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⑧> 부귀영화와 담쌓고 살았지만 세상 부러울 것 하나도 없소

정지환 옥천신문l승인2019.10.02l수정2019.10.0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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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홍·김우연(90·85, 옥천읍 대천리)씨 부부 이야기

▲ 김인홍(90) 김연우(85) 부부의 다정한 모습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대천1리 '꼭대기집' 김인홍(90) 김연우(85) 부부입니다. 옥천신문 오한흥 대표와 함께 마을회관에 가서 "이 동네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신 어르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 즉석 섭외했습니다.

'꼭대기집' 현관 앞에 서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고개를 들자 마성산, 장령산, 대성산 연봉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김인홍·김우연 부부는 1955년부터 이 '꼭대기집'에서 꼬박 63년을 살아오셨습니다. 두 사람은 작년까지도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일했습니다. 세 아들 가족에게 쌀과 김장을 보내주는 것이 부부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올해부터는 욕심을 접기로 했습니다.

'후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주문하자 부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 김인홍, 김우연씨 부부가 파란 대문 앞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 옥천 총각, 상주 처녀의 운명적 만남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에서 5년 터울로 태어난 우리 두 사람은 1955년 부부가 되었다. 당시 남편은 27세, 나는 22세였다.

나 김우연은 1934년 상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품팔이를 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친척의 중매로 옥천읍 대천리 김해 김씨 총각에게 시집왔다.

남편 김인홍의 어린 시절도 나처럼 평탄치 않았다. 1929년 옥천군 이원면 지탄리에서 태어난 남편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가출하고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따뜻한 부모의 정(情)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남편은 고모가 살고 있던 옥천읍 대천리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 가족이 대천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73년이 됐다는 말이다. 17세 소년은 고모네가 운영하던 닭장에서 일꾼으로 일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는 사이에 20대 후반의 총각이 되었고, 고모의 주선으로 상주 처녀인 나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 환갑잔치 때 모습. 집 마당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부부를 업고 있는 모습이다.

 

■ 대천리 '꼭대기 집'의 삼형제 연대기'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됐다. 대천리 가장 위쪽에 위치한, 쓰러져 간다고 표현해야 어울릴 정도로 초라한, 작은 초가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가진 논밭이 하나도 없다 보니 남의 논밭에 가서 일하며 품삯으로 살아야 했다. 봄에는 논 갈기, 모내기, 여름에는 김매기, 가을에는 벼 베기 등 쉬지 않고 일했다.

밑천이 없다 보니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재산을 불릴 수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제 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아 지쳐갈 때쯤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는 다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1960년 맏아들 용철이 태어났다. 학구열이 뛰어난 용철은 삼양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거쳐서 대전에 있는 공고로 진학했다. 초급대학을 나와서도 학업을 이어가 충남대학교를 졸업했고, 나중에는 대학원도 다녔다. 현재 대전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1963년 둘째아들 인철이 태어났다. 인철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기술을 배워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전쟁이 일어나 불안하던 이라크에 전기기술자로 파견되어 일하기도 했다. 목숨과 바꾸다시피 벌어온 적지 않은 돈을 나중에 부모에게 내놓기도 했다. 지금은 고향 옥천에서 전기기술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1

974년 막내아들 완철이 태어났다. 둘째 이후 10년 넘게 아이가 없다가 내 나이 41세에 늦둥이로 낳았다. 딸을 낳고 싶었는데, 기어이 막내도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 권투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큰형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고향 옥천에서 직장을 다니는 막내아들은 '남의 집 딸 부럽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요즘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와서 청소도 해주고 먹을 것도 잔뜩 냉장고에 넣어주고 간다. 막내여서 그런지 정이 많다.

▲ 환갑잔치 때 모습.

 

■ 세 아들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왈칵

'세 아들을 키우며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맏아들이 4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남의 밭에 일하러 갔다. 밭고랑 풀숲 그늘에 아이를 누이고 김을 맸는데, 젖을 주려고 와보니 아이가 흙을 손으로 퍼서 입에 넣고 있었다. 한나절 동안 굶기고 일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둘째아들이 태어날 당시 내 나이 30세였다. 조금이라도 살림 밑천을 마련해보려고 인삼 장사를 했다. 이웃 고장인 금산에서 인삼을 떼어다가 타지를 돌면서 팔았다. 충북, 충남은 물론이고 강원도까지 팔러 다녔는데, 갓난애였던 둘째아들을 등에다 들쳐 업고 다녔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면 장사하던 동네의 인심 좋은 민가에서 숙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아이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 입에 온통 하얀 홍역 꽃이 피어 있었다. 이러다 아이를 잃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무겁게 가져간 인삼을 하나도 팔지 못하고 귀가했다. 하지만 아이가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는 또 다시 인삼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녀야 했다. 막내아들은 동네에서 품팔이 하면서 기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1998년 초가를 허물고 지은 양옥집에서 두 사람은 도란도란 따뜻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진 선생님, 천 대령님 정말 감사해요

양가 모두 동기간(同氣間) 없는 신세는 외롭고 힘겨웠다. 그래도 주변에서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들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다. 형제지간은 아니지만 동기간 같은 분들이 있었다.공부를 잘했던 맏아들은 우리 가족의 희망이자 기둥이었다. 열심히 공부해 충남대에 진학해 유성구에서 자취를 했는데 집에서 보내준 쌀이 부족해 콩나물죽을 끓여 먹으며 공부했다. 옥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아들이 학교에 납부해야 하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온 식구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그럴 때마다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분이 있었다. 당시 우리가 '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초등학교 교사와 그의 아내였다. 대천리에 살고 있던 진 선생과 부인은 우리가 급전을 요청할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빌려줬다.

우리가 '천 대령님'이라고 불렀던 분의 은혜도 잊을 수 없다. 천 대령은 군에서 제대하고 대천리에 거주했는데, 쌀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가 쌀 한 말만 빌려 달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빌려줬다. 여름날 꽁보리나마 물에 말아 먹고 살 수만 있어도 감사한 시절이었다. 당시에 양식을 나눠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기간 하나 없던 우리에겐 그분들이 동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댈 언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절감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두 분의 은혜를 절대 잊지 말자고 맹세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두 분의 실명을 잊어버려 안타깝고 죄송하다. 죽기 전에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 새마을부녀회로 열심히 활동한 김우연씨. 공로를 인정받아 감사패, 감사장 등이 집안 곳곳에 있다.

 

■ 부녀회장 봉사 감사장은 나의 자부심

나는 대천리 부녀회 회장을 8년 동안 맡았다. 부회장 3년을 합하면 11년이 넘는다. 당시 서울까지 가서 연수를 받았다. 여자가 외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시대였다. 하지만 남편은 흔쾌히 허락해줬다.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세 아들에게 보리밥 먹이며 기다려줬다. 마을에 돌아온 나는 아이를 업고 다니며 새마을운동에 앞장섰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나는 부녀회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것으로 배움의 갈증을 채웠다. 1975년 충청북도 농민교육원에서 제5기 새마을 부녀지도자반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1984년 옥천군 새마을학교과 농촌지도소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위 사람은 본동 부녀회장으로서 평소 사명감을 깊이 인식하고 부녀회 발전에 전신진력하고 있음은 물론 특히 경노사상이 투철하여 남달리 노인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따뜻이 보살펴준 공적이 지대하여 이를 높이 찬양하고 감사장을 수여함.

"1986년 대천리 노인회장 명의로 수여한 감사장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감사장과 공로패를 받았다. 배운 것, 가진 것 없었지만 마을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김우연씨는 새마을부녀회 활동을 무척 열심히 했다.

 

▲ 1984년 새마을중앙회 교육 때 모습..

 

맏아들이 닭똥 같은 눈물 흘린 이유

1998년 초라한 초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번듯한 양옥집을 지었다. 새 집을 짓는 데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 온 식구가 나서서 경운기와 리어카로 모래, 자갈, 벽돌을 날랐다. 우리 부부와 둘째아들과 막내아들 그리고 맏며느리까지 이 일에 매달렸다. 최전방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던 맏아들도 틈틈이 휴가를 내고 나와서 일손을 도왔다.

건축비는 농협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둘째아들이 이라크에 가서 피땀 흘려 벌어온 돈까지 내놓았다.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시멘트 벽돌을 쌓고 미장하는 작업만 기술자에게 맡기고 모든 노동을 우리 식구가 감당했다.

양옥집이 완성되던 날, 동네 사람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잔치라고 해봤자 국수를 삶아 함께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던 우리 가족에게는 국경일만큼이나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완공 이후 휴가를 나온 맏아들은 번듯한 양옥집을 보더니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당시 꼭 1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남편이 회갑을 맞았다. 그 때도 마을 주민을 초대해 회갑 잔치를 열었다. 같이 국수 삶아 먹고 술 마시고 장구 치며 하루 실컷 놀았다. 남들에겐 그저 그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에겐 이 두 날이 가장 기쁘고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 두 손을 맞잡고 수줍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소년과 소녀의 웃음이었다.

 

정반대 성격 불구 부부싸움 안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부부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남편은 마음이 급한 편이었다. 가끔 성질을 부리고 고함을 치기도 했지만 뒤끝은 없었다. 반면 나는 성격이 다소 느긋한 편이었다. 그렇게 정반대 성격인 데도 싸우지 않았다. 서로 참아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가난하게 살아온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물론 잘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옛날 살던 때와 비교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옛날에는 부자만 먹던 쌀밥을 지금은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잘 크고,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나는 5년 전에 갑상선암에 걸려 대전에 있는 병원을 다녀야 했다. 남편도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큰며느리가 항상 승용차로 태워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맏며느리를 비롯해 세 며느리를 잘 얻은 것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만난 우리 부부 두 사람으로 시작한 가족이 14명으로 늘어났다. 맏아들은 1남1녀, 둘째아들도 1남1녀, 막내아들은 2남을 낳았다. 손주들이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했다. 자식들도, 손주들도 풍족하진 않지만 모두 열심히 살고 있다. 지난 설 명절 때도 이틀 동안 우리 집에 모두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놀다가 갔다. 지금 우리 부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 맞잡은 두 손이 있었기에 어려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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