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병, 고통의 애국을 업다.

~주(註) : 여름 휴가 동안 경주와 포항의 중간 쯤 자리한 기계면 치동(致洞)마을에 다녀왔다. 몇 년 전부터 벼르던 이 작은 마을의 커다란 이야기들을 3회에 걸쳐 싣고자 한다.

<1> 의로운 선비, 여울에 귀를 씻다.

<2> 의병, 고통의 애국을 업다.

<3> 흰옷 입은 사람, 김인제.

▲ 의병은 가고 없어도 의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우리들, 그들의 함성이 허물어진 집 어귀에서 머무는 듯하다.

누구나 세계지도에서 우리나라를 본 적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작다’이다. 넓고 광활한 러시아, 미국, 중국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뜨이고 만다. 이 작디작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작은 것도 성에 안 차 갈라졌다. 분단 70년 동안, 참 숱하게도 많은 갈등을 남긴다. 그러나 작아도 너무 작은 대한민국은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저력을 가지고 꾸준히 성장해왔다. 경제가 그러했고, 민주주의가 그러했다. 올해 광복절 문재인 대통령의 담화 중 거론된 '아무도 흔들지 못하는 나라'라는 김기림의 시어가 새롭게 각인된다.   

국권을 피탈당한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 우리는 이 치욕을 잊어서 안 된다. ‘국가통치권’을 강제성에 의해 넘겨준 ‘한일병합조약’이 공표되었다. 이에 앞서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우리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부터 전국적인 의병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치동 마을에서도 건장한 혈기의 남정네들이 의병활동을 가담했다. 개인의 일탈이 어려운 일본에 비해 예부터 우리는 자주적 처신들에 능했다.

-- 지역 유생들이 대거 참여한 산남의진에 의한 의병활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산남의진은 대구, 영천을 중심으로 영덕, 흥해, 청송, 영일, 경주 등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고종의 밀지에 의해 시작된 산남의진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4차에 걸쳐 활동한 후기의 의병이었다. 그런데 치동 경주 김씨 문중 김태환이 산남의진에서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특히 김태환은 3차 거사에서는 소모장을 맡았다.(‘한국학논총’ 430P 중략)

-- 경북 남쪽 지역에서 활약한 산남의진이 3년이라는 장기 항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밀지’라는 유생들에게는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동기가 부여된 것도 있지만, 이 지역이 산악지대로 의병들이 산악의 줄기를 타고 이동하던 탓에 일본군의 진압이 쉽지 않았던 요인도 있었다.(‘한국학논총’ 430P 중략)

-- 다시 봉계마을로 돌아가면 보현산에서 봉좌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통한 이동으로 기계면에 들어오기에, 봉계동은 의병들이 활동하는 보현산과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길의 이동로에 있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초기 산남의진 결성 당시 지역 대표가 74명이나 구성되어 있었고 김태환은 기계면 대표 3인 중의 하나였다.(‘한국학논총’ 431P 중략)

-- 산남의진의 가장 비극적인 참변이 바로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가 초토화되고 수십 명의 장병들이 전사한 입암전투였다. 입암리는 기계면 북쪽의 죽장면의 면소재지이며 봉계마을과 불과 12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봉계마을 노인들은 입암리까지가 30리 길이라고 한다. 봉계마을 한 구술자는 입암마을 사건으로 하루 저녁에 50 몇 집의 제사가 같은 날 들었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동민 50명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구술자는 이 입암 전투에서 김태환이 정대장을 살리기 위해 업고 30리 길을 도망가서 살려서 “그 은혜를 가지고 의를 맺었다”고 한다.(‘한국학논총’431P)  (필자 주 : 당시에는 아명과 아호와 호, 항렬을 따른 족보의 이름, 호적 이름 등이 다양했다)

-- 김태환은 독립운동 공훈록에 김윤진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에 ‘애족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독입유공자 공훈록에 김윤진(1882년~1964년)에 대한 등록된 정보는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항일의병투쟁이 재연되었다. 이에 김윤진은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자진 입대하여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 정환직, 최세환의 휘하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를 전후한 시기에 흥해, 기계, 신령, 의성, 영덕, 입암 등지의 전투에서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한편 우재룡, 박광, 이한구와 함께 일본인 관사 수 개 처를 방화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또한 전투 중에 적의 손에 피체된 정환직 장군의 구출작전을 주도하여 적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7월에 동지 백영근과 함께 왜경에게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압송하던 왜경 2명을 제압하고 김윤진은 간신히 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출에 실패한 백영근은 그대로 압송되어 7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국학논총’ 432P)

( --표의 글들은 2018년 2월 발간된 저자 김영미 ‘한국학논총 제49집’에서 일부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 오른쪽 첫째 의병 김태환(윤진)의 손자 김종황 씨와 후손들
▲ 치동마을의 역사성과 의병활동 등을 발굴하는데 실질적 노력을 하신 김수일 씨(왼편 첫째)가 필자의 취재를 알고 뒤늦게 달려와주셨다.

이렇듯 이름 없는 작은 산골짝 마을에도 하나 뿐인 목숨을 나라에 바치고자 열혈한 의병이 있었다. 김태환(윤진)이 크게 다친 의병 장군 정환직을 업고 험한 30리 산길을 헤치며 장군의 목숨을 살렸다는 후문이 아직 이 마을에 성성하게 살아있다.

필자는 녹음이 푸르른 봉좌산 깊은 골을 바라보며 대낮에도 두 눈에 시퍼런 인광을 흘렸을 망국의 한을 떠올렸다. 한 건장한 남자가 의식을 잃으려는 한 남자를 업고 시간을 재촉하는 일은 얼마나 뜨거운 전우애인가? 김태환의 등에 스몄을 정대장의 선혈, 서로의 체온은 하나가 되었고, 이후 이들이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일화도 아름답다.

▲ 필자가 처음 본 이 마을의 백송. 굽거나 휘지 않고 꼿꼿이 위로 향했다.

식민지 이후 우리는 참혹한 내전을 겪었고, 아직 국토회복은 요원하다.

1950년 7월 14일부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미8군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이 넘어갔다.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분명 자주국가인 우리는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건 쉬운 예로 이런 것이다. 나는 힘이 없다. 여러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집안에 지천이지만 나약한 나는 그것을 제대로 쓸 능력이 없다. 그리고 뒷집 힘 센 남자에게 잘 보이려면 나는 좀 약골로 보여야 한다. 그래야 맞은편 집 무지막지한 꼴통의 시비를 막을 수 있다. 누군가 어디선가 우리나라에 폭탄을 투여하는 전쟁이 일어날 시, 미국의 승인과 명령이 떨어져야 우리 국군은 방어를 한다. 내 집에 누가 쳐들어오는데 뒷집 남자가 신호를 줄 때까지 내 아내와 새끼들은 맞아죽을 수도 있다. 왜냐면 나는 폭력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슬프지 않은가?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우리가 정녕 진정한 독립국가이기나 한 걸까? 한 국가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보루 ‘전시작전권’이 이미 오래 전 실패한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강력한 담보라는 착각은 제법 유아적 발상이다. ‘전작권 없는 나라’는 필자가 수십 년 생각해봐도 도무지 영 신통찮은 일이다.

▲ 싱그러운 파초가 의병들의 후손에게 그늘이 된다

국제적 외교논리의 셈법은 늘 강한 자들이 만들고, 약한 자들이 굴신하게 되어있다. 독일과 일본의 합작품인 2차 대전의 패전으로 우리는 이념의 늪에 빠졌다. 식민지에서 어영부영 짧게 배운 이념은 진짜보다 가짜를 양산했고, 무조건 양분시켜 패거리를 양산하는 폐해를 가져왔다. 패전국 일본은 전쟁발발의 책임을 대신해 식민지 한국을 간소한 디저트처럼 강대국에게 바쳤다.

▲ 의병들이 사용했음직한 시대의 궤

5천년 역사 동안 1천 번의 침략을 받고도 국가와 국어와 역사를 지킨 우리다. 아직 분단의 국토회복과 민족의 동질성을 완성하지 못한 우리는 미완의 역사를 쓰고 있다. 강대국 이념의 각축장이 되어 한없이 교묘한 지리적 위치의 우리에게 통일은 미적분보다 더 복잡한 노선들로 엉켜있다.

누가 과연 우리의 통일을 진정으로 원할까? 여기에 가장 먼저 팔을 올리고 가장 늦게 팔을 내릴 대상은 바로 ‘미래’다. ‘미래’ 뿐이다. ‘미래’를 위해서 미루고 미룬 숙제를 끝내야 한다. 지리적 위치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국토를 넓히고, 세계인이 놀라는 우수 인력을 키우고, 작지만 옹골 찬 국력을 키워야한다.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듯, 앞으로도 숱한 어려움 넘어서 우리는 ‘미래’에게 희망을 저당 잡혀야 한다.

▲ 의로운 이를 그리는가, 상사화 한 송이가 피었다

지금 한창 힘겨루기에 들어간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민주적 방식을 성취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열성적이다. 전국방방곡곡에서 의연히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다. “국가는 국민이 지킨다”는 이 자명한 명제 앞에서 지식인부터 종교인, 일자무식 농투성이들까지 애국에는 경계가 없다.

▲ 오지의 작은 마을이지만 알찬 역사를 지닌 고향에 바치는 서시(한국문인협회 전 부이사장 김종섭 시인)

한 마을에 같은 날 제사를 50가구가 지냈다는 건 가슴 떨리는 애국을 간직하게 한다. 국가란 그토록 고귀한 조상들의 피로 지켜져왔다.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목숨, 애국에 몸을 바친 정환직 장군과 장군의 의로움에 함께 죽고살기를 각오한 김태환의 신념, 이런 신선한 관계가 무척 그리운 시절이다. 순수와 순정을 애국 앞에서 놓기가 두려운 날들이다. 어디 사람 없나요? 의병처럼 의로운 사람을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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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미진 객원편집위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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