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도 부르기도 거북한 노래

<2019. 10. 24.>

1970년대 말 대학 시절 흥사단 행사에 가면 애국가를 4절까지 소리 높여 불렀다. 그게 애국심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 무렵 그 작곡자 안익태가 친일시비를 받는다는 사실은 대략 알았었어도 애국가를 불렀다. 별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공공기관 공식행사의 첫머리인 국민 의례를 따라 할 때 마음이 편치 않다. 대체로 애국가 제창 때 난감하다. 부르기는 싫고, 안 부르자니 꺼림칙하다.

올해 1월에 이미 드러난 그의 친일뿐만 아니라 ‘안익태와 나치의 관계’를 밝힌 연구(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1.)가 나왔다. 이해영(한신대학교 교수)은 안익태가 독일의 ‘나치’와 어떤 협력·우호 관계를 맺었는가를 추적했다. 이 교수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안익태는 1944년 4월18일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21일에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했죠. 그런데 같은 시기에 카라얀도 파리에서 지휘했습니다. 19일과 20일이었죠.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대에 파리에서 지휘봉을 들었던 것인데, 이 음악회의 성격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히틀러의 생일 축하 연주회였습니다.”([인터뷰] 이해영 교수 '안익태와 나치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경향신문, 2019.1.13.)

그의 친일 행각이 ‘나치’ 협력으로 이어졌다는 정황 탓에 애국가는 듣기도 부르기도 싫어졌다. 그 곡조에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보편가치를 파괴하는 군국주의 세력에 협력한 작곡자의 영혼이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니, 닭살이 돋는다. 자주 듣고 부르다 보면 그 못된 의식이 내 세포에 젖어 들어 유전형질까지 바뀌겠다는 걱정이 올라온다.

나는 2005년에 “광복 60돌 기념 2005 제2회 회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 상하이에서 충칭 그리고 경교장까지 1만3천 리 임정 대장정” 순례(2005.4.13.~4.24.)에 참여했다. 대장정 순례지는 ‘상하이[上海, 1919.4.11. 임정 수립]~항저우[杭州, 1932]~자싱[嘉興]~하이옌[海盐]~쩐장[鎭江, 1935]~난징[南京]~한커우[漢口]~창사[長沙]~광저우[廣州,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상하이~서울 경교장[京橋莊, 1945.11.2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이다. 윤봉길 의사의 중화민국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의거(1932년 4월 29일) 이후 임시정부가 겪은 수난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9,600km 거리)에 맞먹는다. 그렇게 봐도 잘못은 아니겠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장정” 순례 지도>
출처: 경교장 복원 사업회-임정대장정 순례단(kyungkyojang.or.kr/tour.html)

당시에 찍은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의 사진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먹먹했다. 임시정부의 대장정은 날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피는 마르고,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풍찬노숙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 대장정 순례 때 임시정부의 기착(寄着) 지역을 찾으러 다니며 비행기, 버스, 열차 등을 탔다. 그래도 일행은 힘들어했다. 독립운동가 여러분께 송구스러웠다.

▲ 우천 조완구, 동암 차이석 선생 회갑기념(1941년 9월23일 충칭)
왼쪽부터 조성환, 김구, 이시영, 뒷줄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선생
출처: 경교장 복원 사업회-임정대장정 순례단(kyungkyojang.or.kr/tour.html)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8.15 광복 74주년‘이다. 조그만 일이라도 실천해보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친일시비를 받는 작곡자의 가곡은 듣지도 부르지도 말자.‘ 놀라웠다. 내가 가끔 흥얼거리는 가곡은 대부분 작곡자가 친일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김동진의 가고파, 내마음, 목련화, 수선화, 봄이 오면, 김성태의 동심초, 한 송이 흰 백합화, 박태준의 동무 생각, 오빠 생각, 이흥렬의 꽃구름 속에, 바위고개, 봄이 오면, 어머니의 마음, 옥잠화, 조두남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뱃노래, 선구자, 현제명의 나물 캐는 처녀, 니나, 희망의 나라로, 홍난파의 봄 처녀, 봉선화, 사공의 노래 등이 바로 그런 가곡이다.

왜 그런 노래가 내 귀에 익었을까? 우선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워 불렀다. 음악회에서도 많이 들었다. 당대에 이름 높았던 그 작곡자들의 제자에서 제자로 노래는 전달되어 왔다. 그 제자나 그를 사숙(私淑)한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8.15 광복 이후 수많은 가곡이 발표됐음에도 친일에서 자유로운 작곡자의 가곡을 학교 교육에서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제 국민의례 때에 안익태의 ‘애국가’ 대신에 ‘독립군가’를 속으로 부르려고 한다. 그 심정의 배경은 앞에서 이미 제시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처럼 ‘애국가’를 부르면 ‘동해 물’과 ‘백두산’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소리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각각 ‘해물’과 ‘두산’으로 들린다. 작곡자가 애국가의 첫 도입부를 그렇게 작곡해놨다고 한다. “우리가 ‘해물’과 ‘두산’이를 더 이상 애타게 부르지 않으려면, ··· ‘동해물과’에서 흉측하게도 ‘해’에 붙어 있는 불쌍한 점을 ‘동’으로 옮겨 붙이면 되는 것이다.”(구자범, “애국가, ‘해물과 두산이’가 부끄럽다”, 한겨레, 2014.10.03.)

▲ <애국가의 첫 도입부>
▲ <‘동해물과’에서 ‘해’에 붙은 점을 ‘동’으로 옮겨 붙인 악보>

출처: 구자범(광주시립교향악단 9대 지휘자, 2009~2011), “애국가, ‘해물과 두산이’가 부끄럽다”, 한겨레, 2014.10.03. 

한편, 대체로 작사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나 한 번쯤은 대략 살펴봐야 하리.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는 가곡 <남촌>(김규환 작곡, 1978; 문화포털 예술지식백과)의 시작 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애창하는 곡이다.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추천하는 곡이라고 한다. 어찌하랴, <남촌>의 본래 시는 <산 너머 남촌에는>(1927)이고, 그 시인은 김동환(金東煥, 1901~1958?; 위키백과)이다. 광복 이후에 김동환은 친일 인사로 꼽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받았고(위키백과), 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12, 일부개정)에 의거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한, 가요 <푸르른 날>(송창식, 1974)의 본래 시(1948)는 친일 행위도 모자랐는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두환을 찬양한 서정주가 지었음을 기억해야 하리.

찬찬히 세어보니 새로운 기분으로 배워 부르고 싶은 가곡이 제법 많다. 김규환(金奎桓, 1925~2011)의 기다림, 김동환(金東煥 1937~2020)의 그리운 마음, 김원호의 언덕에서, 김정수의 임 그리는 마음, 박경규의 그리운 사람아, 박영주의 마을, 변 훈의 떠나가는 배, 송 은의 청산은 깊어 좋아라, 이수인의 내 맘의 강물, 불타는 강대나무, 아카시아 꽃, 이호섭의 기다림, 옛날은 가고 없어도, 임긍수의 사랑하는 마음, 해 질 녘 풍경, 정세문의 시골 아가씨, 채동선의 고향, 한만섭의 낙화(落花), 황덕식의 애모 등이다.

만일 내가 공식행사를 기획한다면, ‘독립군가’를 부르며 시작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마무리하고 싶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애국가> 다음의 문단은 2022,7.12.에 추가한 부분입니다.

 관련기사: 가요 ‘푸르른 날’과 5월 광주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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