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겨레 신문 14면 중-하단에 "미 언론, 바이든에 '선거 위해 한국에 피해 주나?'~" 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는데, 기사 내용을 정리 하자면 다음과 같다. --------------------------------------------------------------------2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은...(중략)... 첫 질문에 나선 기자는 “경제에 관한 당신의 최우선 관심은 중국과 경쟁하면서 국내 제조업을 강화하는 것이지만 중국에서 반도체칩 생산 확대를 막
내가 버린다늘 여학생 이야길 하며 상석이 창근이 등과 탁구치고 친구 집에서 자며 그래도 나름 학과 공부와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입시가 코앞에 닥쳐왔다. 나는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어느 대학이든 상관 없었다. 그러나 홍익대는 등록금이 8만 원이라 도저히 못 가고 부산대는 미술과가 없었다. 가능한 곳이 2만 원 하는 서울대 미대뿐이라 거기밖에 길이 없었다. 덕길이가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내 그림을 가져가 보였더니 이런 선으로는 서울대 미대는 안 된다고 하여 몹시 불쾌하였다. 나는 내 선을 내 사랑과 진정을 다 하여 그어
야외 스케치우리는 행복한 순간의 그림을 자기 삶에서 몇 개는 갖고 있다. 내 경우 아련한 행복의 장면은 야외 스케치 장면이다. 그것도 스승과 함께하는. 우리는 가끔 캔버스에 이젤을 들고 주례로 하단으로 구포 쪽으로 야외 스케치하러 갔다. 구름에 따라 화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했다. 돌아올 때 국수, 라면과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선생님은 절대 권위적인 태도가 없으셨다.한 번은 같이 탁구장을 갔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 나는 훔친 탁구공을 슬쩍 보여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도 주머니에서 탁
미술 대회 출품작오늘 미술 실기 대회에서 그린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선 밖에 안될 것 같다. 그래도 출품하기는 아깝다. 미술 대회에서 그림을 걷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술 대회에서 그린 그림은 반환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멋진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당시 나의 일기)나는 어릴 때부터 미술 대회에서 상을 하도 많이 타서 그런지 상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 당시는 출품하고 나면 돌려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출품하지 않고 가져왔다. 후배 하나의 그림이 너무 좋아서 "너 절대 이 걸작 출품하지 마
아버지와의 2차전2차전은 극장 간판으로 시작되었다. 11살 때쯤이었나. 전포동 우리 집 근처에는 극장 간판을 그리는 집이 있었다. 페인트 깡통들이 널려 있고 화가는 모눈 금을 그어 놓고 최무룡, 김지미, 찰턴 헤스턴,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엄청나게 크게 그렸다. 나는 문간에 붙어 꼼짝도 안 하고 구경했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크면서 간판 그림엔 흥미가 사라졌는데 남포동 제일극장 간판은 너무나 잘 그리고 톤과 분위기가 있는 데다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보여 예술이었다. 아! 극장 간판도 예술이 될 수 있구나! 나는 아버지께 극장
예술가 하루는 아버지가 나에게 혹시 의대나 법대에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가난과 만화방이라는 직업으로 하도 천시를 당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셨겠지만 나는 아버지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예술가에게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인가. 의사나 판검사는 공부만 잘하면 되지만 예술가 하나가 탄생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온 삶을 다 바쳐 목숨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예술가의 아버지예요! 예술가는 왕보다 귀한 사람이라고요! 당시를 어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 의사나 판사는 잘못하면
우리 학교는 시골 촌놈들이 많이 왔다. 촌에서는 수재 소리를 듣는 넘들이 부산에 와서 어쨋기나 '을'이 되지 않으려고 죽을 둥 살 둥 공부하는 넘들이다. 아무 빽도 돈도 없는 애들이 판검사라도 된다면 설움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냐는 걸까. 물론 다른 가치 있는 꿈을 가진 넘들도 많았겠지만, 학교는 어쨌든 서울대에 몇 명 가느냐를 온 교육의 목표로 채찍질했다. 나는 얘들을 검은 옷을 입은 시체들이라 불렀지만 나보다는 훨씬 성실했다. 나는 농민의 손자에 도시 서민의 아들이었지만 뺀질뺀질하여 출세할 생각도 없이 예술만 추구하는
윤정희1960년대에서 1970대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 시대였는데 나는 윤정희를 가장 좋아했다. 묘한 매력과 품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일기장에다 사진을 붙여 놨을까. 그런데 40여 년 후 눈앞에 마주 앉게 될 줄이야.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를 만든 후 뒤풀이에서 나를 윤정희 씨 바로 앞에 앉혔기 때문이다. 나는 선물을 주고 싶어 얼굴을 열심히 그렸으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패하면 나는 그야말로 수많은 팬 중 한 명일 뿐이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천신만고 끝에 마음에 싹 드는 그림을 선물할 수
창근이 집재수하면서 만난 절친 상석이의 친구라 같이 친구가 된 창근이 집은 우리 학교 바로 밑에 있어서 자주 가서 놀았다. 우리들 장판 방과 다른 것은 창근이 집은 양옥집이어서 침대가 있고 큰 창이 있고 커튼이 있었다. 게다가 침대 위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다. 하얀 시트!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상석이와 나는 자주 하얀 침대에서 뒹굴면서 커피를 마시고 레코드 판으로 음악도 들었다. 쇼킹 블루의 '비너스' 사이먼 엔 가펑클의 '더 복서' '스카보로의 추억' 송창식 윤형주의 '웨딩케익' 등등. 어떤 날은 혼자 가
다대포바닷가를 그리다 보니 큰 캔버스가 필요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있는 게 아닌가. 일단 50호 되는 캔버스를 샀다. 그런데 돈이 공납금이었다. 어떡하지? 후배 준홍이에게 의논하니 "행요 저기 감만동에 가면 옛날 일본군 막사로 쓰던 막사가 있어요. 거기 임자 없는 바둑판이 엄청시리 널브러져 있어요" 그렇구나 그걸 갖다 팔면 되겠다. 그 무거운 걸 욕심껏 들고 나오는데 주인이 있었다. 이름표를 뜯기고 일주일 유기정학을 먹었다. 그렇게 마련(?)한 캔버스로 다대포로 가서 이젤을 펴고 멀리 조개를 줍는 아주머니를 그렸다. 그림 구경
2023년 4월 16일 오후4시 경기북부 행정중심도시 의정부시 행복로에서 세월호참사 9주기 추모문화제( 기억식 )이 개최되었다.이번 기억식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발생 후 의정부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33개 단체가 의기투합하여 구성한 ‘세월호참사를 밝히는 의정부대책회의( 이하 대책회의 )’ 주최로 지난 3월 1일 기억식 준비위원회( 강현욱 김혜영 박경아 송예인 엄지영 이규헌 이지수 이준규 이희주 정영희 정희성 진은정 최재은 하창범 ) 모집을 시작으로 4차 회의와 당일 오후 2시부터 3시 50분까지 최종 예행연습 과정을
바닷가의 소녀바닷가의 소녀를 그리는 꿈은 머지않아 실현되었다. 후배 준홍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러 다니곤 했는데 친척 동생 연희와 연화를 가끔 보기도 했다. 그날도 초등 6학년 연희와 4학년 연화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여기 앉으라 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려 내 방에 걸어 놓고 '어떻게 저렇게 잘 그렸을까', '저 그림을 그린 게 나라니!' 요렇게 봐도 좋고 조렇게 봐도 좋았다.엄마가 아기를 보는 게 이런 맘이리라. 내 그림 중에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었고 누워서 이 그림을 보는 게 나의 낙이었다. 다시 이렇게 사랑하는 그림을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바닷가의 소녀고2가 되었다. 신창호 선생님 화실에 나가고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 내가 죽기 전에 꼭 그리고 싶었던 그림 두 장이 있었다.한 장은 고향의 하얀 무꽃.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무꽃은 흙이 되어 일구어 온 할머니들의 땀과 한과 삶의 역사가 슬픈 노래를 안고 있다. 나는 그것을 기리고 기록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또 한 장은 이 스케치 같은 바닷가의 소녀. 소녀는 시원한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서도 묘한 환희와 함께 뭔가 약간의 근심이 서려 있는 듯한 얼굴. 무슨 근심인지는 나도 모른다.
꼴찌학교 미술실에서 그림은 쪼금 그리고 기타 뚱땅거리기. 수업 빼먹고 야외 스케치. 서로의 여학생 이야기로 지새다가 신창호 샘 화실에는 여학생이 바글바글해 더욱 재미가 더하여 결과가 있었으니 전교 꼴찌라. 아버님이 성적표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 "일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는 법이지"하고 학교로 불려 가셨다.그 뒤로 이건 너무하다 싶어 다시 공부했더니 어느 정도 복구가 되긴 했다. 후일 들으니 이장호 감독 아버님은 꼴찌도 힘든 거라며 롤렉스 시계를 풀어 주셨단다. 그 후 전국 꼴찌(음악가 안계섭)를 배알하게 되고 아예 시험을 거부한 고
여성들이 시작한다. -7.27 평택 우리 땅 평화 찾으러 가자!- 3월 1일 행사를 준비하면서 강조하고자 한 메시지는 ‘척양척왜’, ‘(선조들 말씀) 미국놈 믿지 마라. 일본놈 일어선다’라는 것이었다. 행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정전 70년이 되는 7월 27일에는 평택 미군기지로 가서 군기지 전체를 인간 띠로 에워싸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번 7.27부터는 분단을 해소할 생각이 전혀 없는 미국에 대한 도전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
신창호 선생님하루는 미술실에서 세형이가 '신창호 선생'이란 분이 있고 실력이 엄청 좋은데 화실에 남학생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비분강개했다. 훌륭한 선생이 계시는데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 목탄과 목탄지와 가재를 쥐고! 화실에 갔더니 선생님은 안 계시고 여학생들만 앉아 데생을 하고 있었다. 이젤을 펴고 무조건 그리는 거다. 나중에 선생님이 오셨지만 그림 그리고 있는 장면에서 쫓아낼 수는 없어 제자로 받아들이셨다. 내가 회비 낼 형편이 안 되는 줄 아시고 수제자로 삼아 화실 일을 돕게 하셨는데
초로고등학생이 되자 재수 시절 절친이 된 상석이와 건후, 셋이 문학동인을 만들고 동인지를 내었다. 제목은 초로(草露), 풀잎 이슬이란 뜻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왠지 이제 인생의 허무를 느껴야 할 것 같은 나이이기도 해서 상석이 할머니가 늘 불렀다는 노래에서 따 왔다. 슬프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 같도다. 둘은 시를 쓰고 나는 가리방을 긁고 단편 소설 두 개와 단문을 실었다.목조 건물 밖 파란 바다에 장난감 같은 배들이 안온한 평화를 이루고 눈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시체들이 칠판을 보고
4월 첫날 해뜨기 이른 시간 고즈넉한 나주향교 상읍례장에 24반무예시연단(이하 시연단)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새벽을 연다. 오후에 있을 장용영 24반무예 공연을 위해서 병장기, 대나무, 짚단 등 소품을 준비하는 소리가 향교를 지키고 있는 오백년 수령의 비자나무 잎사귀를 가볍게 흔든다.시연단 준비를 뒤로하고 근대 통한의 역사가 서린 나주읍성을 보고 싶은 마음에 길을 나섰다. 나주읍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천년고도를 지킨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나주목사의 집무처 금성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대문이 인마의 통로이며 물산의 유통 기능을 한 석축
미술반키가 커서 고등학교 교실 뒤쪽에서 보니 애들이 진정 학문을 사랑하여 공부하는 게 아니라 검은 옷을 입은 유령들이 출세하려고 칼을 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학교에서 미술반은 해방구였다. 우리는 그림은 30% 그리고 70%는 여학생 이야기 빼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선배들이 치기 시작한 기타를 배우며 잘 되지 않는 '로망스'를 뚱땅거렸다. 그러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 수위 아저씨에게 '테레핀' 하고 '린시드'를 사야 한다고 하면 뭔지 모르니까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수업 시간에 당당히 밖에 나가 그림 반 놀기 반을 했다.
강호의 고수들미술반에 들어오니 다른 학교 미술반과 묘한 우정도 형성되어 갔다. 미술대회가 열리면 그림을 어느 정도 그려 놓고 죽 한번 둘러본다. 그러다 발걸음이 탁 멈춘다. 고수다. 그렇게 어느 학교의 누구 누구라면서 경쟁심과 함께 깊은 동료애를 느꼈다. 교화가 그림을 그만뒀다면서. 그림 참 좋았는데. 승효상이도 그만뒀단다. 아깝네. 당시 제일 강렬했던 눈을 가진 친구는 안창홍. 철창에 갇힌 맹수의 불온한 눈빛. 창홍은 고교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했고 미술대학은 필요 없다고 다니지 않았으며 지금 누구보다 강렬한 자기 세계를
우리 동네고등학교 진학하였을 때 내 미의식은 오브제 미술까지 가 있었다. 추상은 물론이고 벽돌이나 판자까지도 그 자체의 질감과 그 미적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다. 중학 시절 미술 선생님이 명화 수집 방학 과제를 내어 미술실에 그림이 가득했고 그것을 모두 섭렵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그리던 중학 시절 경남여중 미술실에서 만났던 지수 덕분에 미술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는 도대체 오브제미술은 어림도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평범한 수채화와 유화를 그렸다. 어느 길이 나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 혼자였으면 아마도 현대미술을 했을
재수시절서면학원 재수 시절. 보니 여기도 세력 판도가 서면본토파, 통학파, 독서실파, 개인파 등이 있었다. 상석이는 본토파에 속해 있었지만 결국 나하고만 붙어다녔다. 학원 시설 개선하라는 시위도 주도했지만 불발로 끝나고 상석이와는 한 미인 여학생을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베트남전 소식밖엔 몰랐다. 남진의 히트곡 행진에 신중현곡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이 새 물결을 일으키고 우리는 허구한날 여학생 이야기에 섣부른 예술론을 얘기하며 재수시절을 보냈다. 위 그림은 내 고종사촌 대철
봄 끝집에서, 친구 집에서, 책상에서, 방바닥에 누워서 틈나는 대로 그린 내 생애 '끝' 글자를 쓴 첫 작품이다. 114페이지. 대개는 명랑만화 5페이지. 검술만화 7페이지. 전쟁만화 6페이지. 공상과학만화 8페이지... 그리다 보면 딴 작품이 생각난다. 스토리를 밀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아버지가 편찮으신 우리 집 형편. 내 사정 등이 어우러지고 소설 소나기도 섞이고 뭐 그렇고 그런 스토리다. 그러나 65년 전에는 내 친구 이상석 선생의 여동생 미정이가 다니는 경남여중을 한 바퀴 돈 나름 인기작이었다. 고입 시험을
의 공연에 초대합니다."종합예술단 봄날은노동의 존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나선 사람들입니다.특히노동과 여성 분야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노래로 위로하고 힘 북돋우며연대하는 모임입니다. 비정규직, 산업재해, 부당해고, 갑질, 성차별, 성폭력 등에맞서 싸우는 거리의 외침에 우리의 노래를 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합니다.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며, 봄날은 온다는 희망으로, 봄날이 왔다는 기운으로 함께 노래합니다." - 의 홈페이지 bomnal.kr 소개글 - 젊지 않은 나이지
봄이 왔습니다 (대단원)어느 날 새벽 황 씨 아저씨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는 길에 풍당이는 돌팔이네 집에서 도둑이 불을 질러 놓고 뛰어나오는 것을 보게 되자 정신없이 불을 끄고는 정신을 잃게 된다. 눈을 떠 보니 돌팔이 삼촌인 면장과 두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와 은주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 은주는 풍당이가 받지 않았던 크레파스를 줄 수 있게 되고 돌팔이는 질투심에서 모함을 했다고 고백하고 면장도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풍당이 아버지가 서류를 훔치고 불을 지른 면서기를 붙잡아 와서
봄은주는 풍당이에게 크레파스를 선물하지만 은주의 삼촌(면장)이 사 준거라고 하자 내가 거지냐 한다. 은주는 울며 뛰어간다. 풍당이는 돈을 훔쳐 갔다는 돌팔이를 고자질하지 않고 자기가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느낌을 안 선생님은 자신이 돈을 대신 돌팔이에게 주고 풍당이에게는 돈을 훔친 벌로 반 나무창고에 나무를 해 놓으라고 한다. 그리고는 당신이 몰래 나무를 해서 나무창고에 채워 놓는데 우연히 그것을 본 여자반 신경주 선생님은 생각에 잠긴다. 아이들에게 두 선생님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중졸 재수시절 만화)편집 :
내 가슴에도 봄이 3여자반 신경주 선생님께 걱정 마시라고 하였지만 어머니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막막한 풍당이가 걱정 속에서 집으로 가던 중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사실 소녀는 풍당이를 만나기 위해 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반가웠다. 소녀의 이름은 은주. 풍당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도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며 몸이 약해서 삼촌댁에서 휴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삼촌이 누구냐고 하니까 이곳 면장이라고 한다. 면장이라는 말을 듣자 풍당이는 듣기 싫다며 집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