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석탄1리 최영세(86)·이옥임(84)씨 부부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 최영세(86) 이옥임(84) 부부입니다. 1960년 결혼한 부부는 과거의 추억을 묻는 질문을 받고 "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온 것만 기억난다"고 답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일만 했느냐 하면 "청춘을 돌려 다오"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이었다고 합니다.

똑똑한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홀어머니와 2남4녀의 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르치기 위하여 부부가 짊어져야만 했던 인생의 무게는 석탄리 안터마을 뒷산인 오봉산만큼이나 무거웠을 터입니다.

대청댐이 들어서며 수몰되기 전까지 부부가 살던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그러니까 가장 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네에서 가장 낮은 곳에, 그러니까 가장 앞에 위치해 있는 집이 됐습니다.

사람살이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맨 끝에 있는 것 같아도 어느 날 보면 맨 앞에 서 있곤 합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주변도 돌아보면서 살아가는 넉넉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당장의 이익보다 먼 훗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중요하다는 것이 최영세 씨의 생각입니다.

▲ 1영세·이옥임씨 부부가 큰 아들의 결혼식 사진 앞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

 

겨울에도 가마니 짜거나 나뭇짐 날랐다

나는 1933년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아버지 최승만과 어머니 김북면은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는데, 나는 둘째였다. 형과 동생은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나와는 아주 대조적인 인생을 살았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은 체신고를 나와서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두 살 적은 동생은 항공대를 나와서 KBS와 MBC 등 방송국에서 근무했다. 한때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나는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흙과 씨름하며 일했다. 내가 23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일과 농사는 더욱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논밭이 3천 평이었지만 천수답이라 수확이 그리 많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기라도 하면 소출이 눈에 띄게 줄었기에 먹고 사는 것을 항상 걱정해야만 했다.

나는 1960년 이원면 유원리 처녀 이옥임과 결혼하면서 명실상부한 가장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시사철 들판에 나가서 일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논매기, 모내기, 김매기, 벼 베기 등 해야 할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경운기도, 제초제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정직하게 몸뚱이로 감당해야 했다.

도시로 나간 동생을 공부시키려면 농한기에도 일해야 했다. 겨울에는 가마니를 짜거나 땔나무를 해왔다. 가마니를 짜려면 새끼줄부터 꼬아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끼줄 120발을 꼬았다. 가마니 하나를 짜려면 새끼줄 60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끼줄을 꼬아 놓은 다음 소죽을 끓였다. 낮에는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갔다. 땔나무를 쌓아놓으면 부잣집에서 사갔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새끼줄을 가져다 놓고 호롱불 밑에서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 짜기는 혼자서 할 수 없었다. 늘 아내와 힘을 합쳐 가마니를 짰다.

▲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두 사람. 손을 맞잡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말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벌어진 딸 운동화 꿰매주며 삼킨 눈물

날마다 일만 하며 살다 보니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여윳돈이 없었기에 또래와 어울리지도 못했다. 교제를 할 줄 모르니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살았다. 그저 일만 하는 것이 내 팔자려니 하고 살았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하나둘 태어났다. 딸만 내리 넷을 나았다. 그런 다음 아들 둘을 얻었다. 딸 넷은 줄줄이 군동초, 옥천여중, 옥천여고를 다녔다. 학교에 내야 하는 돈을 꾸러 이웃에 가면 이런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남들처럼 딸들을 공장에 보냈으면 돈을 벌어다 줄 텐데. 쯧쯧."

그러고 보니 학교에 내는 돈을 제 때에 준 적이 없었다. 둘째딸이 고교 입시를 보러 가던 날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날 딸의 운동화가 벌어져 도저히 신고 갈 수가 없었다. 아내가 실과 바늘을 가지고 나와서 꿰매주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팔자란 뭘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두 가지 추억이 있다.

젊은 시절 군대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경북 영천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동료 두 명과 함께 읍내에 있는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한 노인이 사주를 봐 주었다. 먼저 다른 두 명의 사주는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 관상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꾸만 캐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마흔 살까지 죽을 고생만 할 팔자야."

20대 초였던 당시의 나에게는 마흔 살은 까마득한 미래였다. 그나마 노인이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래도 늙어서는 살림이 필거야."

딸 넷을 낳고서야 첫 아들을 얻었다. 너무 귀한 아들이라 한 스님을 찾아가 작명(作名)을 부탁했다.

"장수하려면 돌림자를 쓰지 말아야 해."

그래서 맏아들 이름은 두 개가 되었다. 호적과 족보에 올린 이름이 다르다. 호적에는 '성호'라고 올리고, 족보에는 돌림자 '식'이 들어간 '민식'이라고 올렸다.

아내의 태몽(胎夢)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내는 칡넝쿨 우거진 산중에서 밤 세 알을 줍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우리는 아들 셋을 얻을 거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둘째아들 '선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에 워낙 힘들게 살다 보니 사주와 작명에라도 기대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최영세, 이옥임씨 부부가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선택할 때의 기준은 '미래에 대한 투자'

인생이란 수많은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의 기준은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동생을 공부시킨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다.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300평의 땅을 팔았을 때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14년이 흐른 뒤에 그 땅을 되살 수 있었다. 나중에 성공한 동생이 땅을 사 주기도 했다. 천수답이 아닌 괜찮은 땅이어서 그것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1995년은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해다. 그 해에 3천 평 넓은 논과 밭에 모두 참깨를 심었다. 사람들이 논에 벼를 심지 않은 나에게 미쳤다고 했다. 가을에 참깨를 거두니 12가마나 나왔다. 당시 돈으로 740만원을 벌었다. 마침 그해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만약 벼를 심었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큰 피해를 봤을 것이다. 참깨를 심은 덕에 피해는 면하고 오히려 돈을 벌었다.

이번에는 참깨 농사로 번 돈에 송아지를 내다 팔아 받은 돈을 합쳐 축사를 크게 지었다. 당시에도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만약 번 돈을 은행에 예금했다면 곶감 빼 먹듯이 한푼 두푼 꺼내서 모두 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축사를 짓는 '투자'를 선택했다.

축사를 지었으니 소를 키워야 했다. 적을 때는 5~6마리, 많은 때는 7~8마리의 소를 키웠다. 덕분에 6남매를 출가시킬 때마다 키우던 소를 팔아 결혼 자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단 1평의 땅도 팔지 않았다. 당시 축사 신축 허가를 받으려고 관청을 수없이 찾아갔다. 동이면사무소 23회, 옥천군청 3회나 된다. 허가 기준이 강화된 뒤에 축사를 지으려고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보다 한참 전인 1980년에는 1400평의 땅을 샀던 적이 있다. 당시에도 나에게 미쳤다고 했다.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다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다리가 생기면서 헐값에 사들인 땅의 가치가 치솟았다.

▲ 어려웠던 시절에도 축사를 지어 나름의 투자를 했다. 최씨가 축사 안 소를 살펴보고 있다.

 

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흔적 남아 좋아

때로는 "내 청춘을 돌려 다오"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나와 아내는 평생 일만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일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재미없고 심심하다. 일을 하면 반드시 뭔가 흔적이 남고 표가 난다. 하지만 놀면 표도 나지 않고 쌓이는 것도 없다. 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나는 45세가 되던 해인 1978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부고장을 돌리다 과속 차량에 치였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크게 다쳤다. 당시 셋째 딸이 수학여행을 가 있었는데, 밭에서 일하다 마을 주민에게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는 셋째

딸에게 사고가 난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나는 시신경에 손상을 입어 지금도 물체가 2개로 보인다. 당시 의사는 쉬어야 한다고 했지만 퇴원한 나는 곧바로 들판에 나가서 일했다.

어머니의 적선을 생각하면 남을 도우며 살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교통사고를 당한 이듬해 고아가 된 옆 동네 12세 소년을 데려다 키웠던 사연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18세가 되어 서울로 갈 때까지 우리 부부는 한 식구처럼 키웠다. 늦은 결혼을 했는데 우리 식구가 모두 가서 축하해줬다.

2남4녀의 자식이 모두 10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자식들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건강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 가난하고 팍팍했던 젊은 시절, 사진 하나 추억으로 남기기도 어려웠던 때를 지난 지금. 장성한 자녀들이 찍어준 행복한 모습이 집안 구석구석에 사진으로 남아있다.
▲ 최영세씨가 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 하얀색 집은 큰 아들이 짓고 있는 집이다.

 

집안을 일으킨 원동력

어머니의 '선행'과 딸들의 '감사'

최영세 씨는 힘겨운 시기를 잘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었던 까닭이 어머니의 선행 즉 적선(積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안터마을은 지양리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특히 최씨 집은 장에 다녀오던 지양리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마침 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 사람들이 우물 앞에 앉아서 쉬고 있으면 어머니는 살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집으로 들어와서 쉬어가도록 해요." 어머니는 끼니가 되면 배급받은 것이나마 보리밥을 뜨겁게 끓여서 만든 죽이라도 한 사발씩 먹여서 보냈다. 정 먹을 것이 없을 때는 가마솥에 펄펄 끓인 물이라도 내놓았다. 추운 겨울 장날이면 안방은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동네를 찾아든 보따리장수라도 있을라치면 기어이 하룻밤을 재워서 보내셨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최영세 씨는 어머니의 이런 넉넉한 마음 덕분에 자식들이 별 탈 없이 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딸 넷은 하나같이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공부도 잘 하고 리더십도 있어서 교사나 주민들이 '반장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딸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쉽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우리를 공장에 안 보낸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대학은 아니지만 여고까지 공부시켜 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중에 딸들이 이렇게 말해주며 위로해주었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지금도 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는 딸들은 만학도(晩學徒)가 되어 대학을 다녔다. 특히 둘째딸은 50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했고, 셋째 딸은 자신의 딸과 함께 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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