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반포문의 세종어제라 표시했는데 우린 왜 몰랐을까?
한글은 집현전학사가 아닌 세종대왕의 단독작품이다
10월 9일은 제573회 한글의 날이었다.
광화문에서 열리는 한글의 날 행사에 참석하였다. 세종대왕의 동상 앞에서 치르던 지난해와는 달리 북쪽 광장의 끝부분인 광화문 앞에서 치른 행사였다.
세종대왕 앞은 태극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국가 행사가 밀려난 셈이다.
이번 행사를 치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한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찾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아! 왜 이걸 여태 모르고 지나쳤지?” 하면서 내 자신을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기록을 보고도 몰랐다는 나의 반성이었다.
남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나무랐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동은 옛 연희궁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지만 연희궁의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가 없다.”는 서울역사의 기록에 대해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지도에서였다.
그 고지도는 내가 새로이 찾은 것도 아니고 서울시청에서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지도이다. 서울시청 고지도에는 분명하게 연희동 안에 “연희궁(衍喜宮)이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냐고 묻겠지만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세종임금님의 반포문에 분명하게 세종어제 훈민정음[世宗御製 訓民正音]이라는 표시가 있지 않은가? 세종어제란 세종임금님이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확인을 위해 유튜브에서 이를 찾아 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학자나 보도가 있는지를 살폈더니, 상당히 권위 있는 방송사의 역사스페셜에서 이를 방송하였다.
역사스페셜 –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GGi_ATrX8
이 영상을 보면서 ‘아하 그랬구나. 한글은 세종임금님이 신하들과 함께 만든 게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정황이 한글을 반포하기 전에 임금님이 만드신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 상소문을 쓴 사람이 바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였다. 만약에 집현전에서 만들었다면 왜 하필 집현전 책임자 최만리가 반대 상소를 올렸겠는가. 만드는 과정에서 반대를 했기에 그렇지 않았겠는가?
이는 분명히 다른 사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로 세종임금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글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해례본을 만들게 하였다. 만약 그들이 만들었다면 또 다시 해례본을 만들라는 명령을 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상소문을 받아들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너희들이 음운을 아느냐?‘ 질책을 하셨다고 했다. 지금까지 음운학을 같이 연구한 학자들이라면 이런 질책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 말은 세종임금님은 아시는 음운이론을 집현전 학자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또 다시 확인해 보아도 이것은 세종임금님이 음운학과 창제이론을 모두 아시고 만드신 것을 집현젼 학자들에게 실제로 써보고 그 이용방법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안내서를 만들라 지시가 아니었던가?
마지막으로 셋째 세종임금님은 모든 발명이나 새로운 일을 하는 경우 실록에 분명하게 그 사람의 이름을 밝혀 왔다. 비록 천민이었지만 장영실의 발명 같은 경우도 빠뜨리지 않는 치밀한 분이셨던 세종임금님의 실록 어디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역사스페셜의 중요 화면들을 캡쳐해서 재구성을 해 보기로 하였다.
다음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으로 한 번에 정리가 되어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글은 세종임금님의 단독 창작품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위의 두 개의 슬라이드를 차례로 살펴보시기 바란다.
천재적인 타고난 음감으로 아악을 정리하셨고, 편경의 음이 본음이 안 나는 것을 파악하여 다시 고치게 할 정도로 타고난 음감을 가지신 분이셨다. 세종은 음운학을 연구하고 발성기관의 발음 현상을 파악하여 전세계 어느 누구라도 반박하거나 뒤집을 수 없는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다. 한글은 온갖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세계유일의 문자로 평가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임금이신가?
사대에 물든 학자와 선비들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서 연구하였고, 정안공주에게 사투리와 어린이들의 말까지 수집하게 하여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게 표시할 수 있는 글자, 완전한 표기가 가능한 문자를 만드신 것이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딱하게 여기신 임금은 신하들의 ‘한자를 모르면 이두를 쓰면 된다’는 주장에 이두를 쓰자면 한자를 모르고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가면서 백성들이 쉬이 익혀 쓸 수 있는 글자가 바로 훈민정음이 아닌가?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3년 되는 해에 백성들이 한글로 정승들의 잘 못된 행태를 비난하는 방을 써 붙이는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보인 첫 반응인 셈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한글로 발전을 하면서 자음 세 글자와 모음 한 글자가 제외됨으로 린하여 세종대왕님의 반포시보다 사용의 폭이 상당히 줄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쉽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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