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하고자 목숨 받쳐 싸운 어모장군 전방삭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 장군 전종실 시민통신원l승인2019.11.19l수정2019.11.2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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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삭(全方朔) 장군은 1545년 보성군 우산리 택촌마을에서 부사 전윤부(全潤富)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공의 자(字)는 일진(日進)이요 호(號)는 규암(葵庵)이다. 1575년(선조 을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에 재직 중 1592년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올랐다.

그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 세자를 호종하고 피신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군량과 병력 동원 차 광해군 세자가 전주에 왔을 때 “고향땅에 내려가 몸소 왜적을 무찌르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간청하자 세자는 그 뜻을 칭찬하며 허락하였다.

이순신이 21세 때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 딸 방수진과 결혼했다. 장인 방진으로부터 무술을 연마할 때, 좁은 고을 보성의 활터와 경마장은 겨우 한 곳씩 있었기에 무예를 연마 중인 전방삭과 이순신은 매일같이 만나다시피하여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인이며 옛 친구인 이순신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하옥되자 수군은 와해되어 주인 잃은 형세가 되었다. 전방삭 장군은 뜻한 바 있어 미리 보아 두었던 보성군 벌교읍 영등(당시지명 : 낙안군 남하면 연등)에 진지를 마련하여 주로 보성과 벌교 열혈 청장년 의병 300명을 모집하여 훈련시켰다. 본인의 전 재산을 헌납하여 군량미로 사용하는 모습을 본 일가친척 외에도 애국심에 불타는 많은 분들이 다투어 군량미를 헌납 하였다 한다.

▲ 전방삭 장군의 영정

공께서는 다른 장수와 달리 훈련원(訓練院 : 현제의 논산 훈련소와 같은 곳)에 재직 시 습독관(習讀官 : 현 훈련소 교관) 활동을 경험으로 정예병으로 훈련한 의병(당시에는 관군의 훈련은 있었으나 의병에게 무예 훈련은 거의 없었으므로 공의 의병훈련이 특이 했다고 보임)을 이끌고 왜적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오호라 ! 일제강점기에 벌교 주재 일본 헌병이 전방삭 장군이 일본군을 무수히 살상한 사실을 알고는 유품이 보관 되어있는 장자 후손의 집을 급습하여 집을 불 지르고 유품을 빼앗아 갔다. 남아 있는 것은 이웃에서 빌려간 덕분에 단 한권 ‘선무원종공신록권 뿐이었다. 분통하고 애통하다. 공께서 후손에게 남겨준 것은 오직 애국충성 정신이었다. 무일푼 유산으로 배움은커녕 의식주 해결에 허덕이는 생활로 공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사업은 망각할 정도였다. 그래도 구전으로 전하는 바 있어 오늘에야 사실을 찾아 드러내기에 온갖 힘을 쏟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재산과 목숨을 바친 후손들의 생활과 거의 흡사한 일이다. 그러나 후손은 이에 좌절 할 수 없어 백방으로 조사 연구 결과 역사학자와 동료 장수들의 기록을 찾아내어 다음과 같은 전투 기록이 확인 되었다.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1) 1597년 5월 2일 왜교전투(현 해룡면 신성리)
2) 1597년 6월 10일 흥양 첨산전투(현 고흥군 동강면 첨산)
3) 1597년 6월 16일 흥양 망저포전투(현 고흥군 동강면 망주)
4) 1598년 3월 일 보성 예진전투 (현 보성군 득량면 예당)
5) 1598년 4월 8일 흥양 첨산전투(현 고흥군 동강면 첨산)
6) 1598년 4월 일 벌교포, 영등포, 장암포, 대포지역으로 왜적침투 쫒아냄
7) 1598년 6월 6일 흥양, 보성, 낙안 전투 (현 고흥, 보성, 낙안)
8) 1598년 6월 8일 보성 안치전투(현 보성군 안치산 : 일명 기러기제)
8) 1598년 7월 12일 보성 죽전벌전투(현 보성군 득량면 심정 3리 성재마을)

와 같은 공적으로 1605년 4월 16일 선조 임금으로 부터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선정되어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았으며 훈련원정(訓練院正)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추증되었다. 위의 내용은 두산백과와 참여백과. 호남절의록. 호남충의사록등에 기록되어있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후 전방삭 장군 아들 전홍례(全弘禮)는 무과 급제 후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 재직 시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부친의 의병 훈련지로 아무도 살지 않았던 바닷가 야산지인 벌교읍 영등(당시지명 : 낙안군 남하면 연등)으로 조상의 위패와 가솔을 데리고 와서 설당(設堂), 설촌(設村)하였다.

여기에서 지명 개칭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시대(순종2년) 1908년 10월 15일 남상면과 남하면을 합쳐 남면으로, 고상면과 고하면을 합쳐 고상면으로 개칭하고 보성군으로 편입 되었다. 이어 일제가 1915년 고상면과 남면을 합쳐 벌교면으로 개칭했고, 1937년 7월 1일 벌교읍으로 승격 되었다.

이러한 지명 개칭으로 혼동이 왔는데 현 벌교가 낙안군에 속할 당시 작성된 문건에는 전방삭 장군의 출생지가 낙안 또는 순천으로 기록된 고문서가 있다.

전홍례는 병자호란 시 임금님을 강도로 모시다 순절하였다. 가문에 쌍충(雙忠)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이 칭찬해 주었다. 특히 우산 안방준 선생께서도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손들은 전방삭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보성군과 군민들의 성원

보성군에서는 아낌없는 지원으로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의 실기를 노기욱 박사로 하여금 편찬하게 하였다. 보성군 인물의 역사소설로 전방삭 장군 일대기를 그린 ⌜꽃이 지니 열매 맺혔어라⌟는 주제로 정형남 작가님의 소설을 보성군 홈 페이지에 연재하였다.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이란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갖는 등 매년 추모제의 경비를 보조해주는 보훈의 성의를 최대한하고 있다. 군민들 역시 전방삭 장군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어 고맙기 한이 없다. 이를 지켜보는 전방삭 장군의 후손은 보성군과 군민의 단결심과 애국선열의 숭배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보성군에서는 전방삭 장군 사우 건립 계획을 세우고 있어 빨리 성사되기를 갈망해 본다.

전방삭장군유족보존회장 전 종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시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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