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석이 2방학. 시험도 거르고 부산으로 뛰어간 나는 어머니 품으로? 아니다. 상석이 집에서 밤새 회포를 푼 다음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에게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도 친하게 지내니까 상석이 어머니께서 내 한복 한 벌을 해서 우리 어머니를 찾아 오셨다. 어른도 인사를 해야 한다시면서. 그렇게 꿀 같은 방학이 끝나고 기어코 이별의 날이 왔다.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기 싫은 상석이는 기어이 그냥 고속버스를 타버렸다. 서울까지 내내 '친구야 친구야 내 친구야 어화 둥둥 내 친구야' 노래를 부르면서. 전화도 없었던 시절 그냥 행불자로 서울
갑배형갑배형은 부용형과 동기인데 나보다 한 학년 위다. 디자인 전공이었지만 가진 도구라곤 말라비틀어진 포스터칼러 몇 개. 꽁지 다 빠진 붓 두 자루가 전부였다. 비밀은 여학생 작업 도와주고 물감을 얻어 쓰는 것. 나하고 한 방에 하숙하였는데 신비의 궁합이었다.둘 다 절대로 방 청소를 하지 않는다. 담뱃재를 비닐 장판을 들고 안에 털고 꽁초도 거기 버린다. 방에 발 디디는 좁은 길이 하나 있을 뿐 사방이 다 쓰레기다. 그러나 마냥 행복할 뿐이다. 이런 인연이 다시 있을까? 갑배형은 지금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멋지고 깔끔한 작
열혈 청년 박재동언제나 한군데는 늘 바다가 보이는 부산에 살다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산으로만 막힌 서울은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도 답답해 기말시험도 거르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 고교 미술부 후배들에게 주겠다고 손수 태극기를 그려 가슴에 품고 고속버스를 탔는데 '브루라이트 요꼬하마'란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꺼!" 하고 소리치고 안내양에게 다가가 다시 "꺼!"라고 소리쳤다. "손님들이 찾아서요" 나는 손님들을 둘러보며 "해방된 지 26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정신이 썩었으니, 나라를 뺏기지!" 하고 소리쳤다. 아무도
용균이2용균이는 처음 만났던 대학 1학년 때부터 준비하는 영화가 있다면서 줄거리랑 연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었다. 용균이는 거기 주인공 젊은 구도자를 나로 찍었으니 나중에 출연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웃기만 했다. 15년쯤이 흐르자 "재동아 펀딩이 되었다. 영화 찍자"라고 하였는데 나는 잠수를 탔다. 이 영화에 출연하면 영화도 뜨고 나도 숀 코너리 정도로 유명해질 것 같아 피했다.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영화는 역시 훌륭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나는 시사만화가가 되었고 용균이는 지
용균이1나는 듣는 수업이 재미없으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나가 뒷동산 연못가로 갔다. 그러면 거기 또 한 명이 와 있는 것이다. 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란 영화를 만든 배용균이다. 둘은 죽이 맞아 심심하면 거기서 만나 용균이는 영화 이야기 (벤허를 80번 본 얘기. 고등학교 때 벤허 감독 윌리엄 와일러와 펜팔 한 이야기 등등) 나는 라이파이, 약동이와 영팔이 등 만화 이야기를 했고 늘 그렇게 늘 친해서 붙어 다니다가 하루는 내 방에서 날 보고 자기를 그려 보란다. 내가 슬쩍 "내 모델이 아무나 되는 줄 알아?
무꽃밧줄 당기는 남자의 땀에 짝짝 붙은 러닝의 등짝을 그리고 싶었다. 또 하나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꽃과 배추꽃이었다. 흙과 땀의 역사가 아프고 이쁘고 서럽고 사랑스럽게 한들거리는 이 땅의 흙의 노래. 우리 할머니의 노래. 나는 학교 뒤편 무꽃 밭에 이젤을 놓고 앉아 유화로 무꽃을 그렸다. 그때 요배 등 내 친구들이 와서 응원해 주었는데 특히 멀리까지 가서 물을 떠다 준 성진이의 정성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얀 무꽃 그림이 한동안 휘경동 작업실에 놓여 있었으나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리고 싶었던 등짝만 스케치로 남아
휘경동여관방 자취를 돈이 없어 못 견디던 중. 요배, 운봉이, 성진이 등이 자취를 하던 휘경동 건물 방에 같이 지내게 되었다. 바로 앞에는 돈이 없어 학원에 다닐 수 없어 혼자 흙 조소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만 연습하여 시험을 봐서 합격한 윤구가 살았고, 청량리에서 휘경동 갈라지는 언덕의 홍명섭 형 작업실에 가서 김민기 노래 '우리 부모 병들어', '가뭄' 그리고 '하루살이 이내 신세' 등을 들었다. 그런데 언덕길이라 밤새 달리는 시끄러운 트럭 소리에다 옆집 맥주홀의 싸우는 소리. 오직 밥 한 그릇에 마가린과 간장만 비벼서 먹어서 그
석이와 봄소식나는 서울로 와서 대학 생활을 하고 석이는 창녕으로 가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다. 봄소식이 왔다.재동아. 들녘에 나가 걸었다. 갈아엎은 밭둑길을 걸으니 노란 봄이 내 바짓가랑이에 가득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보고 싶다. 석아. 봄의 생기가 그립다. 노란 꽃 이파리가 그립다. 내게 노새 한 마리라도 있다면 내 눈물로 노새를 목 축이며 네가 있는 곳으로 채찍질 채찍질하겠네. 우리는 멀리 떨어져, 그래도 손을 잡고 글을 쓰자고, 예술의 길을 가자고 다짐했다.상석이는 전교조 국어 교사가 되어 해직을 감수하며 아이들에게 제대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부용 형어느 날 부산 친구 지수가 하숙집에 왔다. 그때는 밥 한 끼가 무서울 때라 2인분이 나오면 다음 끼는 밖에서 해결해 가면서 밥을 축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하숙집 주인은 친구가 밥을 축낸다고 역정을 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하숙집을 나와, 중학교 미술반 선배이자 대학 선배 황부용 형과 함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자취했다. 부용 형은 캔버스 살 돈 없는 나를 위해 대학 창고에 안 찾아 간, 주인 없는 유화를 갖다 주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게 했고, 배고파 물을 퍼 마시던 시절, 회식 자리에 갔다 올 때면 남은 탕수육
이중섭 전화가 이중섭의 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현대화랑이었던 것 같다. 그때 이중섭의 그림이 사실상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는데 나는 완전히 반해 버렸다. 루오처럼 검게 그리는 조선 청년이 나타났다고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루오보다 나았다. 루오나 서양에는 없는 '기운'의 흐름이 강력하고 매력적으로 생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삶과 요절 스토리. 그림을 보고 온 하숙집 선배들과 얘기. "예술가의 요절이라는 것이 본인은 안됐지만 우리에게는 삶에 여운을 주네요" 이에 즉각적인 나의 대꾸. "그건 관람자의 입장이고 당사자로서 나는
미팅꽃 피는 봄. 신입생들의 미팅이 시작되었지만, 미대는 원체 여학생들이 많아 누구도 미팅을 주선하지 않아 은근 아쉬웠다. 그런 차 미대 아닌 고교 동창이 멤버 한 명이 빠져 버렸다고 땜빵을 하라네. 얼싸 좋다고 갔더니 내 상대는 고려대 1학년이었는데 아주 귀여웠다. 첨이라 무슨 말을 해얄지 몰랐다. 그런데 친구 녀석들은 침을 튀기며 뻥을 치고 있지 않은가. 사기꾼 같은 넘들! 그러나 나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스케치북. 나는 준비해 간 스케치북을 펴면서 이야기를 하고 여학생들은 쏙 빠져들었다. 성공이었다. 그리고 집에 갈
한국의 아름다움 편집 : 김동호
서울 하숙대학 입학을 하고 명륜동에서 하숙을 했다.나는 생각보다 너무나 숫기가 없고 사투리도 신경이 쓰여 학교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특히 여학생들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때는 말을 높였다. 나랑 비슷하게 말을 하지 않은 동기 제주도 출신 강요배가 오히려 나았을지 모르겠다.먼저 온 선배가 설명하기를 서울은 종로 충무로 퇴계로, 세 길로 되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청량리나 노량진은 서울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길눈이 없어 길을 잃으면 무조건 서울역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찾아왔다. 점심도 하숙집까지 걸
상석이어머니가 내 합격 소식을 듣는 데는 이야기가 있다.고입 재수 시절 사귀게 된 상석이는 밤 늦게 도란도란 얘기가 깊어지다 헤어질 때는 서로의 집에 바래다 주고 또다시 바래다 주고. 또 안 되겠다면서 헤어질 결심을 하고는 서로 손에다 편지 쪽지를 전해 주었으니 친구라기보다 연인 같았다. 집에 찾아가서 없을 땐 서로의 일기장에다 글을 써 놓곤 했다. 대학 시험을 치르고 어머니가 만화 단속으로 유치장에서 나와 장사를 하는데 상석이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뛰어왔다. 그리곤 소리쳤다. "어무이 합격했습니더!" "오 그래, 축하한다!"
만화방 아들교사 출신인 아버지는 지역 만화방 정화위원장을 맡아 등교 시간에 학교에 안 간 아이를 학교로 보낸다거나 만화방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단속하셨다. 그러나 어린이날만 되면 만화책을 모아놓고 불태우며 박수치는 장면이 티브이에 항상 나왔고 어떤 학부모는 아이가 빌려 간 만화책을 찢으면서 "남의 자식 다 버리는 만화 장사 천년만년 해 먹어라"고 소리쳤다. 물론 떡볶이, 어묵도 불량식품이라고 단속했다. 내 대학 시험 발표날도 어머니는 단속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거리로
내가 버린다늘 여학생 이야길 하며 상석이 창근이 등과 탁구치고 친구 집에서 자며 그래도 나름 학과 공부와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입시가 코앞에 닥쳐왔다. 나는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어느 대학이든 상관 없었다. 그러나 홍익대는 등록금이 8만 원이라 도저히 못 가고 부산대는 미술과가 없었다. 가능한 곳이 2만 원 하는 서울대 미대뿐이라 거기밖에 길이 없었다. 덕길이가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내 그림을 가져가 보였더니 이런 선으로는 서울대 미대는 안 된다고 하여 몹시 불쾌하였다. 나는 내 선을 내 사랑과 진정을 다 하여 그어
야외 스케치우리는 행복한 순간의 그림을 자기 삶에서 몇 개는 갖고 있다. 내 경우 아련한 행복의 장면은 야외 스케치 장면이다. 그것도 스승과 함께하는. 우리는 가끔 캔버스에 이젤을 들고 주례로 하단으로 구포 쪽으로 야외 스케치하러 갔다. 구름에 따라 화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했다. 돌아올 때 국수, 라면과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선생님은 절대 권위적인 태도가 없으셨다.한 번은 같이 탁구장을 갔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 나는 훔친 탁구공을 슬쩍 보여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도 주머니에서 탁
미술 대회 출품작오늘 미술 실기 대회에서 그린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선 밖에 안될 것 같다. 그래도 출품하기는 아깝다. 미술 대회에서 그림을 걷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술 대회에서 그린 그림은 반환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멋진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당시 나의 일기)나는 어릴 때부터 미술 대회에서 상을 하도 많이 타서 그런지 상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 당시는 출품하고 나면 돌려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출품하지 않고 가져왔다. 후배 하나의 그림이 너무 좋아서 "너 절대 이 걸작 출품하지 마
아버지와의 2차전2차전은 극장 간판으로 시작되었다. 11살 때쯤이었나. 전포동 우리 집 근처에는 극장 간판을 그리는 집이 있었다. 페인트 깡통들이 널려 있고 화가는 모눈 금을 그어 놓고 최무룡, 김지미, 찰턴 헤스턴,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엄청나게 크게 그렸다. 나는 문간에 붙어 꼼짝도 안 하고 구경했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크면서 간판 그림엔 흥미가 사라졌는데 남포동 제일극장 간판은 너무나 잘 그리고 톤과 분위기가 있는 데다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보여 예술이었다. 아! 극장 간판도 예술이 될 수 있구나! 나는 아버지께 극장
예술가 하루는 아버지가 나에게 혹시 의대나 법대에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가난과 만화방이라는 직업으로 하도 천시를 당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셨겠지만 나는 아버지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예술가에게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인가. 의사나 판검사는 공부만 잘하면 되지만 예술가 하나가 탄생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온 삶을 다 바쳐 목숨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예술가의 아버지예요! 예술가는 왕보다 귀한 사람이라고요! 당시를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 의사나 판사는 잘못하면
우리 학교는 시골 촌놈들이 많이 왔다. 촌에서는 수재 소리를 듣는 넘들이 부산에 와서 어쨋기나 '을'이 되지 않으려고 죽을 둥 살 둥 공부하는 넘들이다. 아무 빽도 돈도 없는 애들이 판검사라도 된다면 설움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냐는 걸까. 물론 다른 가치 있는 꿈을 가진 넘들도 많았겠지만, 학교는 어쨌든 서울대에 몇 명 가느냐를 온 교육의 목표로 채찍질했다. 나는 얘들을 검은 옷을 입은 시체들이라 불렀지만 나보다는 훨씬 성실했다. 나는 농민의 손자에 도시 서민의 아들이었지만 뺀질뺀질하여 출세할 생각도 없이 예술만 추구하는
윤정희1960년대에서 1970대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 시대였는데 나는 윤정희를 가장 좋아했다. 묘한 매력과 품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일기장에다 사진을 붙여 놨을까. 그런데 40여 년 후 눈앞에 마주 앉게 될 줄이야.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를 만든 후 뒤풀이에서 나를 윤정희 씨 바로 앞에 앉혔기 때문이다. 나는 선물을 주고 싶어 얼굴을 열심히 그렸으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패하면 나는 그야말로 수많은 팬 중 한 명일 뿐이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천신만고 끝에 마음에 싹 드는 그림을 선물할 수
창근이 집재수하면서 만난 절친 상석이의 친구라 같이 친구가 된 창근이 집은 우리 학교 바로 밑에 있어서 자주 가서 놀았다. 우리들 장판 방과 다른 것은 창근이 집은 양옥집이어서 침대가 있고 큰 창이 있고 커튼이 있었다. 게다가 침대 위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다. 하얀 시트!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상석이와 나는 자주 하얀 침대에서 뒹굴면서 커피를 마시고 레코드 판으로 음악도 들었다. 쇼킹 블루의 '비너스' 사이먼 엔 가펑클의 '더 복서' '스카보로의 추억' 송창식 윤형주의 '웨딩케익' 등등. 어떤 날은 혼자 가
다대포바닷가를 그리다 보니 큰 캔버스가 필요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있는 게 아닌가. 일단 50호 되는 캔버스를 샀다. 그런데 돈이 공납금이었다. 어떡하지? 후배 준홍이에게 의논하니 "행요 저기 감만동에 가면 옛날 일본군 막사로 쓰던 막사가 있어요. 거기 임자 없는 바둑판이 엄청시리 널브러져 있어요" 그렇구나 그걸 갖다 팔면 되겠다. 그 무거운 걸 욕심껏 들고 나오는데 주인이 있었다. 이름표를 뜯기고 일주일 유기정학을 먹었다. 그렇게 마련(?)한 캔버스로 다대포로 가서 이젤을 펴고 멀리 조개를 줍는 아주머니를 그렸다. 그림 구경
바닷가의 소녀바닷가의 소녀를 그리는 꿈은 머지않아 실현되었다. 후배 준홍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다니곤 했는데 친척 동생 연희와 연화를 가끔 보기도 했다. 그날도 초등 6학년 연희와 4학년 연화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여기 앉으라 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려 내 방에 걸어 놓고 '어떻게 저렇게 잘 그렸을까', '저 그림을 그린 게 나라니!' 요렇게 봐도 좋고 조렇게 봐도 좋았다.엄마가 아기를 보는 게 이런 맘이리라. 내 그림 중에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었고 누워서 이 그림을 보는 게 나의 낙이었다. 다시 이렇게 사랑하는 그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