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아버지의 일기장 15어젯밤 갑자기 재동이가 내려 왔는데 용건은 이번 신학기부터 고등학교 교사 (휘문고)로 임용되어 각종 서류를 갖추러 온 모양. 아는 선배의 청탁으로 발탁되었다. 아무튼 기쁜 일이다. 수동이는 강원도 화천지구 사단 포병부대에 있다고 한다. 명이는 한 달간 근무한 대가로 일금 2만 원을 받아 왔는데 실적 부진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했다. 외판원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간 회사와 몇 차례 실랑이도 있고 해서 오늘로 깨끗이 퇴직한다고 한다. 한 달간 무료(?) 봉사한 셈치고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타일렀다. 훗날
아버지의 일기장 16희망찬 새 아침이다. 나의 조그만 소망은 고향 울산으로 가기 위해 그곳의 대지를 약간 마련하는 것이다. 욕심을 내서 100평 정도 사려는데 땅값 상승이 걱정이다. 그 정도의 현금은 없지만, 최저 지가와 최대한의 융통으로 용기를 내보려는데 과연 성취할 수 있을까? 최대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동명이가 졸업하고 수동이는 현대자동차 학원에 등록하고 오늘 처음 수강에 들어갔다. 재동이는 심산의 사찰에 들어가서 정신 수양과 공부를 해 보겠다는 뜻으로 준비에 바쁘다. 모쪼록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기장 15재동이 화실은 많은 진전을 해서 원생이 증가 일로에 있다. 경영이 잘 되는 편이란다. 오늘도 동명이에게 시계 선물 (1만 5천 원짜리)을 하고 회비를 가져 왔다.요즘은 아이들이 가계에 많은 보탬을 준다. 벌써 자식들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늙어 가는 기분이다. 재동이는 또 나더러 극장에 가서 '전쟁과 평화' 를 보자고 한다. 가족이 화목해 질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지만 내 건강 문제로 가지 못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동명이는 어버이날이라고 나를 위한 양말과 손수건, 아내를 위한 머플러 등 몇 가지를 사 와서
아버지의 일기장 14부정과 싸워 젊은 꽃들이 스러져간 4.19. 그 날이 17주년을 맞이 했다. 나는 비록 환자였지만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마음 속으로 증오심을 느꼈었지. 뜻있는 몇몇 친구 교사들도 숙직실에서 정권의 지나친 행태에 통탄했지. 어언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취객이 침입해서 한때 소란을 피웠다. 시종일관 웃음으로 넘겼지만 미천한 장사로 인해 받는 설움이라 할까. 무식한 취객의 눈에는 약하고 미천한 노리갯감으로 보이는모양. 교양 없는 자와 대화하는 것이 우이독경인 듯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무리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
“농부는 죽어도 씨앗을 베고 잔다”라는 옛말이 있다. 지구촌은 지금 총성 없는 씨앗 전쟁 중이다.어렸을 때부터 70년대 고향을 떠날 때까지 부모님과 농사를 지었다. 현재 한국은 농업 인구는 70년대보다 80여 % 가 감소하여 현재 216만여 명(2022년 기준)이다. 전체인구 4,5%이고 그마저도 노령인구가 절반이나 된다고 한다.불행하게도 한국은 식량 수입국이다. 쌀을 제외한 전체 곡물 자급률은 5%에 불과한 실정이다. 외환위기(IMF) 이후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씨앗 주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우리나라는 5대 종묘 회사가
아버지의 일기장 13재동이가 군 복무 중 화실에 나가 받은 보수 4만 원을 약값으로 내놓아 난생 처음 자식에게 받은 돈으로 얼떨떨하더니 오늘도 1만 1000원을 갖고 왔다. 매일 방위병 복무 마치고 화실로 가서 학생을 지도하니 고된 일과다. 성실하게 살아 보겠다는 의지는 놀라운 일이며 나를 감동케 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있어 믿음직하다. 격무에 몸이 지탱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부디 건강한 몸으로 뜻을 이루기를. (2013년 삽화, 복무 직전)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아버지의 일기장 12요즘의 생활은 너무도 벅차다. 아내는 아내대로 가로세로로 뛰고 나는 나대로 과한 하루 일과를 보낸다. 가계부의 적자를 감당할 길이 없어 따로 점포를 얻어 통근식 장사를 한 지가 벌써 한 달여가 된다. 요행이 기대만큼 계획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지친 데다가 수면 부족으로 아내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오늘밤도 아내와 같이 조용히 잠든 골목길을 통금 시간에 쫓겨 돌아 왔다. 그래도 얼마간의 수익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 주는 듯.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드니 겨우 네 시간 수
아버지의 일기장 11불황이 또다시 닥치는 듯하다. 거기다 업소마다 텔레비전을 설치해놓고 서비스하고 있으니 영세 상인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요즘 한창 인기있는 '여로'라는 프로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책방이 텅텅 빈다. 우리도 티비를 구입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돈을 융통해 미제 중고품을 구입했는데 화면이 좋다고 아이들이 좋아라 야단이다. 상업용이 아니고 우리 생활용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튼 티비로 인해 매상이 다소 회복된 듯하다. 지난 1 개월간 매상 하락으로 10만 원의 부채가 생기고 말았으니 생활의 위협이란 삽시간에 온
아버지의 일기장 101년 수개월 만지작거리던 이 일기장도 오늘로 끝이 난다. 자정 넘어 펜을 들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온 생활의 장. 그나마 요즘 빼어먹기 일쑤니, 시종일관 쓰지 못 했음이 후회된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몸의 컨디션이 좋아야 몇 자 쓰는 일기도 지속되련만. 그러나 괴로움을 참고 한 장 한 장 적어두고 보면 역시 보물이 된다. 희비가 담겨있는 지나간 기록을 쓰는 이유를 가족은 이해하리라.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남기는 것이니 꾸준해야겠다. 만화책을 대여하는 문제로 덕명여고 뒷산 산동네에 처음 올랐다. 정말 가파른 산
아버지의 일기장 9서울에 간 큰 아이가 방학해서 돌아왔다. 우리 다섯 가족이 다 모였다. 오늘 밤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 옛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우리 인생은 모름지기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며 배워 나가는 것. 부를 위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노력보다 행복을 위하여 실속있는 참된 노력을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가정은 성실ㆍ근면ㆍ노력이라는 생활훈으로 실천하며 살아왔기에 아이들도 지나친 치부의 허영을 멀리하고 나의 유일한 신조인 '생각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부는 인생을 살찌게 하지만 인생을
아버지의 일기장 8어제부터 예고해 온 중대 발표가 오전 10시에 있다고 아침 뉴스에서 또 예고한다. 놀라운 뉴스가 흘러 나왔다.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반신반의했으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평양에 가서 김일성-김성주를 만나고 온 사실이 설명되고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 됐다. 27년간 장벽으로 갈라져 있던 남북이 서로 대화의 문을 열었다 하겠다. 발표가 난 뒤 신문과 라디오는 온통 공동성명에 대한 방송과 기사뿐이다. 오늘 이 공동성명을 전 세계가 톱기사로 다루고 가까운 일본에서는 상당히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무튼 우리의
아버지의 일기장 71972년 5월 27일어제 갑자기 서울에서 큰 아이가 내려 왔다. 교내 미전으로 월말까지 휴강이라는 것. 오자마자 친구 집들을 찾는다고 이틀간을 싸돌아 다닌다. 20대 시절은 무엇보다 친구가 좋은 법이다. 현실의 즐거움, 미래의 희망과 청춘의 발랄한 혈기로 넓은 거리를 좁다는 듯 활보하는 20대, 이는 과연 살아있는 힘이라 할까? 약동의 물결이라 하겠다. 만약 젊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빛 잃은 보석이라 할 것이다.그때는 부산에 가면 상석이 집에서 하루 회포를 풀고 신창호 선생님 화실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얘기 꽃을
아버지의 일기장 61972년 5월 10일서울 큰 아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내는 벌써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수심 어린 표정을 짓곤 한다. 객지에 보낸 자식에게 충분한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부모의 마음은 쓰라리다. 현지의 사연인 즉 무언가 아르바이트를 해 볼 양이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한다는 것. 대학 초년생에겐 일자리가 어려운 법. 고학이란 문자 그대로 고충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오늘 2만 원을 보냈다. 우리의 신념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모쪼록 건강한 몸으로 학업에 충실하길 바란다. 혜화동 우체국에서 돈을 찾을
아버지의 일기장 5어제는 기다리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불량만화 단속으로 즉결에 간 아내는 하룻밤을 지새고 온 종일 시달린데다가, 차멀미까지 겹쳐서 6시가 되어서야 까맣게 되어서 돌아 왔다. 큰 아이 시험 발표를 애태우며 기다렸는데 큰 아이 친구가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전해 주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꿈 같은 장면이었다. 금년에는 우리 집도 서광이 조금 비치는 듯 하다. 큰 것은 서울대에. 둘째는 남고에. 명이도 좋은 구슬을 뽑으리라 믿고 싶다. 한편으론 고정된 수입에 지출은 증대하니 앞날이 암담하다. 허나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해야지
아버지의 일기장 51972년 2월 4일.아내는 지금 파출소에서 밤을 지새운다. 어쩌다 만화쟁이가 된 죄로 불량만화 단속에 걸려 즉결에 간다고 집을 떠났다. 파출소에 갔더니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딱딱하게 굴며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하는 순경들의 언동에 정말 어이가 없다. 오늘 밤을 지새우고 내일 오후에라야 재판받을 수 있다고 하니 지루한 시간과 추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가장으로서 응당 내가 가야 할 처지이나 환자의 몸인지라 아내가 서슴지 않고 나섰다. 해마다 불량만화 단속 기간을 정해 단속을 나서지만 도대체 불량만화를 무엇을
아버지의 일기장 41971년 10월 19일.큰 아들의 부산고 미전 관람 차 모처럼 나들이를 한다.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미전이라 꼭 봐 달라는 아들의 원을 뿌리칠 수 없어 간 것이다. 하기야 자식이 미술 전시회를 한다면 자랑 삼아 응당 가 봐야 할 것이지만 항상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 하니 선뜻 맘을 내지 못 한다. 오늘은 빵값 몇 푼 넣고 전시장으로 나갔다. 모두들 나에게 인사가 착실하다. 재동이는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서인지 작품이 많지 않고, 큼직한 것도 없지만 질적으로 다양하고 발전한 것 같다. 아버지가 오래 보신 그림. (
아버지의 일기장 31971년 7월 5일.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시장에 갔던 아내는 땀투성이가 되어 돌어왔다. 오늘부터 빙수를 시작할 양으로 준비를 서둘렀다. 냉장고며 얼음 기계를 손질해서 정오경에 겨우 첫 얼음을 깎았다. 빙수를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다. 그런데 날씨가 퍽 더운데 많이 나가질 않는다. 수요자들의 경제 사정도 있지만 이상하게 장사가 잘 안 되는 날이 있다. 빙수를 시작한 날이라 그런지 하루 70개 정도 팔리던 케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아내의 표정은 매우 어두운 것 같다. 하루종일 분주히 날뛰어도 제자리걸음이고 저녁에
아버지의 일기장 22071년 4월7일.10년 전쯤인가. 아이스케키를 팔려고 공장엘 가서 받아 왔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시골 교사였지만 그래도 아직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건만 이 몸은 케키통을 둘러메고 골목을 걸었으니 그 누가 인생의 앞날을 점 치리오. 차라리 처량하게 외치는 저 소년과 같이 "아이스 케키! 아이스 케키!" 하고 외치며 골목을 누벼나 보았으면. 건강이 부럽구나.그때 저도 아이스케키 공장에 같이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더운데 하나 먹고 가자" 해서 제가 "우리가 먹으면 장사는 어떻게 합니꺼?" 하
아버지의 일기장 1아버지는 군에도 두 번 갔다 오시고 교직 중 재교육과 보충수업으로 간을 다쳤으나 산재처리는커녕 학교를 쫓겨나고 말았다. 그 모든 고통과 비용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입원하러 온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아 만화방과 풀빵 장사를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일기를 쓰셨다.1971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비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해도 마음속에서나마 나무를 심듯 삶의 기록을 심을까 한다. 병마와 가난이 겹친 힘든 생활은 내 아내 아니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이 하잘 것 없는 목숨을
신봉선전 25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돈은 없으니 우리가 살아온 삶을 노트에 적어 이야기를 물려 주자고 하셨다. 글을 쓰시다가 힘이 없어 중단하면서 어머니께 쓰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오신 얘기를 다 쓰셨고 어찌하다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어느 날 내게 전화가 왔다. 동생과 둘이 사는 여고생인데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 해서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할까?' 한탄했는데 어머니 책을 읽고 '나는 괜찮다' 라고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고 했다.지나고 보니 모두가 '한 쪽
신봉선전 24아버지가 복수가 차고 호흡곤란을 겪으며 전신에 쥐가 나서 소리치며 앓던 밤. 두 분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어머니 뒷바라지에 보답을 못 하고 낫지 않음에 어떻게 속죄하나, 어머니는 목숨 걸고 뒷바라지하며 간호했지만 정성이 모자라서 이렇다면서. 나는 명절에도 신문사 일로 그림 그려야 해서 내려가지 못한 마음을 만평으로 그릴 뿐이었다.얼마 후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아바지는 평온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긴 편지를 쓰셨다. 말미에 "당신이 믿는 아내로서 그 본분을 다해 당신이 부르실 그
신봉선전 23장사하시던 어머니가 하루는 솰솰 끓는 물통 옆을 지나가다가 몸뻬(끝이 묶인 바지)에 걸려 끓는 물이 쏟아지면서 발을 데었다. 허벅지 살을 떼어 수술을 해야 했다. 너무 아프셨다. 그러나 '아무리 아파 봐라. 내가 장사 안 하고 눕는가' 하고 곧 일어나 장사를 하셨다. 아버지 몸이 점점 악화하여 병원을 오가야 해서 더욱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여동생 명이가 먼저 결혼하고 이어 내가. 그리고 수동이가 결혼을 해 시현이, 솔나리, 도형이, 우혁이, 진일이, 다솜이 이렇게 여섯 손자 손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