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00일째를 하루 앞둔 4일 유가족들이 서울광장 앞에 분향소를 새로 설치하는 과정에서 경찰·서울시청 공무원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3일 오후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이날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합동 분향소에서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을 지나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으로 걷는 추모행진을 시작했다. 시민 2천여명이 159명의 희생자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의 뒤를 따라 걸었다.이날 오후 1시께 서울시청 광장 앞에 도착한 추모 행렬이 도착했고, 시민대책회의가 기습적으로 “서울시가 광화문광
1. 박희영, 이태원 참사 때 권영세에 전화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을 수사 중인 검찰이 박희영 용산구청장 공소장에 지난해 10월29일 참사 당시 박 구청장이 관련 상황을 인지하고도 가장 먼저 지역구 의원인 권영세 통일부 장관에게 전화해 상황을 보고했을 뿐, 정작 재난대응에 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적시한 것으로 확인됐다.31일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검찰로부터 제출받은 공소장을 보면, 검찰은 박 구청장이 참사 당일 밤 10시51분에 이태원상인연합회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10시59분에 현장에 도착해 사고를
불교8대성지 가운데 하나인 바이샬리에 이르렀다. 바이샬리는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설법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도 자주 방문하시고 여러 행적을 보이신 곳이다. 특히 부처님이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여성출가를 허용하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구니 승가의 기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돌아가신지 약 300년이 지난 후, 인도 아소카라는 왕이 수많은 목숨을 짓밟은 것에 대한 참회로 불교로 개종했다. 불교는 아소카왕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불교는 북인도의 지방 종교에서 인도 전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나아가 기독교
사랑하는 사람을어처구니없이 먼저 떠나보낸산 자들이여!먼저 떠난 자의 몫까지두 배로 삶을 살아라.떠난 자의그 많은 꿈, 재능, 하고 싶은 일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그것들은 산 자들의 몫산 자들이 빚진 마음으로모두 이루어 내야 할 숙제그러기 위해 산 자는같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다.지치지 말라.산 자들은 충분히두 배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밥도 맛있게 많이 먹고결연한 마음으로 건강도 더욱 챙기고강인한 체력으로 더욱 더 오래 살아하루를 이틀처럼일 년을 두 해처럼부지런히 압축해서 살아야 한다.그리하여 마침내떠난 자의 숙제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아빠 최명찬(57)씨는 매주 토요일 산을 오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가르며,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 기어이 정상을 향한다.
27일 저녁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미사가 봉헌됐다.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이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봉헌하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미사가 이번 75차에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봉헌됐다.유가족 23명이 참석했고, 미사는 유경촌 보좌주교를 비롯한 서울대교구와 안광훈 신부(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등 수도회 사제 30여 명이 공동으로 집전했다. 이 자리에서 유가족들은 이날 미사 봉헌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했고, 진상규명까지 함께해달라고 호소했다.편지로 마음을 전한 희생자 김지현 씨
나는 봤어!여수 서 시장, 두부 공장 하던 23살 김영민 14연대 두부 납품했단 이유로 아침에 잡혀갔어! 48년 시월 20일, 빨갱이라니. 두부가 뭔 죄, 두부에서 빨간 물 나오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어 두부에서도 사상이 흘러나와?외세는 즉각 물러가라토지를 재분배하라무상몰수 무상 분배가 오로지 답이다.우리는 동족상잔을 거부한다. 14연대에 합세, 학생들 시민들 시가행진 참여했어 당시 나는 5학년, 주먹밥 나르던여학생 누나들도 많이 죽는 거 나는 봤어!여수시 둔덕동 골짜기 입구에 들어가니진동하던 시체 썩는 냄새굴비처럼 한 두름에 7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30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100일 맞이 집중추모주간’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종교계, 청년단체, 정당 등 각계의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지 100일이 되는 2월5일을 하루 앞둔 다음달 4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추모대회를 연다고 밝히며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했다.이들은 ‘참사 100일 집중 추모주간’(1월30일~2월5일) 동안 용산 대통령실·정부서울청사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공부를 잘하던 이과생 채화가 갑자기 입시미술을 하겠다고 했다. 디자인 일을 하는 선배가 모교에 찾아와 해준
‘여기 자식을 잃은 두 어머니가 있습니다.’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과 산업재해 유족이 이런 제목으로 열린 대담에서 매번 반복되는 대형 참사와 산재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정부와 정치권을 규탄하고 연대의 목소리를 냈다.28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마포중앙도서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연대활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대담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지한씨 어머니인 조미은씨와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김용균재단 이사장)가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시민사회에 연대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날 박관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
라즈기르에서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장터에서 어느 어린 소녀가 물푸레나무가지인 것 같은 지팡이를 팔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 지팡이 하나만을 팔려고 앉아 있었다. 그 많은 군중에서 필자를 보더니 다가와서 50루피라고 외치면서 꼭 사가기를 바랬다. 우리 돈으로 800원이다. 별 생각 없이 사놓고 숙소에서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가 아주 단단하고 손에 쥐기에도 좋다.그전까지는 위 사진에서 보듯 대나무 깃발을 손에 쥐고 다니면서 지팡이 겸용으로 썼다. 대나무는 끝이 갈라져서 장기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소녀가 준 나뭇가지는 다르다. 단단
*편집자: 김초롱(32)씨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입니다. 는 김씨가 쓴 당시 상황과 심리 상담 과정, 이후 겪은 트라우마 등에 대해 차례로 싣습니다. 김씨는 사고 당일인 10월 29일 밤 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인파에 휩쓸렸지만, 행인이 난간으로 끌어올려 가까스로 구출됐습니다.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고위험 환자로 판정받았습니다. 1.선생님, 혹시 제가 만약에 살다가 또다른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떡하죠.선생님: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돌이켜보면 저는
행정안전부가 159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의 ‘재난원인조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실이 24일 취재 결과 확인됐다. 참사 발생 직후부터 시종일관 책임 회피로 일관하더니, 이제는 유사한 재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조사마저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이다. 재난·안전 주무부처로서 역할을 방기한 거나 마찬가지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책무를 이토록 가볍게 여겨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재난원인조사’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 제69조에 규정돼 있는 제도다. 행안부 장관이 재난이나
간호사를 꿈꾸던 딸에게...엄마가 보내는 편지 34화[영상] 밤새 일한 엄마는 또 분향소로 "그날도 지금도 국가는 없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야기] 꿈 많던 청년 조경철씨 잃은 박미화씨의 질문 "방치. 그날 국가는 없었어요. 그날도 방치됐고, 지금도 방치돼 있어요."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밤샘 식당 일을 마친 뒤지만 엄마는 잠을 마다하고 녹사평역으로 향한다. 국화를 든 엄마는 이태원 참사 ... 33화청년의 '무지갯빛' 블로그, 생전에 남긴 따스한 글들 [이태원 참사 희생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은혜 입은 사람’이란 뜻의 ‘한나’는 교회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엄마 이애란(51)씨는 한나가 그저 건강하고 순탄하게 자랐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엄마 이미영(58)씨는 스물여덟 도은이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줄 아이라고 여겼다. 야무진 딸이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기다
바라나시를 다녀온 후, 보드가야에서 가야(Gaya)거쳐 라즈기르(Rajgir)로 향한다. 라즈기르는 우리에게는 독수리를 닮은 영축산(靈鷲山)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곳이다. 국악으로 익숙한 영산회상(靈山會相)의 기원이 바로 이곳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던 장면을 그린 불교음악으로부터 영산회상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가야에서 라즈기르까지의 약 60km는 두 개의 산맥이 나란히 달리고 있는 사이에 길이 나 있었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으셨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이, 이 길은 산줄기를 따라 작은 마을들을 연결하고 있고 최단
이태원 참사로 아들 이지한씨를 잃은 아버지 이종철씨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참사 이후 집에서, 차에서 울기만 했다. 극단적 선택까지도 생각했던 그는 다른 유가족을 찾기로 했다. 옆 빈소에 있던 유가족을 먼저 찾았다. 그렇게 찾다보니 첫 모임 때 희생자 15명의 가족이 모였다.처음엔 ‘그냥’ 모였다. ‘그냥’이 아니게 된 것은, 유가족들이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고 나서다. 2022년 11월21일 유가족 20여 명을 만난 정 비대위원장은 “송구스럽고 죄스럽다”고 했다. 눈물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기자들에겐
저는 42년생 황영목이라 하고 부친과 삼촌 두 분을 잃었습니다.부친은 고 황동기 님이시고 삼촌 한 분은 고 황기수 님, 또 한 분은 황은수 님이십니다봉산 초교 2학년 때 여순 항쟁이 났지요종적 묘연한 아버지 찾아 어른들 모두 들과 산을 뒤지고 다녔는데어느 곳에도 아버지는 아니 계셨소사흘이 지났던 날, 저 혼자 집에 남아 있는 걸 보고 옆집 영희 엄마가함께 시장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소가는 길에 길가에 무엇인지 가마니에 덮여 있었죠 그래서혹시 하고 우연히 들췄던 가마니 밑에아뿔싸, 팬티만 입은 내 아버지 주검이 거기 있었소 48년 10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너무 좋아.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행복해.” 27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류영은 엄마 정미진(52)씨가 대학생활이 어떠
“정부가 하루빨리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를 밝히고,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분노의 마음을 담아 참석했어요.”(대학생 박예소씨·19) “이상민·오세훈·경찰청장에 대해 수사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윤석열 대통령은 잘못을 남에게 전가만 하는 건가요?”(김은주씨·45)겨울비가 내린 14일 오후 서울 곳곳에선 윤석열 정부를 향한 시민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인 목적과 요구는 달랐지만,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외면하는 정부를 비판했다.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시민대책
경찰청 특별수사본부가 73일간의 이태원 참사 수사를 마무리하고 13일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해 23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 가운데 구속 송치된 이들은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6명이다. 하지만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 윤희근 경찰청장은 모두 무혐의·내사종결 처분했다. ‘성역 없는 수사’는커녕 ‘윗선’에는 가닿지도 못한 채 수사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특수본 수사는 애초부터 경찰의 ‘셀프 수사’라는 지적과 함께 경찰청장, 행안부 장관으로 이어
캘커타에서 한달 가까이 걸어서 보드가야(Bodh Gaya)에 도착했다. 거리로는 약 500km. 부처님이 성불하신 곳이다. 부처님은 출가 결심 이후 숱한 고행을 하시다가, 고행을 벗어난 어느 시기에 보리수 밑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만인에게 깨달음의 길까지 열어주는 위대한 깨달음이었다.부처님이 성불하신 보리수가 있는 장소인 마하보디 사원으로 갔다. 짙은 안개의 사원에는 많은 승려들이 운집해있었다. 행사가 진행중이어서 부처님 당시 분위기를 회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그네로서는 멀리 한국에서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 그 자체
파도에 둥둥-얘기 섬 앞바다에 수장시켰다더니우리 집 앞바다에 아빠가 떠내려왔네! 파도에 둥둥-정말 죽은 건지눈으로 보지 않고 믿을 수 없더니눈으로 보라고 이렇게 왔소 파도에 둥둥-여수시 남면 유송리 대유, 선희와 선자네 바닷가1950년 4월 20일2주 전쯤 끌려갔던 아버지 배일동앞바다에 집 찾아왔네 파도에 둥둥-에고에고-내 새끼 에고 에고- 내 신랑그 높은 파도를 타고 타고 어찌 예까지 왔누포승 풀어달라고 이렇게 왔소큰 바다로 가지 않고집 찾아오시니 고맙기도 하셔라얼굴 함몰되어 알아볼 수 없고 나갈 때 입었던 네 아비 옷이다두 손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계속 쓸 사람.'(현진의 ‘브런치’ 발췌) 작가로 살고 싶던 서른 살 박현진의 자기소개는 이 문장 하나로 충분했다. 글쓰기 플랫폼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2022년 7월, 강원도 강릉의 여름은 예뻤다. 첫딸 산하(25)가 처음 계획한 가족 여행이었다. 엄마 신지현(51)씨와 아빠, 반
엄마는 투사가 됐다...“산처럼 든든했던 딸, 산하를 위해” 20화[영상] 딸의 빈방, 아빠는 답 얻었다... 이제 대통령에 묻는다(23.01.08 18:14)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야기] 주저하지 않던 이주영씨의 삶, 그렇게 살려는 이정민씨의 다짐 아직 그대로인 딸의 방, 그리고 딸의 사진. 그 앞에서 아빠는 묻는다. "주영아, 아빠가 나서는 게 맞을까?" 아빠는 다시 자문한다. "딸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답을 얻은 아빠는 이제 대... 19화[영상] '정의' 새겼던 육아일기..
윤석열 입이 몹시 거칠어진다. “전쟁 불사”와 “확전 각오”를 주저 없이 내뱉는다. 전쟁이 터지면 자기와 군 지휘부는 지하벙커에 피신하면 되겠지만, 나머지 국민은 어쩌라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의무를 지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해야 할 대통령이 전쟁을 부추기며 국민을 개죽음으로 내몰겠다는 말인가.김정은과 기 싸움이나 ‘겁쟁이 경기 (chicken game)’를 벌인다 해도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배짱이나 깡다구 좀 있어도 잃을 게 많으면 지게 돼있다. 2018년 북한 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핵단추”를 가졌다고 큰소리치던 트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와 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유진아, 네가 결정해.” 최유진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엄마 서미정(50)씨는 줄곧 말했다. 미정씨는 2000년 11월13일
허 씨의 증언! (희생자 고 김영도 님의 사연)나도 30이 안 되는 청춘이었지라73세 유복자 김일수의 아버지, 김영도는 당시 26세여똘똘한 사람이었지 1949년 12월 27일여순 항쟁 발발 1년여가 지나고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순천시 서면 지서로 나도 같이 연행당했소다음 날 지서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로30여 나문 사람들 함께 끌려갔지그렇게 여러 명인데 왜 항거하지 않았느냐고당장 총구멍이 불을 뿜을 것인디그때 그 자리에 있어 보질 않았으문 말을 말더라고일제 36년에 길들은 사람들은굴비처럼 포승에 묶여 질질 끌려갈 때 벌써진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