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헌(86, 옥천읍 하계리)

가훈(家訓)을 '정직, 노력, 사랑'으로 정했다. 2011년 옥천군 성실 납세자로 선정되며 가훈 액자를 만들어준다고 제안을 받은 것이 숙고 끝에 가훈을 정한 계기가 되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鎭憲'인데, 이름에 법이 들어간 덕분인지 비교적 질서를 준수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후손들도 정직과 노력을 뿌리와 줄기로 삼아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정직과 노력의 뿌리와 줄기 위에 사랑의 꽃과 열매를 가득 피워내길 바란다.

▲ 김진헌씨가 자택 거실에서 손자 이야기를 꺼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가 앉아있는 뒷편 벽에는 손자들과 3대가 모여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조실부모, 뿌리 없는 나무의 아픔

나는 1932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샘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김규현)와 어머니(곽옥남)는 3남3녀를 낳았는데, 그 중 나는 넷째였다. 위로 누님 두 분, 형님 한 분이 있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이후 지난 삶을 정리하는 작업을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중도에 포기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적으려니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모든 어려움의 원인은 조실부모(早失父母)였다.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 절감했다. 아버지는 해방 두 해 전에, 어머니는 전쟁이 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내 나이 11세와 18세 때의 일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시던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교육이 전면 금지됐다. 학교에 오면 일본어만 써야 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완장을 찬 6학년 선배들로 하여금 우리가 조선어를 쓰는지 감시하고 밀고하게 만들었다.

'완장'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한글을 배우려는 열정까지 막지는 못했다. 나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몰래 한글을 배웠다. 아버지가 한학을 하시는 바람에 초등학교 1학년 때 '천자문'도 떼었는데, 어머니가 책거리 기념으로 떡을 해주셨다.

1950년 일어난 전쟁은 청년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양친을 잃은 18세의 나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사지로 뛰어들었다. 만약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그 시절에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군 소속인 방위군과 경찰 소속인 특경대에 차출돼 각각 1년 6개월씩 근무했다. 군번은 물론이고 보수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면이나 지서에서 부르거나 지시하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20세 전후의 나이에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나는 토벌대 소속 병사로 충북과 충남은 물론이고 강원도까지 가봤다. 옥천과 금산 경계에 있던 서대산 토벌 작전에 동원돼 열흘 넘게 지내다 돌아온 기억도 있다. 빨치산이 옥천경찰서를 습격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나라가 시키는 대로 3년을 보냈는데 1953년 1월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그리고 군에서 다시 5년 6개월을 사병으로 복무했다. 춘천에 있는 병기부대에 배속되었는데 부품과 공구 항목이 1천200가지가 넘을 정도로 복잡한 업무였다. 빠르게 적응한 내가 그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자 마땅한 후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전역을 2년이나 미루었다. 이것 또한 요즘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내 가슴 설레게 만든 노인의 한마디

▲ 김진헌씨

그럼에도 입대 직후 60일 동안 신병 훈련을 받았던 논산훈련소 시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교관들이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완력도 갖췄다"면서 나를 신병 360명을 통괄하는 29연대 2중대 향도로 선발했다.

다수의 사람을 통솔하면서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던 두 가지 변화를 실감했다. 첫째, 구성원 개인이 저지른 잘못도 향도인 내가 책임져야 했다. 둘째, 육군사관학교와 좋은 대학을 나온 장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잘했던 나는 그들에게 탁구를 가르쳐주며 가깝게 지냈다. 당시 자연스럽게 습득한 '책임감'과 '사교술'은 내가 나중에 사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병기부대에 배속 받고 악몽 같은 일도 겪었다. 부산까지 화물을 호송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청량리역에서 레일이 고장 나는 바람에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 화물을 점검해보니 엔진 2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만 해도 역전 주변에 도둑이 들끓던 시절이었다. 경비 소홀 책임으로 영등포 헌병대와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 법무과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최악의 불운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일뿐이었다.

과거의 시간 중 어떤 하루는 어제의 일인 것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춘천 병기부대 657 중대에 배속된 후 허락된 첫 외출이 나에겐 그런 하루였다. 잔뜩 각을 세워 멋을 부린 하얀색 카키복을 입은 나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나에게 가장 가서 보고 싶은 장소는 동물원이 있는 창경원이었다. 그림책으로만 봤던 호랑이와 사자를 직접 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문제는 여비였다. 나는 한 달에 두 번 지급되는 시레이션을 먹지 않고 보관했다가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다. 동대문역에 내려서 창경원까지 걸어갔다. 동물원 입구에서 할머니들이 떡과 국수를 팔고 있었다. 국수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동물원을 구경했다. 구경을 마친 나는 다시 동대문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중간쯤 왔을 때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노인이 손금과 관상을 보아주고 있었다. 오후 8시까지 귀대하려면 발길을 서둘러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줄을 섰다.내 손바닥과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젊은이 지금까지 고생 많이 했지? 이제 고생은 끝났네. 자네는 말년 운이 아주 좋아. 앞으로 복이 찾아올 테니 열심히 살게."복이 찾아올 거라는 노인의 한마디에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내 인생에서 그림자가 걷히기 시작했다.

▲ 젊은 시절의 김진헌씨.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움켜쥔 내 땅

26세가 되던 1958년 전역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님이 하고 있던 갈포 사업을 돕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형님은 서울에 있는 한 무역회사의 의뢰를 받아 칡껍질을 섬유로 만드는 갈포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일했더니 1년 만에 업계에서 "김진헌이 만든 물건이 좋다"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무역회사 사장도 "젊고 일을 잘 한다"면서 자꾸만 일을 맡겼다. 2년 만에 옥천 주변 4개 군을 지휘하는 경영 책임자가 됐다. 나중에는 경북, 경남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어 경북의 풍기, 영주, 안동과 경남의 산청, 함양, 거창 등에 가서 몇 달씩 지내곤 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자 28세가 되던 해인 1960년 결혼해 가정도 이루었다.

1964년은 나에게 복(福)과 운(運)이 넘쳤던 해였다. 경남에서 다른 사업자보다 2배의 성과를 냈다. 서울 본사에서 격려 차원으로 일제 자전거 5대를 보내왔을 정도다. 당시는 송금이 안 돼 본사에서 직원이 직접 대금을 담은 자루를 지프차에 싣고 왔다.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으로 그 돈을 국민은행 거창지점에 예금하러 갔다. 처음에는 겉모습만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던 직원들이 사정을 알고는 안색이 바뀌며 칙사 대접을 했다.

남들보다 좋은 성과를 냈던 비결은 겸손과 정직이었다. 갈포 제조 현장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40~50대의 책임자를 두었는데, 항상 예우를 갖춰 대우하고 노임도 속이지 않고 제때 지급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자 스스로 알아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높은 성과로 연결됐다.

▲ 김진헌씨의 젊은 시절. 사진 뒷줄 왼쪽이 김진헌씨.

당시 내가 어느 정도 돈을 모을 수 있던 비결은 절약과 성실이었다. 지속적 성과를 내자 서울 본사에서 상무급 대우를 해주었다. 예컨대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장을 가면 특급열차, 3성급 호텔 등 회사에서 정한 기준의 비용이 현금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야간열차을 타거나 하숙집에서 묵었다. 아낀 돈은 모두 저축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구읍에 처음 1천평의 땅을 샀을 때 일이다. 등기부가 나에게 넘어온 날 저녁 아내와 함께 새로 산 땅을 보러 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흙을 어루만졌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고향에서 돼지를 키워가며 마음을 모아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고생 많았네. 이게 바로 우리 땅이야."마침 그해에 첫 아들 승룡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내가 나중에 고향에 창업한 세림주택(현 세림건설)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는데, 모두 대학을 보낼 수 있던 것이 자랑스럽다. 자식들은 이화여대, 외국어대, 중앙대 등을 다녔으며 동경대 박사도 배출했다. 특히 가업을 이어받은 장남 승룡(55, 현 옥천문화원장)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2남3녀 자녀가 다시 7명의 손자와 3명의 손녀를 낳아주었다. 장손 상일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 5남매와 아내, 총 일곱이던 가족이 이제는 3대까지 모이면 20명이 넘는 대가족이 됐다. 사진은 자택 마당에서 5남매, 아내와 함께 찍은 것.
▲ 5남매와 아내, 총 일곱이던 가족이 이제는 3대까지 모이면 20명이 넘는 대가족이 됐다. 사진은 사진공부를 하는 둘째 손자가 촬영한 거다. 손자들과 가족사진을 걸어둔 벽에 함께 걸려있다.

 

'죽삼회(죽향초 35회+삼양초 1회)'를 아시나요?

죽향초등학교 졸업생인 김진헌씨는 5학년 여름에 해방을 맞았다. 당시 절반이 넘던 일본인 교사가 도망치듯 떠나는 바람에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2학기를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인 1946년 개교와 함께 5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다.

그런데 삼양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신읍 쪽에 살던 친구들이 모두 전학을 갔다. 그리고 친구들은 2년 후에 삼양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역사가 한참 오래 된 죽향초등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던 김진헌씨는 죽향초 35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삼양초등학교 1회 졸업생과 죽향초등학교 35회 졸업생은 학창 시절 5년을 같이 보낸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어른이 되어 '죽삼회'라는 동창 모임을 만들었다. '죽'향초와 '삼'양초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모임인데, 김진헌씨가 회장을 맡고 있다.

<맏아들의 감사편지>

"그 고마운 마음 잘 헤아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운명을 개척해오셨습니다. 젊은 시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셨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아프면서도 존경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젊은이 못지않은 기백과 정열로 가족과 회사에 헌신하신 가장이자 경영자이셨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늙어버리신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지금도 우리 가족과 회사의 일에 노심초사하시는 아버지! 그 고마운 마음 잘 헤아려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아버지, 어머니도 건강 잘 유지하셔서 우리 자식들과 손주들의 정신적 지주와 인생의 버팀목으로 계셔 주세요.

그리고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 오래 오래 지켜봐 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큰 며느리가 직접 그려 시어머니께 선물한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 젊은 시절부터 여러 활동을 활발히 해온 덕에 공로패, 감사패 등을 받기도 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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