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월한 것인가

조형식 주주통신원l승인2019.10.31l수정2019.10.3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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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요일에 교회의 설교를 들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취미 아닌 취미가 생겼다.

지난 주에는 설교 중에 "식물은 동물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은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은 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성경의 기적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 하므로 그냥 믿는 수 밖에 없다는 요지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러면 식물과 동물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존재일까 생각해 보았다.

설교에서도 암시를 받았듯이 언듯 생각하기에는 진화의 과정에서 동물이 더 고도로 진화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보편적이리라.

그래서 동물이 식물보다 더 우월하다고 당연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사려깊이 진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식물과 동물은 처음부터 생명 유지의 방법이 달랐거나 진화의 방향이 다르게 분화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열등을 극복하고 진화하여 우월한 종은 번성하고 열등한 종은 도태된다고 배워 알고 있지만 생태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식물이 동물보다 열등하다면 식물은 도태되고 동물만 번성해야 하지만 자연환경 생태계는 오히려 식물들이 지구의 표면을 아름답게 덮고 가꾸면서 동물들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발산하고 초식동물들의 먹이가 되어주며 동물들의 안식처, 휴식처가 되어 주는 어떻게 보면 동물들의 어머니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결코 식물이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 할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은 땅에 묶여 이동 할 수 없으므로 동물보다 단순하며 열등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식물과 동물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서 창조주(?)의 심오한 설계가 있고 그에 따라 서로 도움을 주며 생명을 유지하도록 진화해 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각자의 역활과 존재의 목적이 처음부터 서로 다르게 진화되어 진다고 느껴진다.  

동물이 모든 진화의 과정을 거친 월등한 존재라면 열등한 식물로도 돌아가 살 수 있어야 식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하겠지만 동물은 하루도 식물로 돌아가 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식물도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이 부럽다고 동물로 살 수 없다.

이것은 진화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분화된 생태계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동물과 식물은 각자의 타고 난 생태계 환경의 유전자 대로 사는 것에 가장 큰 행복을 체감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생명체의 가장 고도화 된 신의 피조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성경에서 인간에 대해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을 다스려라"라고 언급한 것에서 유래한 인간 우월의식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어느 동물과 식물보다도 나약하고 생존능력이 없는 가장 무능한 존재인 것이다.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는 문명과 인공의 집단적인 협력 속에서 살고 있으며 무인도에서 자연상태로 산다는 것은 한계가 있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자연 속에서의 생존능력은 완전히 퇴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닭이 날기를 거의 포기했듯이 인간은 자연상태의 삶을 모두 상실했다.

거대한 문명과 인공의 한 세포로 살다가 문명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 성균관대학교 명륜정 앞의 거목. 하늘을 휘어잡은 소우주를 연상시키는 거목의 자태

나는 지금도 수령 수백년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면 경외감이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손을 모으고 우러러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성황당 우람한 나무에 치성을 드렸으리라.

자연의 혹독한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변화시키며 비바람을 맞고 혹한을 견디며 의연하고 장대하게 생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 환생한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나무의 아름다움과 아낌없이 주는 생태에 감동한 표현이리라.

식물은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고 터잡은 흙에서 생명을 피워 내지만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식물을 비롯해 다른 동물 등 반드시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 할 수 있다.

생명을 죽여 먹으므로 비로소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동물은 불가피하게 살생을 통해 존재하는 부끄러운 원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아름다운 것인가

누가 더 우월한 것인가

 


편집 : 객원편집위원 김혜성(cherljuk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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