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게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德不孤 必有隣)'

전정하(82, 옥천읍 삼양리)씨 이야기

▲ 전정하씨가 자신의 서재, 책상 앞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그가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손때 묻은 국어사전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증조부는 동학 접주, 집안은 풍비박산

나는 1937년 옥천읍 구일리 귀현마을에서 태어났다. 귀현마을은 옥천 전씨가 28대에 걸쳐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이다.

증조부는 동학 접주였다. 증조부가 살던 집은 호남과 영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해 옥천 연락소 기능을 수행했다. 집 앞에는 동학군의 파발마로 사용했던 두세 마리의 말이 항상 매여져 있었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 와중에 집은 불탔고 땅도 빼앗겼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유년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에게 사흘 동안 젖을 먹이지 못했다고 한다. 임신 기간에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갓난아기가 살지 못할 것 같아 윗목으로 밀어젖혀 놨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줄 알았던 아들은 젖동냥으로 기적처럼 살아났다. 당시 나에게 젖을 물려준 동네 아주머니가 고마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명절에 꼭 세배를 다녔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숙부 댁에 얹혀살아야 했다.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다 1944년 동이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혼자 산을 넘어 학교에 가는 길은 무서웠다. 옥천중을 거쳐서 1956년 옥천농고를 졸업했다.

세상에 나왔지만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답답한 마음에 남곡리 저수지 공사장에 나가서 이틀 동안 막노동을 했다. 며칠 심하게 몸살을 앓고 나서 육체노동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그날로 옥천군청 산림계장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했다. 조림지도원으로 일하다가 읍사무소 임시직원이 됐다. 당시 저녁 시간을 이용해 충남대 야간학부를 다니며 학구열을 불태웠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중퇴해야만 했다.

▲ 전정하씨 집 곳곳에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1980년대 어머니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아래에서 전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내 공무원 첫 발령지는 안남면사무소

1959년 1월에 군 입대 통지서를 받았다. 최전방 부대에서 3년 동안 근무하고 1961년 가을에 제대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라 이듬해 봄까지 숙부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962년 7월25일 9급 지방 공무원 채용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낮에 들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공부하려 했지만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졸음이 쏟아졌다. 시험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작심하고 다음날 이웃 동네 친척집으로 도망갔다. 그 집 뒤뜰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일주일 동안 죽기 살기로 문제집 7권을 달달 외웠다.

가까스로 시험에 합격한 나는 1962년 8월21일 옥천군청에서 공무원 임용장을 받았다. 첫 발령지는 안남면사무소였다. 이후 옥천읍을 거쳐 청성면에서 근무했다. 열심히 일하자 각종 상을 받았고, 1967년 안남면 산업계장 직무대리로 진급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공무원 생활도 한 상사와 갈등을 겪으며 틀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모시려면 옥천읍이나 동이면에서 근무할 기회도 얻어야 하는데, 그 상사는 인사 청탁을 도통 할 줄 모르는 나를 계속 먼 곳으로 보냈다.

1970년 청산면으로 발령을 받자 삼십대 초반의 아직 피가 뜨거웠던 나는 사표를 냈다. 그나마 당시 곽종면 면장님의 배려로 사표는 반려됐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나는 1971년 청원군 근무를 자원했다. 청원군 강내면과 강외면에서 4년 동안 근무했는데, 열심히 일해 산업계장으로 승진했다.

▲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가르침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사진이 걸려있는 전정하씨 책상 풍경.

 

공무원 직까지 걸고 던진 승부수

강외면에서 근무하던 1972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추수철에 때 아닌 궂은비와 진눈깨비가 며칠 동안 계속 내렸다. 농민들이 애써 추수한 벼가 비에 젖어 싹이 나고, 퀴퀴한 냄새가 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추곡수매 공판이 시작되었다. 청원군 13개 읍면별로 수매 책임 할당량이 내려왔는데, 강외면 성적이 가장 저조했다. 군청에서 추곡수매를 독촉하는 공문과 전화가 쇄도했다.

면사무소에서 이장회의가 소집됐다. 궂은 날씨로 벼를 말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농민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하면 좋으냐고 걱정하며 오히려 산업계장인 나만 쳐다보았다. 무언가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궁여지책(窮餘之策)을 내놓았다."지금 당장 시급한 일은 벼를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햇살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은 아스팔트 도로입니다. 여기로 벼를 가지고 나와서 말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잘하면 벼를 썩히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물론 '도로교통법에 위반된다', '교통사고가 나면 책임은 누가 지느냐' 등 반론도 제기됐다. 이제 남은 것은 누군가의 결단이었다.

"조치원 중봉 다리에서 강내면 미호천 다리까지 약 4km입니다. 자동차 한 대만 다닐 수 있도록 남겨두고 나머지 공간에 벼를 말립시다. 문제가 발생하면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추곡수매는 농민이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도로 이용자들도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민원이 제기되거나 사고라도 난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공무원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나도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나갔다. 아스팔트 도로에 우마차와 리어카에 벼를 실은 농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나에게 농민들이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해 강외면은 최상위의 추곡수납 실적을 거두었다. 면장님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연말에는 군수상도 받았다. 추곡수납 읍면장회의 때마다 군수님이 강외면 사례를 언급하며 칭찬했다고 면장님이 전해주셨다. 그때 공무원의 의지와 열정에 따라 주민의 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 전씨가 자신의 칼럼이 실린 신문 기사 스크랩북을 들어보이고 있다.

 

주민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민원실장

1974년 옥천으로 돌아왔다. 청원군에서 말렸지만 고향 선영을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간청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타향생활로 더 성숙해진 덕이었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공무원으로서의 재능과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주변의 인정도 받으며 근무할 수 있었다. 동이면 재무계장(1974년), 동이면 민원실장(1975년), 옥천읍 총무계장(1978년)으로 근무하던 시기는 내 공무원 인생의 황금기였다.

동이면 민원실장 시절 나는 친절과 청렴에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우선 주민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민원 처리를 기다리는 주민에게는 최대한 양해를 구했다."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민원실장 재임 때는 문제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외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매일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당시에는 민원이 해결되면 감사 표시로 담배 한두 갑을 사오는 농민들이 있었는데, 받지 않았다. 몰래 두고 간 담배는 민원인 대기실 탁자에 담배 상자를 만들어 비치해 나눠서 피우도록 했다.

서울, 대전, 청주 등 타지에서 우편을 이용해 고향으로 보내온 민원서류가 있었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수수료는 공제하고 나머지는 수고비로 사용하라'는 문구와 함께 소액환이 동봉돼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돈을 모두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다. 작은 돈이라 할지라도 욕심을 내다보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정감사 때마다 감사관이 민원처리부를 살펴보다가 "민원인이 보내준 수고비는 관행적으로 사용해 왔는데 왜 돌려주었냐"고 물었다.

1977년 이 사례가 행정회보에 소개됐고, 면민 추천으로 친절봉사상도 받았다. 연말에는 충청북도 '자랑스러운 공무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상록수공무원상(옥천군, 1966년), 새마을유공공무원 내무부장관상(청원군, 1972년), 우수공무원 내무부장관상(옥천군, 1976년)도 받았지만 주민 추천을 받은 것이어서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웃에게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덕불고 필유린, 德不孤 必有隣)'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밥상머리 교육 핵심이었다.

▲ 전씨가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펼쳐보이고 있다. 전씨는 중요한 기사나 칼럼, 자신의 글 등 기록물을 상당수 보관하고 있다

 

.■ 옥천도서관장 활동 좋은 평가 받아

18년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1980년 교육직 공무원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첫 발령지는 도내에서 가장 멀리 있던 단양교육청이었다. 1982년 옥천교육청으로 귀향했다. 1985년부터는 옥천여고 서무계장을 시작으로 중고등학교의 행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영동군 용문중, 옥천군 옥천중, 안내중에서도 근무했다.1995년 옥천도서관 관장에 임명됐다. 도서관장 임기 2년 동안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첫째, 취업정보센터에서 입수한 취업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했다. 둘째, 화장실에 이용자들의 정서 순화를 위한 금언과 명언을 부착했다. 셋째, 직원들의 복리후생 증진을 위해 쓰도록 했던 휴게실의 자판기 수익금을 이용해 화장실에 화장지를 비치했다. 넷째,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여름방학 동안에는 새벽 6시에 개관했고, 겨울방학 동안에는 종전 밤 8시로 되어 있던 폐관 시간을 1시간 연장해 밤 9시까지 운영했다. 다섯째, 전기 사용 계약 방식을 전환해 발생한 500만원의 소모성 경비를 활용해 의자, 책상, 도서를 구입했다. 여섯째, 서예교실 등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다음은 1997년 1월18일자 옥천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옥천도서관(관장 전정하)이 1996년 한 해 동안 이용자수 10만 명을 넘어서 1995년도 열람 현황에서 이미 군 단위 도서관 중에서는 열람자수 충북도내 1위 자리를 굳건히 해 문화 정보의 중심지로 서서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 설문조사 결과 이용객들의 48.2%는 우선 도서관 시설이 좋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좋은 데다 직원들의 친절을 꼽고 있다.전정하 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세심한 배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돋보인다."

▲ 전씨가 직접 쓴 일훈과 가훈.

 

▲ 전씨의 아내가 쓴 캘리그라피 작품.우리 집에는 가훈(家訓)이 있다

1998년 12월 옥천여중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했다. 행정직 18년, 교육직 19년, 도합 37년의 공직 생활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해 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조부님께서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孝)'를 가훈으로 정해주셨다. 효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일상적 실천을 보면서 자식이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다. 효자(孝子)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일훈(日訓)도 있다. 어머님이 '부지런히 일하자'로 정해주셨다. 어머님은 '참으며, 믿으며, 바라보며 웃으며 살자'고 강조하셨다. 이런 영향을 받아 나도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모님께 드리는 말씀'을 실천하도록 유도했다."저의 잘못이 있다면 혼내주세요. 저의 고민과 불만을 들어주세요. 저의 꿈과 희망을 들어주세요. 인생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세요. 제가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고 웃어주세요. 제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고 웃어주세요."

나는 1969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 왕창, 재원 두 아들을 두었다.

▲ 전씨의 기사 스크랩북
▲ 전씨가 그동안 기사를 스크랩해둔 스케치북이 책장 한 칸에 빼곡히 꽂혀있다
▲ 전씨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탐독'한다. 서재에 있는 작은 침대 옆에는 누워서도 책을 볼 수 있도록 책장과 스탠드가 마련돼 있다. 그 옆으로 전씨가 요즘 쓰고 있다는 시 습작 종이들이 쌓여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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