이 걸려있는데 ‘연꽃 바다 세계’라고 번역을 해야 하나요? 위의 지도 쿠를리 우측 파란 지점이 바로 이 호수입니다. 실제로 고대에는 서해(西海)라고 불렸고, 당나라 때에는 어해(魚海)라고 불리다 청나라 때부터 붜스텅호라고 부른
여행을 하는 큰 즐거움의 하나는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의 인물을 만나고 새로이 알게 될 때 느끼는 희열입니다.중국이나 다른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불교유적을 많이 만납니다. 이천년 가까이 전래되며 많은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요.그중에 석굴이 알려지면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역사의 흔적을 더듬기도 합니다. 용문석굴, 운강석굴, 돈황 막고굴은 이견이 없는 삼대석굴인데 이번에 들른 키질석굴을 가이드나 해설사가 사대석굴중의 하나라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합니다.가이드나 현지 해설사 모두
바인뿌루커(巴音布魯克,파음포로극)대초원’을 출발, 천산을 넘어 신장(新疆,신강)의 남쪽 타클라마칸 사막 북단으로 이동한 후 동쪽으로 달려 쿠처(庫車,고차)까지 가는 일정입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에 출발을 하기로 했는데 가이드 이야기가 어제 내린 눈으로 천산 남쪽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막혔답니다. 만약 길이 풀리지 않으면 어제 넘어왔던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으로 다시 나가서 돌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6시간 정도의 시간이 더 추가된다고 합니다.중국에 10년 살면서(대만은 아님) 터득한 깨달음은 ‘문제없다. 고 말하면 반드시
천산에는 신장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이 있습니다. 오늘은 약 250여 년 전, 1771년 1월 5일 한겨울에 강물이 어는 러시아를 탈출한 몽고인들의 인솔자 워바시(渥巴錫,악파석)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을 합니다. 그들이 이리분지에 도착한 것은 그해 7월이었습니다. 우리 버스는 이리 분지에 있는 이닝(伊寧,이령)시를 떠나 250Km를 이동하여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에 도착하였습니다.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초원에서의 모든 일정은 취소하고 건륭황제가 워바시(渥巴錫,악파석) 일행에게 약속한
이번 여행기도 이틀에 걸쳐 돌아본 마귀성과 싸이리무호수, 카자흐스탄과의 국경 등을 돌아본 글입니다.우얼허 마귀성은 이안감독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애석하게도 전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마귀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밤이 되면 바람이 일면서 애기울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정학적인 이유와 바람이 여러 기암괴석사이를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라고 추측합니다.몇 년 전까지도 중국이 산유국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지요? 거기다가 수출까지 하였다면 믿어지시나요? 그동안 중동 산유국과 미국 일본
이번 여행기는 이틀에 걸쳐 관광을 한 카나스 공원의 전망대와 호수 그리고 인간정토(극락정토는 들어봤는데, 참 생소한 단어입니다.)라 불리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허무촌(禾木村,화목촌)과, 역시나 천하제일탄(天下第一灘)인 오채탄(五彩灘)에 관한 내용입니다.아마 여행 중 가장 눈이 시원한 일정이었고, 나름 산행도 즐겼습니다. 춘하추동을 다 경험한다는 쿤밍의 샹그릴라보다 카나스가 더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카나스국가지질공원’이라고 하는 보호구역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무공해 전기버스로 갈아타고 첫날은 카나스 호수 방면으로, 다음
오늘 일정은 준가얼 분지의 동북단 푸온(富蘊)현에서 서쪽으로 이동 뿌얼진(布爾津,포이진)까지 약 420Km 입니다. 이곳 준가얼분지에는 준가얼 야생마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6,000만 년 전의 원시말에 가장 가깝다고 합니다.준가얼 야생마는 원래 이곳과 몽고 서부에서 서식을 하였는데 서방에 알려진 계기는 1878년 러시아 장교이며 탐험가였던 푸러와얼스키(普熱瓦爾斯基.보열와이사기)씨가 탐험대를 끌고 3차례 준가얼분지를 탐험하며 야생마를 나포, 채집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명이 푸러와얼스키馬, 줄여서 푸쓰마(普氏馬,
신장 여행의 시작은 검문검색으로 시작해서 검문검색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며칠 지나니 익숙해져서 그저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장지구에 들어오는 순간 이동만 하면 어디서나 검색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전철을 타기위해서는 모든 짐을 검색대에 올려놓고 검색을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검색을 하지는 않지요.하지만 신장에 들어오면 5성급 호텔에 들어가면서도, 마트나 시장에 들어갈 때도 검색을 합니다. 주유소에 주유를 하러 들어갈 때는 운전자 이외의 모든 동승자들은 내려서 반대 출구 쪽에서 기다렸
이번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두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시아대륙의 중앙이 우루무치이고, 우루무치는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도시라는 사실. 가장 가까운 바다가 인도양으로 3,100Km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대만 카오슝에서 직항이 없어 3시간 비행을 해서 우한(武漢,무한)에서 일박을 하고 다시 5시간 가까이 북으로 이동하여 우루무치 공항에 내렸습니다. ‘우루무치‘란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의 의미라고 합니다.이 지역은 청나라 때 신강성이 설치되면서 성도가 되었다가, 1
5월 30일부터 6월 11일까지 13일간 중국인들도 가기 쉽지 않아하는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다녀왔습니다.중국에서 가장 이질적인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민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지금도 끊임없이 독립을 주장하며 분쟁이 이어지는 곳. 신장(신강,위구르)과 시장(티베트)입니다.신장은 북쪽에 알타이산 산맥과 남쪽에 쿤룬산(崑崙山,곤륜산) 산맥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중앙을 톈산(天山,천산)산맥이 지나면서 북쪽을 뻬이장(北疆,북강) 남쪽을 난장(南疆,남강)이라 부르는데 이번 여행은 뻬이장北疆(북강)을 도는 일정이었습니다. 4,400여 킬
서양에 로마제국이 있다면 중국에는 이와 견줄 한(漢) 왕조가 있습니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찌르고 유일한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로마제국을 이루었다면, 중국에서는 이보다 200여년 앞서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와의 패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진정한 황제로 등극한 후 400여 년을 이어가는 왕조를 성립합니다.한나라의 한(漢)은 중국을 대표합니다. 영어 차이나(CHINA)의 어원이 앞선 왕조, 짧지만 많은 유적을 남긴 친(秦,진나라)에서 유래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왕조는
세월이 흐르면서 신체변화를 실감합니다. 거울 속 변하는 나 자신처럼 그동안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그중의 하나, 공원의 모습도 많이 변했지요. 6-70년대 놀이문화가 거의 없던 시절에 공원은 주말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을 받았지요. 밤에는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였고. 지금은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시간 때우는 곳, 혹은 시사문제로 열띤 토론을 한다는 기사를 봤습니다.70,80년대 외국인들이 운동복에 런닝화를 신고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모습이 생경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인권문제로 불편했던 카터
지록위마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짓’이라 합니다.중국 역사 최악의 환관 조고, 환관은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정부 들어서 자주 언급되었던 내시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고가 진나라를 망하게 했듯, 명나라 때 환관 위충현은 동창이란 정보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세를 휘두르다 명나라가 망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지요.원래 그릇이 안 되는 어리석은 호해는 가짜 유서를 이용 진시황의 뒤를 이어 2세 황제가 되지요. 호해는 태자 부소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도 모조리 죽입니다. 정치는 승상 이사와 조고에게 맡기고
1970년대 ‘별들의 고향’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작가 최인호, 많은 소설과 영화 등으로 친숙한 그는 1997년 ‘상도’를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대만 친구 중에서는 한국 연속극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으로 ‘상도’를 꼽기도 하더군요.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 중에 1988년에 쓴 소설 ‘천국의 계단’이 있습니다. 애인이 월남에 파병군인으로 갔다가 전사를 했다는 통보를 받고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여배우 유미의 이야기를 쓴 소설입니다.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두 다리가 불구가 되어 살아있음을 알게 되
진나라 영정은 중국을 통일하고 과거와 같이 군이나 왕으로 불리는 것은 자신의 업적과 걸맞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사후에 후대의 왕이나 신하가 지어 올리는 건 더 참을 수가 없었지요.그래서 본인이 직접 선택을 하였습니다. 전설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땄습니다. 스스로를 진나라 처음 황제라는 의미로 ‘秦始皇帝’, 줄여서 ‘시황제’라 정하고, 다음 대부터는 연이어 ‘2세’, ‘3세’,,,,10,000세 황제까지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꿈이 길면 아니 꿈만 못하지요. 누대에 걸쳐 강국의 염원을 안고 드디어 통일을 하였건만,
대만에 관해 언급하는 저의 백 마디보다 더 가치가 있을 한 사람을 소개하고, 그녀의 글을 올립니다.30년 전 한국 유학생을 사랑하여 한국으로 시집온 대만 새댁 나문황(羅文凰, 루어 원 황)이야기입니다.1986년경으로 기억합니다. 한국 유학생들끼리 모여 농구 시합을 할 때 한 동문이 예쁜 여자와 함께 와서 자기 친구를 소개하였습니다. 그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친구의 행운에 부러울 따름이었지요. 학교 맞은편에 있는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고, 저와도 알고 지낸 지 30년이 흘렀습니다.제가 현재 살고 있는
일찍이 법가 상앙을 등용한 진나라는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제의 틀을 만들어 강국으로 변했고, 이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룬 재상이 이사입니다.이사는 초나라 출신입니다. 어렸을 적 뒷간에 앉아 일을 보는데 지저분한 시궁쥐 한 마리가 먹는 것도 부실하고, 또한 개에게 쫒기며 몹시 불안해하는 걸 봅니다. 그런데 곳간의 쥐는 쌓여있는 곡식을 먹으며 편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개가 다가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깨닫지요. ‘인간이란 잘나고 못남이 쥐처럼 환경에 따라 정해지는구나.’그길로
장양왕 이인도 재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13살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시황입니다. 승상 여불위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상국(相國)이 되고, 작은 아버지란 의미의 중부(仲父)로 불립니다.여불위는 아직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됩니다. 당시 집안 하인만 일만 여명에 식객도 3천을 두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불위를 높게 평가하는 일 중 하나가 당시 석학들을 모아 현재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책 ‘여씨춘추’를 편찬한 점입니다.중국역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연구 검토하여 서술한 책으로 유가를 위주로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 그 이상의 것들입니다.정경유착과 부패, 막장 드라마 그리고 탄생의 의혹까지.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2천 2백 년 전 진시황 당시에도 일어났습니다. 24화 맹상군을 죽이려고 했던 진나라 소양왕에게는 안국군이라는 둘째 아들이 있었고, 그 안국군에게는 이인(異人)이라는 서자가 있었습니다.이인은 어머니가 안국군의 총애를 받지 못하자, 다른 20여명의 자식들 속에서 변변한 대우도 못 받고, 왕위를 계승할 가망성도 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다 사이가 좋지 않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보내
맹상군에게는 많은 식객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풍환(馮驩)이라고 하는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남루한 행색의 풍환이 맹상군을 찾아왔습니다. 다 헤진 옷에 짚신을 신고,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는데 칼집도 없는 꾀죄죄한 몰골이라 몹시 가난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맹상군이 묻습니다. “선생께서는 제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왔소?”, “저는 너무 가난해서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왔습니다.”, “어떤 재주를 가졌는지요?”, “아무런 재주도 없습니다.” 그래도 맹상군은 웃으며 풍환을 식객으로 받아주었습니다.집안 하인은 재주도
[대만이야기 10화] 단오의 유래'에서 언급을 했던 맹상군(孟嘗君?~BC279)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제가 알고 있던 식객(食客)이란 단어가 어느 날 TV에 등장을 하더니 음식경연장이 되었고, 최근에는 ‘맛집’ 혹은 ‘먹방버라이어티’ 같은 생경한 조합어도 탄생을 했습니다.요사이는 냉장고 문을 열고 ‘왜 열었지?’ 생각을 하는 나이가 되다보니 혹시 내가 잘못 알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사전을 뒤적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아는 그대로이군요. -식객: 세력이 있는 집에 얹혀서 문객 노릇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맹상군은 전국4군(전
현대국가에서 법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하는 한 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문법이건 판례법이건 법은 국가와 함께 존재하지요. 법은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온갖 사회 규범’이라고 사전에서 정의를 하고 있네요.춘추시대를 연 제나라 환공은 포숙아의 천거를 받아 관중을 등용하여 춘추오패 중에서 최초의 패자가 됩니다(대만이야기 2).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 한사람만의 힘으로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없듯 국가도 왕 한사람의 힘만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거나 패업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춘추시대에 이어 140여개의 군소 국가들이 하나
전 세계 곳곳에 중국인이 없는 곳이 거의 없지요. 핵전쟁이 일어나 이 지구상에 최후의 일인이 남는다면 아마도 중국인일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우리에게 중국인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요. 요사이 경제적으로 G2가 되면서 어느 나라 관광지나 중국인들로 북적입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꼭 들어가고, 수천 년 문화유산에 낙서를 하고, 길거리에서 침 뱉고, 방뇨하고.예전에 박지성 선수에게 관중이 칭크(Cnink)라고 말했다가 문제가 됐었지요. 바로 ‘중국 놈’이란 어원을 가진 욕설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자연의 폭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현상이 지진과 태풍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인가요?대만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합니다. 크고 작은 지진이 한 해 200여 차례 발생을 한다고 합니다. 태풍도 평균 20여 차례 지난다고 하니 대만에 비하면 우리 대한민국은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나라이지요.지진과 태풍, 둘 다 커다란 공포와 엄청난 피해를 주고 지나갑니다. 재산상 손해는 어떤 것이 더 크다고 말하기 곤란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공포는 경험상 지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보통 921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