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선전 22반구동 울산여중 앞 우리 분식 집은 나름 선전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이 장사가 잘 되자 여기 저기에 분식집이 생겨났다. 어머니도 새로운 호떡 맛을 내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며 새로운 레시피를 익혀 이겨내었다. 겨울에도 늘 시멘트 바닥에 서 있어야 해서 동상에 걸릴 지경이었지만 더 힘든 것은 아버지의 몸이 다시 악화된 것이다. 아버지는 부산 백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서울에 있어 잘 내려가지 못하고 어머니, 수동이, 여동생 명이가 병원과 가게를 돌아가며 지켰다. 어느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병실 동료들에게 "제가 홀아비가 아
신봉선전 21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때 '만화방 가지 말자' 포스터를 그려야 했던 내가 아버지께 "우리 집도 만화방 말고 문방구 같은 거 하면 안 됩니꺼" 했었는데 우리 집이 문방구를 하게 된 것이다. 두 분이 만화방을 접고 부산을 떠나 울산 삼풍아파트에 잠시 계시다가 수입이 없자 현대중공업 근처 전하초등학교 앞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하셨다. 울산대 국문과에 들어간 수동이가 열심히 도와 문방구가 잘 되었고 또 어머니가 분식집을 차려 역시 잘 되었다. 아버지가 친척 기동이 형님이 죽자 죽어도 고향 땅에서 죽고 싶다 하여 울산여
신봉선전 20내가 휘문고교와 중경고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초갑질 출판사와 싸웠다. 아버지는 버릴려던 책과 팔지 않고 모아둔 만화책들을 다시 꺼내(새로 자라난 아이들에겐 새 책이다) 다른 만화방에 싸게 풀었다. 어머니는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어묵, 라면, 김밥, 팥빙수를 팔았다. 장사가 잘 되었다. 결국 출판사 쪽에서 사과하고 다시 책을 골라 살 수 있었다. 2년이 걸렸다. 그 싸움의 후유증이었을까. 어머니는 하루 3시간밖에 주무시지 못하는 과로에다 연탄불로부터 올라오는 연탄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신봉선전 19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서 잠시 화실을 하다가 서울 휘문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했다. 준비물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준비물 없이 밖으로 나가 종이비행기를 접어 언덕에 올라가 저 아래 정신여고를 향해 던지라고 하였다. 대개는 바로 앞에서 꼴아 박혔지만 가끔은 멀리 멀리 가는 것이 있었다. 30여 년이 지나 아이들이 사은회를 했다. 선생님들과 기념 사진을 찍을 때 '하나, 둘, 셋!' 펑하는 소리와 동시에 모두가 나에게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휘문고에서 하도 이상한 수업을 해서 쫓겨났지만 이은 중경고에서는 규모있게 수업을 하고
제50회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정기전인 '한국 바티칸 외교 수립 60주년 기념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 전시회는 'Gallery 1898'(명동성당 지하 1층)에서 지난 6월 14일에서 6월 22일까지 열렸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남북의 대치 상황이나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전쟁과 기아, 한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를 봐도 가혹한 모습만이 보인다. 너무도 힘든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메말라가는 영혼의 삶의 여정에 '빛 - 영혼의 숲'에서 평화의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신봉선전 18동생 수동이가 군대에 갈 때 나는 담배를 사 주며 잘 갔다 오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수동이에게 면회 오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집은 가겟집이기 때문에 휴일이 없었다. 일요일이나 추석, 설날, 공휴일에는 아이들이 더 많이 오기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내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아버지 어머니 모두 오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 군 면회에 못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인사를 하고 보낸 뒤 화장실에 가서 우셨다. (2000년경 그림)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시중에 사재기로 인해 소금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다 소금이 곧 金값보다 비싸질 전망이다.왜? 지금 소금도 마음대로 못 먹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일본이 130톤이 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바다 방류가 초읽기로 들어간 모양새다.방류 시 오염수가 안전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부터 먼저 마셔보시라!방사능 오염수가 방류될 때 생존을 영위해야 할 사람들과 수많은 어종에서 닥칠 잠재적 재난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바다는 인류의 우물이다. 누가 감히 이 우물에다 방사능 독을 풀으려고 한단 말인가?"땅은 옮겨도 우물은 옮길 수도
신봉선전 17더운 날 학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재동아, 덥제? 빙수 하나 갈아 줄까?" 하시며 빙수를 시원하게 갈아 주셨다. 언제나 웃으시는 어머니. 그래서 나는 우리 어머니는 성격이 참 좋으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 말씀은 달랐다. "너그 아버지는 환자라서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하고 너그는 아버지 아프시고 또 만화방 떡볶이 장사한다고 위축될까 봐 웃어야 했지. 그래서 '주부는 가정의 등불이다. 주부가 어두우면 온 가정이 어둡다'고 생각하고 늘 웃었지" 아하 그랬었구나. 어떻든 93세 어머니는 지금도 늘 웃
신봉선전 16막강한 합동출판사가 모든 책을 다 사지 않으면 책을 끊겠다 하고 초 갑질을 시작할 때 당시 만화방을 봐 주던 우리 할머니가 만화 배달하던 황 씨한테 만화를 달라고 하니까 할머니를 밀쳐 버렸고 그걸 본 아버지가 이럴 수가 있냐고 하자 황 씨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밀어 던져 크게 다칠 뻔했다. 이를 본 어머니가 "니가 뭔데 내 청춘을 다 바쳐 살린 분을 이 더러운 손으로 치냐 이 개만도 못한 놈아!" 하며 세차게 뺨을 때리며 자전거에 실린 만화책 수백 권을 모두 길에다 흩어 버렸다. 황 씨는 문예당 기집에게 뺨 맞았다고
신봉선전 15아버지는 주로 만홧가게를 보시고 어머니는 떡볶이, 어묵, 팥빙수, 도넛 등을 파시고 복합문화공간의 황태자인 나도 조금씩 도우면서 그런대로 장사를 잘 해왔다. 교사 출신 아버지는 만화방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고 등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학교는 물론 텔레비전에서도 '사회악 근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학부모들이 만화책 태우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어떤 학부모는 아이가 빌려온 만화책을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찢었다. 그러나 "만화가 왜 나쁩니까? 나쁜 짓 하라고 가르치는 만화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
신봉선전 14결국 우리 집은 만화방에다 풀빵, 팥빙수, 어묵을 파는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당연히 나에게는 군것질을 실컷하고 만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행운의 환경이었다. 어머니는 막내 명이를 업고 아버지 약 달이고 팥 삶고 밀가루 반죽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빵 굽고 빙수를 갈았다. 아버지는 만화방을 보셨다. 아침이면 깡통 든 거지 소년이 문 앞에 딱 붙어 있고 북한에서 단신으로 내려 온 청년은 석유통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석유요 석유"를 외치며 팔다가 십 원 하던 풀빵 네 개로 점심을 때웠다. 넝마주이도 많았는데 한 넝마주이 부부
신봉선전 13아버지는 결국 부산의 철도 병원에 입원하셨다. 병명은 간경화였는데 집에서 치료하라고 하여 어머니는 고민하셨다. 이대로 고향에 가면 땅 팔아먹는 일밖에 없다. 전포동에서 세 든 집이 만홧가게였는데 주인이 서울 간다고 인수하라 하여 인수하였으나 만화방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누가 쌀가게도 하라고 해서 해보았지만 쌀장사는 됫박을 속이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철길가에서 하는 풀빵 장사를 보고 저건 할 수 있겠다 하여 풀빵 기계를 들여다 시작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하여 연탄 배달도 겸하였다. (2000년경 그림
신봉선전 12아버지가 퇴직한데다 약값이 계속 들어 울산 시내 가서 약과 반찬을 사고 나니 범서의 집까지는 너무 멀어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비가 없었다. 차비를 빌리러 나의 진외가(아버지의 외가)에 갔더니 거기 조카가 자기 엄마한테 돈 달라고 하자 "먹고 죽으려 해도 돈은 없다"라는 말을 듣고 차마 돈소리를 못하고 친정에 갔더니 외할매가 아파 누워서 "박 서방 아픈데 박 서방한테 잘 해래이. 잘 해래이" 역시 차마 돈 얘기 못 한 채 아이 업고 4시간을 걸어오는데 업힌 수동이는 삼베 저고리가 꺼끄러워 아파 울면서 '차 타고 가자 차
신봉선전 11아버지는 제대 후 범서국민(초등)학교로 부임해서 학교 근방 개울 건너 작은 초가 곁방에 세 들어 살았다. 동생 수동이는 3살. 그때는 전쟁 직후라 제대 후에 한 달간 재교육이 있어 아버지는마산 훈련장에 재교육을 갔다 오셨다. 깔끔한 아버지에게 훈련소는 너무나 더러웠다. 게다가 학생들 진도가 너무 떨어져 한 달간 못 나간 것에 새로 해야 할 수업을 더 해 두 배를 해야 했기에 과로로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어버지를 퇴직시켰다. 군대도 두 번 갔다 오고 공무를 충실히 하려다 병을 얻었건만 보상은커녕 쫓아
신봉선전 10드디어 아버지가 제대하셨다. 할머니는 5년이나 근무했는데도 제대할 때 카투사에 근무해 자기들보다 편했다고 자대에서 솥뚜껑을 입에 물려 운동장을 기어서 돌게 했다고 할머니는 군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분노했다. 오랜 시간 아버지 없는 시기를 보내 아버지와 살갑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오시니 꽉 찬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옛날 모두 한집에 살던 대가족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살갑게 만나는 일도 눈치가 보여 쉽지 않았다. 사랑채에서 소죽을 끓이려 불을 때고 있는 아버지가 다섯 살배기 나한테 저기 안 채 부엌에서 밥짓는 어
2023 세계혁명예술 특별기념전이 아래와 같이 열리고 있다.1. 일시 : 2023년 06.02~06.15까지2. 장소 :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전시실3. 주제 : ‘혁명, 그리고 혁명 그 너머의 것들에 대하여올해로 동학 농민혁명 129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미술작가 52명을 초청한 동학농민 특별미술전을 진행하고 있다. 혁명의 미술과 함께하는 이 자리는 국제포럼과 전시를 통해 미술인들의 주체적인 역량과 역사 주체를 가지고 대중과 소통하는 문화의 장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이번 전시에서는 설치미술, 판화, 회화 등 전국 52명의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신봉선전 9우물에서 빨래하는 어머니를 보고 휴가를 오는 아버지는 "아주 촌닭이 다 됐군" 하셨다. 어른들은 두 살 나에게 "아버지 반갑습니다" 하라고 시켜서 그렇게 했는데 가실 때도 똑같이 해서 모두 웃었다.어머니는 서울 가면 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반대하는 할배의 만류를 무릅쓰고 서울 뚝섬에서 하숙하며 한 달간 지냈다. 네 살 그때 나는 헬기를 땅에 그려 보면서 내가 화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5년 복무기간을 끝내고 아버지가 오셨다. 옛날 사람은 대가족이라 어른 앞에서 자기 처나 자식을 먼저 살가워하면 흉이어서 나를 안아
신봉선전 8나는 아버지 입대하신 후 1952년 초겨울에 태어났다. 전쟁 중이라 어머니는 나날이 걱정이었다. 대신 아버지는 자주 편지를 썼는데 매주 어머니께 1장, 할배, 할매께 1장, 그리고 외할배, 외할매와 외삼촌들에게도 가끔 편지하셨다. 눈물 뚝뚝. 어머니는 남편 없는 고달픈 시집살이를 아버지의 편지로 견뎌 내셨다. 참 이상하게도 나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대학 시절. '아버지 가을입니다. 태능 배밭 위로도 달이 떴습니다. 저 상큼한 배를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하숙비가... '로 귀결되는 속칭 '아
신봉선전 7전에 얘기한 대로 아버지는 6.25가 나자 학도병으로 갔다가 부대가 괴멸되어 귀가했으나 군번이 없다 하여 다시 입대하였다. 전쟁 중에 어머니는 뱃속에 나를 품은 채 아버지를 전선으로 보내야 했다.아버지는 제주도 모슬포 훈련장에서 훈련받았는데 훈련소 밥이 너무 적어 견딜 수가 없자 할매가 송아지를 팔아 가서 돈을 주어 피엑스에서 음식을 구해 그나마 영양을 보충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한다고 하여 카투사(KATUSA : 주한미군 한국군 지원단)에 배속되었고 후에 내가 4살 때 엄마와 함
신봉선전 6외갓집에서 결혼식을 한 어머니는 시댁 우리 할매랑 친척에게 인사드리러 가는데 버스가 없어 수소문하여 미군 지프를 타고 시댁에 갔다. 어머니는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면 '새벽에 마당을 쓸면 거름이 한 소쿠리다'며 할배의 며느리 사랑이 극진했다. 그러나 친척 아지매가 우리 또출이 고모에게 '너그 올케(어머니)한테 잘하래이. 선비딸로 곱게 자라 깡촌에 시집와서 시누 많제, 시엄니시 벨나제 얼마나 힘들겠노"라고 한 말이 우리 어머니가 아지매에게 고자질 한 거로 우리 할매가 듣고 엄창난 난리의 태풍이 불기도 하였다. 그
신봉선전 5중학교는 중퇴했지만 어머니는 부지런히 집안일을 잘 도와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다. 외할배는 당신이 없을 때 손님이 오면 '아버님은 출타중이시라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라고 시켰다. 당시 보통 처녀들은 손님이 오면 숨어버릴 때였다. 이 교육으로 어머니의 인기는 엄청나게 높아져 사방에서 중매가 들어왔으나 외할배가 모두 퇴자 놓았다. 그런 중 우리 큰 할매가 중매를 섰는데 교사 발령 대기 중이라는 청년이었다. 선을 보러 왔을 때 어머니를 물동이를 지고 지나가게 했다.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
신봉선전 4.아버지 이름이 뭐꼬? 신경일입니다. 불합격! 국민학교(초등학교) 면접 시험에 본명인 신임섭은 모르고 친구들이 부르는 자(字)를 말했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합격해서 다닌 다음 야간 중학교에 진학했다. 담임 선생님이 총명하다고 이뻐하자 질투한 반 여자아이가 가짜 연애편지를 써서 교탁 밑에 두었다가 난리가 났다. 나중에 알고는 마을 이장을 하는 그 아이 아버지한테 찾아가 "자식도 못 다스리면서 마을을 다스리냐"고 따지고 그 아버지는 싹싹 빌었다. '봉선이는 공부를 하면 시집 안 갈 거다'라며 외할배가 걱정하는 중에 남녀공학이
신봉선전 3.신임섭 우리 외할아버지는 사람들 이름을 지어 주고 날을 받아 주거나 묘터를 잡아 주기도 하였지만 선비로서 해야 할 도리도 다하였다. 일제시대 공사용역을 나갈 때 마을 사람 하나가 사정이 생겨 못 나가자 대신 나갔으며 콜레라가 창궐해서 한 마을이 거의 몰살되어 장례 치를 사람이 없자 가면 죽는다는 만류에도 "선비인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노" 하면서 장례를 다 치렀다. 그런 선비도 평소엔 일을 해야 해서 하루는 외할배가 어린 어머니를 데리고 소 등에 장작을 싣고 팔러 갔다. 사탕 사 먹으라는 돈으로 가게 앞에 섰을 때, 세
어머니 신봉선 전 2.어머니의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는 시골의 선비로서 이름도 지어 주고 날도 봐주는 마을의 카운셀러이자 멘토이셨다. 어린 어머니가 밤에 화장실을 가다 보면 외할머니와 두 분이 시를 한 구절씩 서로 외워 가며 얘기를 나누셨다. 친구들과는 "향기 좋다 찔레꽃은 덕이 꽃일레라" "네모졌다 감꽃은 봉선이의 꽃일레라' 라면서 꽃이름 놀이를 하며 놀다가 누구에게 시집 갈 건가 얘기도 했다. 그때는 운전기사, 마도로스 등이 인기였는데 어머니는 "나는 다리 하나가 병신이라도 정신이 똑바른 사람한테 시집가겠다'고 해서 다들 놀라
어머니 신봉선 전 1.어머니 얘기가 나왔으니 내친김에 어머니 얘기를 하고 싶다. 신봉선. 1931년생 어머니는울산 오정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시골 선비의 딸로 남달리 부지런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을 해서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할까 하는 깜찍한 생각을 하는 아이.소를 먹이러 간 김에 나뭇가지를 주워 머리에 이고 치마에 싸서 오는 아이. 한 번은 외할머니가 어린 어머니에게 먼 산 너머에 심부름하고 오면 명태 대가리를 준다고 했다. 혼자 가는 먼 길.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다. 무섭다. 명태 대가리만 생각하고 앞만
투사의아내, 어머니아버지가 '무조건 다 사지 않으면 만화책을 주지 않겠다'는 초 갑질 합동출판사의 횡포에 맞서 외롭게 싸움을 계속했지만 새 책이 아닌 헌 책으로 계속 싸우기가 힘들었다. 어머니가 나섰다. 출판사 시키는 대로 하는 만화구역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가셨다."여러 구역장님들 수고 많으신데 저는 남편도 환자고 또 오늘도 돈은 없는데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에게서 하숙비 보내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강 백사장에 혀를 꽂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들에게 책 달라 소리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해 보십시오"
전포동의 투사 아버지아버지는 교사를 하시다가 전쟁이 나서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는데 부대가 괴멸되어 걸어서 귀가했다. 곧 이어 다시 영장이 나와 또 입대해서 복무하고 교사를 하였는데 군대 재교육과 과로로 폐결핵에 이어 간경화로 부산 병원에 오면서 만화가게를 하게 되었다. 만화책을 처음엔 여러 출판사의 책 중 골라서 샀는데 어떤 사업자가 출판사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초 갑질을 시작했다. 책을 무조건 다 사라 아니면 책을 주지 않겠다고 선포하여 모든 만화가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굴복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불공정거래는 용납할 수 없다며
요배제주도에서 온 요배는 보석 같았다. 그때만 해도 제주는 먼 곳. 요배는 산호초처럼 신비스러웠다. 그의 깊고 검은 눈을 우리는 모두 사랑했고 홍명섭 선배는 아주 요배에게 반해 버렸다. 그림도 보석처럼 강하고 아름다웠다. 학교 뒤편 산비탈에서 나랑 둘이 자취했는데 화투를 쳐서 진 사람이 밥을 했고 건너편 언덕의 배용균이 물김치를 담아서 갖다주곤 했다. 한 번은 요배가 지나가는 말로 제주 사람들이 "낮에는 경찰에게 당하고 밤에는 산에서 온 사람들에게 시달리고"라는 말을 어른들 곁에서 들었다는 얘길 했다. 나는 그 말을 잊을 수 없었고
용균이 3배용균이는 공부를 무지 무지하게 많이 했다. 촬영 공부 완벽. 현상 공부 완벽. 조명 공부 완벽. 음향 녹음 공부 완벽. 모두를 대학 시절에 마스터했다.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완벽한 감독이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의 주인공 제의에 내가 잠수를 탄 것은 용균이를 만나서는 도저히 거절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를 꼬드겨 큰스님으로 만들고 길 가는 아이를 설득해 주인공 동승으로 출연시킨 용균이가 아닌가! 후속작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을 이제야 유튜브로 보았다. 보기가 편한 연출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앞뒤 못 가리고 돌진하는 무식, 무능력, 무대책, 무책임, 무자비, 무모함에 국민은 죽어간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