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북면 대촌리에 사는 류항보 씨(80)입니다. 방아실 혹은 방화실(芳花室)로 불리는 바로 그 마을이 그의 고향입니다. 류 씨는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활로를 모색하다 향수(鄕愁)를 이기지 못하고 24년 만에 귀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의 습관으로 만든 것이 봉사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선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운명이 된 봉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문화 류씨 종친회 총무와 회장을 맡게 되었고, 최근에는 마을 노인회 회장과 군북면 노인회 부회장,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옥천군지회 지회장 등으로도 봉사하고 있습니다.

류 씨는 고향을 세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였던 유년 시절에 부모를 따라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가서 살다가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돌아왔고, 20세 무렵에 군대에 입대하느라 고향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은 것이 류 씨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류항보·박선호씨 부부는 여든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블루베리, 엄나무, 산딸기, 달래, 복숭아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염소도 기르며 바쁜 하루를 보낸다. 류씨 부부가 염소 축사 옆 블루베리 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 1연)

항상 항(恒) 도울 보(輔), 운명적 내 이름

나는 1939년 옥천군 군북면 대촌리에서 태어났다.

1506년 창봉 류 근 선생이 화산 아래 터를 잡고 세운 문화 류씨(文化 柳氏) 집성촌인 대촌리는 두 개의 또 다른 마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외지인들은 '방아실'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방화실(芳花室)'이라 부른다. 대촌리는 아랫말, 웃말, 둔턱골로 나뉘는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랫말이다.

마을 이름도 두 개였듯이 내 이름도 두 개였다. 문화 류씨 집성촌인 대촌리에선 돌림자를 써야 했다. 그래서 내 이름은 '우열(芋烈)'로 지어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집에서는 '항보'라고 불렀다. 한자로 쓰면 항상 항(恒)에 도울 보(輔)였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실제로 평생 남을 돕는 봉사를 하면서 살아왔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2연)

■ 갈까마귀 떼 울부짖던 압록강을 건너서

나는 고향을 세 번 떠났다가 돌아왔다.

첫 번째 출향과 귀향을 체험한 시기는 10세 전후 무렵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우리 가족은 중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에서 큰형이 제과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4~5년 동안 지내다 귀국했다.

우리 가족은 추위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엉금엉금 걸어서 건넜다. 자칫 얼음이 깨지면 풍덩 빠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귀국길이었다. 압록강을 건널 때 갈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은 채 울부짖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늦은 나이에 대정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두 번째 출향과 귀향을 체험한 시기는 20세 전후 무렵이었다. 군대에 입대해 약 3년 동안 병영에서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귀향한 것이다. 부산에 위치한 육군 부대였는데, 부대장의 신임을 받아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선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했다.

막상 제대하고 귀향하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어렵게 자전거 한 대를 마련해 쌀장사를 시작했다. 수몰되기 전이었던 당시의 대촌리는 116가구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농민들에게 쌀을 살 때는 '되'나 '말'이 넘치도록 고봉으로 측정했고, 대전에 나가서 쌀을 팔 때는 되나 말의 높이에 정확히 맞추어 측정했다. 그렇게 하면 한 말에 보통 4~5홉 정도가 남았는데, 그것이 내가 챙길 수 있었던 이문으로 일종의 유통 비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쥐꼬리만큼 차익을 남겨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시, 특히 서울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  빛바랜 사진첩 속에는 류항보·박선호씨 부부의 약혼 당시 모습이 간직돼있다

23세에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소개받아 결혼했다. 동갑내기 아내인 박선호는 당시 이원면 역전에 살고 있었다. 생활력이 강했던 아내는 세천에서 두부장사를 했다. 이듬해 맏아들 영덕이 태어났다. 아이를 도시에서 공부시켜야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져갔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3연)

■ 24년 동안 23회 이사, 부평초 서울 생활

나는 26세가 되던 해인 1964년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상경했다.

아내와 아들을 고향에 남겨 두고 먼저 단신으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터전을 잡기 위해 보낸 약 2년은 한마디로 '맨땅에서 헤딩하기'였다. 밑천과 연줄 하나 없이 시작한 도시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88년 귀향할 때까지 24년 동안 무려 스물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거의 1년에 한 번은 이사를 다닌 셈이었다.

상경해서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동작구 상도동이었다. 그곳에 엉성하게 지어놓은 니트공장(일명 요꼬공장)이 있었다. 따로 묵을 곳이 없었던 사람들 15명이 공장에서 함께 일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우리는 낮에는 편직기계를 돌리고 밤에는 그곳에서 칼잠을 잤다. 임시 건물이라 추위를 온전히 가릴 수 없었고, 이와 빈대까지 들끓어 마음 놓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달리 기댈 곳이 없었기에 그 추운 요꼬공장에서 두 해 겨울을 보내야 했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에 아내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그 무렵 나는 선배가 운영하던 무역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플라스틱 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던 회사였는데, 그곳에서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컵과 쟁반 등 신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한 달에 25만개의 제품을 생산한 적도 있었다.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소소한 행복이 우리 부부를 위로했다. 1965년 맏딸 영미가 태어났고, 1968년 둘째아들 영남이 태어났다. 거의 서울 사람이 되어갈 무렵 나는 독립해 건축업을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 곳곳을 다니며 약 30동이 넘는 주택을 지었다.

서울에서 거주지는 수시로 바뀌었다. 상도동에서 시작한 서울 생활은 아현2동, 공덕동, 제기동, 아현1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내가 절감한 것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사 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살 수 있는 것만도 큰 영광이자 행복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4연)

▲ 힘겨운 생활 속에서 소소한 행복은 늘 부부를 웃게 만든다. 두 사람이 함께 가꾸는 텃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 1988년 지천명의 나이에 선택한 귀향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공장과 회사를 다니고, 집짓기 공사만 한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에서 각종 봉사 활동을 했다. 통장, 새마을지도자, 자율방범대원, 지역정화위원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으며 1인 다역을 수행했다. 당시 한 정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지역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던지 나중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서울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향수(鄕愁)를 이겨낼 수 없었다. 꼭 50세가 되던 해인 1988년 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 옥천으로 돌아왔다. 물론 1979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고향은 이미 수몰된 상태였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선 조용히 농사만 지으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봉사 활동의 습관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일까. 제일 먼저 종친회(문화류씨 충경공파 천안공 종중회) 일을 하게 되었다. 종중 땅이 84필지나 되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종친회에 참석했다가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 지적하다 대뜸 총무를 맡게 되었다. 총무를 맡으며 장부와 기장을 갖추고 체계 있게 운영되는 종친회로 바꾸는 일에 기여했다.

나중에는 종친회 회장도 맡았다. 회장을 맡으면서 회장 임기와 이사회 구성 등을 명시하는 등 정관의 기본적인 틀을 짜는 일에 집중했다. 12대조가 칠백의총에 묻혀 있는 의병이라 사단법인 임란공신 충의선양회 이사도 맡았다. 나아가 문화류씨 대종회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종친회에서 시작된 봉사는 마을과 지역에 대한 봉사로도 이어졌다. 지금 나는 군북면 방화실 노인회 회장과 군북면 노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사단법인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옥천군지회 지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5연)

■ 열심히 사는 사람만 행복 누릴 수 있어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으라면 아내 박선호를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초반에 가난한 나에게 시집와서 60년 가까이 동반자가 되어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혼자 서울로 올라가 터전을 잡을 동안 두부 장사를 하면서 아이를 키워주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수없이 이사를 다녔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주었다.

나는 아내 박선호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낳았다. 그리고 영덕, 영미, 영남 3남매가 다시 6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만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릴 것이다." 내가 후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종친회 어른 중 한 분이 내 호를 '방산(芳山)'으로 지어주었다. 남은 인생도 방화실을 지키는 산처럼 살 것을 다짐해본다. 내 이름 항보(恒輔)처럼 항상 남을 돕는 인생을 살겠다.

▲ 낡은 앨범 속 옛 사진을 보며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 옛 사진을 찾아보던 류씨 부부가 1980년 판문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류항보·박선호씨 부부는 여든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블루베리, 엄나무, 산딸기, 달래, 복숭아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염소도 기르며 바쁜 하루를 보낸다. 류향보씨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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