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천일동안 1

좋아하는 소설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책장을 넘기던 중 잘 말려진 단풍잎 한 장을 발견했다. 작년 가을이었을까. 재작년 가을이었을까. 단풍잎을 바라보다 보니... 가을볕에 물든 공원길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계절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늘 내 옆자리에 있던 귀여운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얼른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은, 아기티를 벗지 않은 아들의 얼굴이. 그리움에 젖어 지난날들을 천천히 꺼내 보았다. 아들과 함께 했던 천일의 행복한 기억을 말이다.


신기한 일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에 풍화되어 아름다운 것들을 주로 남기는가보다. 때때로 고단하게도 했던 육아의 거친 알갱이들이 지금은 한없이 작아져 바람에 날아가고 함께 웃고, 먹고, 걷던 행복한 시간들만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엄마 껌딱지와 아들 껌딱지는 좋을 때도, 싫을 때도 늘 살을 부대끼며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그런 사이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아들과 무얼하지?’하는 고민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어떤 날은 그런 고민을 할 새도 없이 즐겁게 하루가 흘러갔지만, 또 어떤 날은 애써 아들과 놀아주며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 인형들과 나란히


아들은 여느 남자 아이들과 같이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엄마와 있을 땐 몸을 움직이기 보다는 주로 입을 움직이며 놀기를 좋아했다. 아들에게 처음으로 인형을 주던 날이 기억난다. ‘남자 아이인데 인형을 좋아할까?’하는 생각과 함께 인형을 보여주었는데 웬걸, 아들은 너무나 황홀한 표정으로 인형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집에 인형이 하나 둘 늘게 됐고 아들은 그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인형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고선 매번 다른 상황을 만들어 엄마와 인형 놀이를 했는데, 한번 시작하면 몇 시간씩 하기도 했다. 또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놀이가 있는데 일명 ‘마이아사우라 놀이’라 불리는 엄마공룡과 아기공룡 놀이다. 공룡 알이 된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들을 엄마 공룡이 품어 주면 “응애~ 응애~”하며 알을 깨고 나와 엄마 공룡과 함께 소꿉놀이도 하고, 엄마 공룡을 위협하는 티라노사우르스를 물리치기도 하는 그런 놀이였다. 내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놀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자주 시계를 쳐다보며 애아빠가 빨리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래서 별 다른 일이 없으면 하루 한 번은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갔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지루하지 않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 앞 놀이터와 유모차를 끌고 다녔던 동네 공원, 그리고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이면 가는 아트플랫폼 거리와 인천 중구쪽의 다양한 카페들을 번갈아가며 놀러 다녔다.

 

▲ 공원에서 도토리를 한 손 가득 줍고 신난 아들

 

유모차를 끌고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의 소음과 마트에서 내보내는 음악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공원으로 걸어 들어오면 이내 고요해지고 새소리가 났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탁 트인 하늘을 함께 바라보다가 이리저리 바쁜 개미들의 세상을 들여다보기도 했고, 살구나무 아래 떨어진 시큼한 살구를 맛보기도 했으며, 땅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를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그 후 며칠 동안 도토리를 주우러 공원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보면서 나뭇잎 색이 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예쁜 단풍잎을 찾아 줍곤 했다.

공원 산책이 무료해질 때면 가까운 카페 나들이를 갔다. 아마 내 아들은 또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카페를 ‘탐방‘해 본 아이일 것이다. 커피 덕후이자 카페 덕후인 나는 인천 중구쪽에 있는 카페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 이런 엄마를 둔 덕에 아들은 일찍이 카페란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 생겼다는 카페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 손을 잡고 찾아갔다. 그리고 여기저기 감상하며 “여기 너무 좋다~그지?”하면 아들은 착하게도 “응. 좋아~”하고 맞장구 쳐주었다. 아들은 주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누리다가 아들이 슬슬 남자 아이다운 부산스러움에 발동이 걸리면 서둘러 카페를 나와야했다.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아들과의 데이트였다.

아들과의 추억들을 꺼내놓고 보니 참 즐겁고 유쾌하기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웃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현실의 온도차를.

집안일은 쌓여 있는데 끊임없이 놀아달라는 아이, 하루에 몇 번은 꼭 사고치는 아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징징대는 아이, 막무가내로 떼쓰는 아이… 이렇게 내 맘처럼 되지 않는 아이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고된 일이다. 그래도 애써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고 참아보지만 인내의 한계에 부딪혀 결국엔 감당할 수 없는 화가 폭발하고 마는데, 그땐 이제껏 나도 본 적이 없는 내 안의 괴물이 튀어나와 아이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만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미안함에 한숨을 쉬기도, 눈물을 짓기도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엄마로서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때론 우울감이 밀려들어 왔다. 원래 육아라는 것이 다 그렇다지만 이렇게 합리화하며 지내기엔 아들과 나의 미래가 너무 가엽게 느껴졌다. 나는 행복한 아들과의 시간을 위해 서둘러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은진 주주통신원  juj05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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