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서(85, 옥천읍 문정리)씨

▲ 박연서씨가 자신의 집 현관에 붙여놓은 입춘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소중한 인연을 잡고 인생을 개척해 온 그는 장성한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며 봄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인생의 출발점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맨땅에서 빈손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인생의 고비마다 만났던 소중한 인연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이름에 들어 있는 '서(緖)' 자는 '실마리'라는 뜻이다. 소중한 인연을 실마리 삼아 내 인생을 운전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운전(運轉)은 '기계나 자동차 따위를 움직여 부림'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업이나 자본 따위를 조절하여 움직임'이라는 의미도 있다. '사업이나 자본'을 다시 '인생이나 운명'으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인생 후반전부터 나눔을 실천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 빨간 사과 한 알과 두 마지기의 땅

나는 1933년 옥천군 군북면 이평리에서 태어났다. 약 80호가 모여 살던 이평리는 반남 박씨 집성촌이었다.

나는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다. 조실부모(早失父母)가 원인이었다. 3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고, 1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잃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내가 워낙 어린 때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얼굴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암 투병을 하시다 타계했는데 가난한 살림 때문에 병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빨간 사과 한 알만 먹고 싶다."

하지만 어린 나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당시 나의 유일한 꿈은 "땅 두 마지기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10세 무렵에 우리 가족은 옥천읍으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타계한 상황에서 겪어야 했던 셋방살이는 더욱 서럽고 힘들었다. 죽향초등학교와 삼양초등학교가 가까이 있었지만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5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 20대 때의 박연서씨 <박연서씨 제공>

마침 외갓집이 옥천읍 삼양리에 있었다. 외갓집에서 부모 잃은 4남매를 받아주셨다. 부모님은 2남2녀를 낳았는데, 내가 막내였다. 외갓집이 빈손으로 시작한 내 인생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주었다. 외삼촌이 일제 강점기에 자동차 운전을 했다. 형님이 외삼촌에게 운전을 배웠고, 그 기술을 다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나는 삼산의원 이헌영 원장 자가용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1953년 개업한 삼산의원은 옥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병원이다. 옥천에 자가용이 두세 대에 불과하던 시절에 이 원장 집에만 자가용 두 대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모님'으로 부르던 원장 부인이 마침 반남 박씨였다.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서 경남 김해에 있는 공병학교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인들이 군복무를 하면서 돌을 쌓아 건물을 짓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희귀한 운전면허증 소지자인 나는 연대장 운전병이 되었다. 낮에는 연대장을 모셨고, 밤에는 수송부에서 잤다. 당시 수송부는 군기가 세기로 유명했다.

김해에서의 군대 생활은 힘들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연대장 지프차를 운전하는 바람에 김해 시내에 자주 나가게 됐는데, 한 가게를 운영하던 여사장이 "옥천에서 온 건실한 청년을 놓칠 수 없다"며 나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가 바로 내 인생의 평생 반려자가 된 아내 김소경이었다. 제대할 무렵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태평로에서 목격한 정치의 속살

▲ 박연서씨의 젊은 시절 <박연서씨 제공>

 27세가 되던 해인 1960년 나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3선의 중진인 신각휴 의원은 민주당 구파로 분류되던 정치인이었다. 당시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에 있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5.16 정변이 일어나면서 7개월에 걸친 나의 서울 체류도 끝났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두 번째 큰 선물을 받았다. 그해에 장남 찬욱이 태어난 것이다.

신각휴 의원은 2대(1950~1954), 3대(1954~1958), 5대(1960~1963) 국회에서 활동했다. 나는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신 의원을 모셨다. 1960년 4.19혁명 직후에 실시한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크게 승리하였다.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선출하고 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분열하면서 혼란을 겪었다.

민주당 구파에는 김도연,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윤제술, 허정 등의 정치인이 있었고, 신파에는 곽상훈, 장면, 현석호, 오위영,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의 정치인이 있었다. 신각휴 의원은 구파로 분류되었다.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의원도 태평로 의사당으로 등원했지만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신각휴 의원이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의사당 주변에 돌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농림부 장관을 원했던 신 의원은 체신부 장관직을 고사했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제 발로 걷어찬 격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농업이 한국을 대표하던 산업이었고, 농촌 인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물론 58년이 지난 현재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 운수, 중기, 건설 등의 업종에서 사업을 했던 박연서씨. 젊은 시절의 그가 굴삭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박연서씨 제공>

옥천으로 돌아온 나는 택시 회사를 필두로 운수(運輸), 중기(重機), 건설(建設) 등의 업종에서 사업을 했다. 삼산의원 원장님과 사모님이 나를 믿고 첫 자본금을 빌려주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잘못 만나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티자 신용이 쌓이며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덤프트럭과 포클레인도 구입했고, 한 때는 벽돌공장도 운영했다. 이후에는 건설업에 집중했다. 일정하게 운과 시기도 들어맞았다. 때맞춰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옥천에도 공장이 들어왔다.

나와 아내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으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자정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업을 일으킬 때 아내의 내조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아내는 숙식을 함께 했던 수십 명의 기사와 직원을 세심하게 챙겼다. 가족이라고 편애하지 않고 직원들과 똑같이 먹였다. 건설 사업을 할 때는 회사에서 인부들에게 새참을 제공했는데, 아내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해결했다.

▲ 박연서씨의 젊은 시절 모습. <박연서씨 제공

■ 내 인생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운전으로 인생을 개척해온 나는 종종 인생을 운전에 비유해보곤 했다. 예컨대 자동차를 지혜롭게 운전하려면 액셀러레이터(가속페달)와 브레이크를 적절하게 밟을 줄 알아야 한다. 브레이크 없이 가솔페달만 밟아대면 자동차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데, 내가 살아본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차는 앞으로만 달린다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전진보다는 후진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자동차에는 전진에 필요한 큰 유리창, 후진에 필요한 작은 백미러와 사이드미러가 모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돈을 벌고 나서 나눔을 실천했다. 운수, 중기, 건설 등 업종을 살린 나눔의 실천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군청에 쓰레기 치우는 인력과 예산이 없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트럭과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해 쓰레기를 무료로 치웠다. 겨울철이 되면 연탄재 치우는 것이 골칫거리였는데, 이 문제도 스스로 나서서 해결했다.

운수 회사를 운영할 때는 읍과 면을 오갈 때마다 학생과 주민들이 원할 경우 모두 차에 태워줬다. 교통수단이 불편했던 당시만 해도 운전하는 사람은 인기가 높았다. 1979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선영이 있는 군북면 이평리가 수몰됐다. 오가던 길이 사라져 명절 때 성묘하러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회사 장비를 동원해 새 길을 냈는데, 그것이 지금 큰 길이 되었다.

사업과 나눔의 동반자였던 아내 김소경과 2016년 사별했다. 거지가 와도 그냥 보내지 않을 정도로 인심을 베풀었던 아내와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의과대학을 나온 장남 찬욱은 대전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장녀 주혜는 인천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차녀 수진이 사위와 함께 가업을 이어받았다. 3남매가 다시 7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자수성가(自手成家)로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 식구들의 손에 큰 박연서씨는 '운전'을 하며 인생을 개척했다. 팔순이 넘은 지금,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운전대를 잡기도 한다.

▲ 박씨가 자신의 자동차 운전석에 오르기 전, 잠시 포즈를 취했다.
▲ 박연서씨 슬하의 3남매가 7명의 손주를 낳아 지금은 이렇게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박연서씨 제공>
▲ 박연서씨가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라타 포즈를 취했다.

 

어려울 때마다 선행을 실천하자 주민들 답례

"당신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는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풀어낸 자서전을 옥천신문에 게재하고, 자녀와 손주 등 후손들이 감사편지를 작성하여 화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손들의 감사편지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옥천신문에서 이미 박연서 삼정건설 회장의 각종 선행에 대해 감사를 표시한 기사가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런 기사는 당장 옥천신문이 창간된 198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연서 회장은 1989년 10월 치러진 경찰의 날 행사에서 치안본부 경찰국장 감사장을 받았다. 1992년 10월 노인회관에 난방시설을 설치했고, 1995년 7월 옥천읍이 삼양리 네거리 부근에 조성한 화단의 흙도 제공했다. 그해 8월에는 집중호우로 하천 제방과 농로가 유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옥각리 농로 복구 현장에 포클레인을 지원했다. 주민들은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해 자신의 일처럼 묵묵히 노력해줘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1996년 9월 청산면 목동리 숙원사업인 진입로 포장공사가 무사히 끝나자 주민들은 박연서 회장에게 목동리 특산품인 고추를 선물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해 11월 지역농업개발센터 준공식에서도 박 회장은 감사패를 받았다. 1997년 7월 보도연맹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유골이 군서면 월전리 공원묘지에 안장될 때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무료 제공했다. 2003년 2월 옥천영동축협 총회와 2010년 4월 장야초등학교 개교기념식에서도 감사패를 받았다. 박 회장은 특정한 개인으로부터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감사 인사를 받기도 했다.

1999년 11월 13일자 옥천신문은 상가탐방 코너에서 박형용 중부창호 사장을 인터뷰했다. 당시 박 사장은 IMF 외환위기 당시의 어려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려웠지만 주변에서 많이 격려하고 도와 주셨어요. 특히 많은 힘을 주신 박연서 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에는 진정한 성공 인생의 4가지 필수 조건이 나온다. 첫째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고, 둘째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며, 셋째 누군가의 인생에 우연히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고, 넷째 취미나 특기 등 자신만의 와일드 카드가 있어야 한다. 이 4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보면, 박연서 회장은 진정한 성공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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