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동안 경주와 포항의 중간쯤 자리한 기계면 치동(致洞)마을에 다녀왔다. 몇 년 전부터 벼르던 이 작은 마을의 커다란 이야기들을 3회에 걸쳐 싣고자 한다.

<1>의로운 선비, 여울에 귀를 씻다

<2>의병, 고통의 애국을 업다

<3>흰 옷 입은 사람, 김인제

▲ 수리관개사업의 모범을 보인 큰마을못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가 광복 이후 가장 심각하다.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서둘러 봉합한 박정희 정권의 해법은 꽤 오래 곰삭고 있었다. 일제의 핍박 아래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감정은 곧 국가적 책무가 된다. 서로 이웃한 일본과 외교에서 어쩌면 두 국가는 살얼음과 성에를 감춘 겨울왕국임에도 넌지시 계절의 온도를 캐묻지 않았을 수 있다. 언제 터져도 터질 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순조로운 외교관계가 성립될 것 같다. 지금이 그 적기가 아닐 수도 있고, 적기란 언제라도 치러야할 당면한 시기일 수 있다.

이참에 더욱 돋보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영일군 기계면 봉계리(치동)의 김인제(金仁濟)와 김성진(金性眞). 이 마을은 1917년까지 면내에서 가장 궁핍했다. 한 마을이 오랜 가난을 벗어나기까지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과 희생적인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 더불어살기를 자처한 지식인들이 있어 이 마을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1876년 태어난 김성진은 아주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게으르고 빈한한 주민들이 가난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천착에 오랫동안 고심하며 개혁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김인제를 지목하여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마을에 관한 의식을 심었다.

▲ 빈 집을 지키는 편액
▲ 마루에서 부엌을 통하는 문, 유년의 추억을 소환한다

 

일제 식민지에서 어떤 공무의 직책에 있으면 흔히 친일로 분류한다. 그래서 광복 이후 오랫동안 명예회복을 못한 이들도 많다. 치동마을의 구장 김인제는 겉으로 보기엔 일제의 정책을 따랐지만 속속들이 그들을 허용치 않았다. 김인제에 관해 아직도 이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치하 조선인을 내선일체로 길들이느라 영일군이나 기계면에서 마을 구장들의 소집이 잦았다. 그런 날이면 김인제는 영락없이 지각을 했다.

사계(四季)가 분명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아랫목 치동, 죽은 듯 절망의 검은 산에 진달래 꽃잎 설움처럼 터지는 봄날에, 녹음이 젊은 함성처럼 짙푸른 여름 산골짝에, 망국의 한이 활활 불타듯 온 산이 뜨겁던 가을 산길을, 참고 또 참느라 깨문 어금니 같은 함박눈이 퍽퍽 발등에 매달리는 겨울강가를 김인제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걸었다. 어떤 자리든 무명한복을 고집했던 김인제는 한 마리 커다란 백학처럼 두루마기 자락에 산천을 물들였다.

그는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회의 전에 열리는 천황 문안인사를 피하기 위해서 소문난 지각대장이 되었다. 일본에 충성하던 매국적 간신배들이 있는가하면, 한갓진 촌마을에 이름없는 애국자들이 더 많았다. 그는 앞의 글, '<2>의병, 고통의 애국을 업다.' 에서 거론된 의병 소모장 김윤진을 일제의 예리한 수배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될 때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한 김윤진을 감춘 것이 탄로나면 김인제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마을 전체가 소각당할 처지였지만 그는 담대하고 치밀하게 의병 김윤진을 숨겨주어, 1882년 태어난 김윤진은 1964년까지 장수를 했다. 평소에도 일본어를 쓰지 않은 김인제는 일본의 사상교육이나 홍보 등 행사 시 일장기에 대한 충성맹세나 신사참배를 철저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일본관리들이 김인제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 옛날의 정취가 발길을 당기는 정짓간(부엌)

-- 농촌 계몽운동의 원류는 한말 계몽운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 즈음만 해도 근대 민족운동은 정부 주변의 지식인 운동과 민중운동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이후부터 이 둘은 합류하여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국권 상실 후 일제의 무단통치로 민족운동이 대부분 봉쇄당하자, 계몽운동은 당시의 의병운동과 합류하여 해외의 독립군 양성교육 등 국외 독립운동을 발전하였다. (중략)

-- 그 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일제가 무단통치를 철회하게 됨에 따라, 계몽운동은 민족의 대중적인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농촌계몽운동으로 부활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의 형태는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주로 농사일을 끝낸 밤 시간에 강연회, 토론회, 독서활동, 야학 등으로 나타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 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민족이 총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와 맞물려 여러 단체들이 농촌계몽운동에 조직적으로 참가하여 합법을 가장하고 지하활동을 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단체들이 조선청년연합회, 조선교육회, 조선여자교육회, 조선학생회, 조선노동총맹, 조선농민사 등의 사회문화단체와 천도교청년회,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등의 종교단체들이다.(중략)

--이러한 민족적 분위기를 보다 능률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1929년 조선일보사에서 문자보급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한글 보급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1년에는 브나로드운동(vnarod運動)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사가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중략) {포항의 독립운동사 // (사)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 발췌}

 

위의 이야기들은 1930년 일제가 만주침략의 전시체제가 되기 이전이다.

1881년 10월 2일 봉계리(치동)에서 출생한 김인제(호, 소강)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성년이 되어서는 목민심서를 읽으며, 일제의 수탈에 희망을 잃은 마을을 살리기에 고심했다. 야학을 열어 단순히 학문으로 문맹의 주민들을 깨우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절망은 늘 희망이라는 말부터 집어삼킨다.

▲ 아주 오래된 단지들이 뒤란에서 주인을 잃은 채 침묵한다

농한기가 되면 으레 술과 노름에 찌든 농민들에게 어느 누구도 가열찬 희망의 씨앗을 나누지 않았다. 그는 산골 오지의 마을을 떠나 더 큰 세상을 보고 배우자 했다. 1914년 34세, 젊음의 정점에 이른 그는 먼 길을 나섰다. 여기에는 다섯 살 연상인 선배 김성진의 개혁적 가르침과 이상적인 변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학문을 귀히 여긴 마을답게 빈 집에도 이런 액자가 있다

부산에서 목포까지, 의주에서 북간도까지 그는 두루 섭렵하며 풍부한 경험과 깨우침을 얻었다. 치동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견학한 체험들을 글로 정리하여 김성진과 더불어 본격적인 마을 계몽운동에 들어갔다. 후대들이 기억하는 김성진에 관한 평가는 아주 온건하다. 그의 학문이 출중했고, 사려가 깊어 따뜻한 성품이기에 자신의 안위보다 마을의 미래를 깊이 고뇌했을 것이다. 김성진과 김인제의 마을 개혁, 이는 철저히 자발적 결단이고 단초였다.

▲ 아낙의 손길을 기다리는 장독대

긴 여정에서 돌아온 김인제는 가장 먼저 마을에 교풍회(矯風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간사가 된 김인제는 자신의 가족부터 근검절약의 솔선수범을 보였다. 음주와 도박 등 폐풍(弊風)운동이 퍼지면서 술을 줄이는 사람들이 늘어나 술집을 없애고 매도하는 결단을 보였다. 농사개량조합 회의를 열어 농사기술과 종묘개량, 면작(棉作: 목화재배)계를 조직했다. 절망에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1923년부터는 도박을 하면 경찰관서에 고발하는 상호간의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 백년은 족히 되어보이는 찬장과 가방

--김인제와 김성진은 동민에게 단책형 묘대, 정조식(正條植), 녹비재배(綠肥栽培), 나락의 건조조제 자급, 비료제조, 육지면 재배 등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각종 농산물의 생산액이 종전에 비하여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매우 향상되었다. 그래서 경북도나 면에서 품평회가 있을 때마다 이 동네 출품물은 언제나 우량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중략)

--이런 실적으로 1929년 3월에는 봉계리가 면작(棉作) 우량 작목반으로 선정되어 경상북도 농회장으로부터 1등상(상금 100원)을 받았고, 1930년 3월에는 농사개량 실적이 현저하다고하여 근농공제조합으로부터 도지사 장려금을 받았다.(중략) {포항의 독립운동사 // (사)최세윤의병장기념사업회 발간 // 발췌}

▲ 이곳이 잠실, 누에를 키우던 곳으로 규모가 제법 컸다

 

술과 노름과 나태, 이런 퇴폐적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담금질하는 이 마을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파다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에서는 급기야 이 마을 이야기를 수신서(修身書)에 싣게 되었다. 1930년 당시 이 마을의 주민은 180호에 약 8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 발행 보통학교 수신서(修身書) 표지와 제15단원 산업 부분 내용(1932년 3월 10일 발행). 보통교과서에 봉계리의 사례와 삽화가 유일하게 실려 수년 간 교재로 활용되었다.

--이를 두고 일제 당국이 기만적으로 실시한 ‘농촌진흥운동’에 이 마을이 동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에서 소위 농촌진흥운동이라는 것을 강요한 시점은 1934년이다.(중략) {포항의 독립운동사 // (사)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 발간 // 발췌)

「동아일보」 ‘모범농촌 영일 봉계동’ 1933년 9월 1일 자 4면 계몽운동의 사례가 상세하게 실렸다. {위 저서에서 발췌}

「동아일보」 ‘금주 단연으로 일약 모범 농촌’ 1934년 4월 26일 5면에 봉계리의 농촌계몽운동 사례가 실렸다. {위 저서에서 발췌}

▲ 이런 아궁이를 본 적이 언제였나, 아득하다

이렇듯 외부의 어떤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발전한 봉계리다. 각 가정마다 밥을 지을 때에 한 수저의 쌀을 저축하는 절미(節米)운동 등, 종친이었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철저한 협동으로 이뤄냈다. 당시 김성진과 김인제가 내건 슬로건 도박, 금주, 절약, 근면, 자조, 협동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로 새마을운동의 취지와 아주 유사하다.

후손 중 누군가는 그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시대 교사였고, 수신서를 접해 봉계마을의 사례가 훗날 새마을운동 발상의 참고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그런데 이토록 명확한 봉계마을의 건전한 발전적 역사를 외면하고, 새마을운동 발상지는 정작 옆 마을로 지정되었다. 거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봉계 마을의 오래된 벤치마킹이 아니었음을 현저히 드러내려는 의도는 아닌가 생각된다. 지정된 마을의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발상지다.

일제시대 마을구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낙인 찍혔던 김인제에 관한 평가는 2004년이 되어서야 바로 잡혔다. 의병 김윤진을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를 보더라도 그는 친일과 거리가 멀었기에, 때 늦었지만 마을에서는 정성을 다해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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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미진 객원편집위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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