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최운산 장군께 드리는 편지

최성주 객원편집위원l승인2019.11.22l수정2019.11.2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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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저는 당신께서 해방을 한 달 앞둔 1945년 7월 5일 순국하신지 12년 후인 1957년에 태어난 맏손녀 성주(星周)입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는지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요. 고문으로 죽음을 앞둔 큰아들을 평양으로 도피시키고 그 아들의 안위를 살펴보러 가셨다가 갑자기 심해진 고문후유증으로 평양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7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당신은 타향인 평양에 홀로 계십니다.

저희 5남매는 모두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태어났어요. 맏손자인 큰오빠는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아래로 넷은 모두 피난 내려온 부산에서 나고 자랐답니다. 비록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손자들이 태어날 때마다 하늘에서 기뻐하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저희는 당신의 동반자였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를 통해서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이 어떻게 준비되고 어떤 결실을 이뤄냈는지 자세하게 들으며 자랐습니다.

직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전투사에 첫 승리를 선물하신 최운산 장군은 언제나 손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영웅이셨습니다.

▲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장군 초상화

당신께서는 1905년 일제가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자 백성이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을 꾸셨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이미 당신이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다져 놓은 곳, 조선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힘을 비축할 수 있는 만주지역을 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셨지요.

그래서 1909년 도시인 연길을 떠나 두만강이 가까운 봉오동으로 옮겨가셨습니다. 고조모 청주 한씨 부인, 증조부 최우삼과 증조모 전주 이씨 부인, 그리고 이미 혼인한 형 명록(진동), 명길(운산)의 가족을 비롯해 동생 명순(치흥), 명철 등 4대 모두가 봉오동으로 터전을 옮긴 것입니다.

이상주의자 최운산이 동포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鳳梧洞이라 이름붙인 곳,

당시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조선의 한 지역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는 새로운 공동체,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신한촌'을 건설하셨습니다.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해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양조장, 콩과자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필품 기업을 운영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기에 간도 제1의 거부로 불리셨습니다.

부산의 6배에 달하는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고, 농사로 들어오는 한 달 소출보다 여러 공장에서 벌어들이는 하루 수익이 더 많았던 재산가였습니다. 사실 수확철이 정해진 농사만으로는 몇 천 명의 무장군인을 계속 유지하고 무기를 공급할 막대한 군자금을 계속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독립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무기와 군자금이지요.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을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상상 이상의 부를 소유한 대재벌 崔雲山 장군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손녀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대규모 목장을 운영한 목축업자로 러시아 군대에 곡물과 소를 수출한 대 러시아 무역업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러시아 군을 상대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봉오동의 독립군은 이미 러시아제 신형 무기를 구입해 사용하고 있었지요. 그랬기에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체코군대가 블라디보스톡에 머물 때 체코군이 보유한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는 기회와 통로를 당신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매번 훈춘으로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가서 러시아측에 넘겼는데 당시는 비적들이 횡행할 때라 소떼는 만주의 마적들이 가장 노리기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소를 수출하러 갈 때는 항상 무술고수인 최운산 장군이 직접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소몰이 일꾼들이 출발하지 않고 버텼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명사수인 당신이 소를 총은 지니지 않은 채 방탄조끼를 입고 허리에 박달망치와 단도를 차고 등에 긴 박달봉을 메고 길을 떠나는 당신의 멋진 모습과 비적들에게 공격을 당해도 죽이지 않고 박달봉으로 잠시 기절만 시켜 목숨을 살려주셨던 인품에 대해 설명해주시곤 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저는 간도 제일의 거부 최만익보다 영화의 주인공 같은 뛰어난 무술인 최운산 장군이 더 좋았습니다.

신해혁명을 지난 중국 동북삼성지역의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이 성장하던 시기에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장작림부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지셨던 최운산 장군은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등 중국군 지도자들과 혈맹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최운산 형제들과 중국군의 이러한 관계는 항일 무장 투쟁의 든든한 배경이 되기도 했지요.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히고, 유일하게 무림 고수 사부님으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말씀을 듣기까지 수련을 멈추지 않으셨던 최운산 장군의 피를 물려받아선지 저도 어디서나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몸을 부딪치며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답니다! 

달리기를 좋아했고 태권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중학교 때 오빠들과 겨루고 싶어 태권도장에 다니다 중간에 포기한 것이 오래도록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음악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취미가 되었던 무용도 한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제가 아버지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최운산 장군의 삶을 따라가다보니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집안은 무인집안이라고 늘 강조하던 아버지는 가족사를 글로 남겨주지 않았지만 모든 이야기를 후손인 저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시곤 했어요. 드라마틱하고 풍부한 소재로 가득 채워진 우리 가족사는 마치 세대를 있는 위인전 같았답니다.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저항해 무력충돌을 불사했던 연변 도태 증조부 崔友三과 그의 아들들인 독립투사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파란만장한 무장투쟁, 그리고 일제시대와 6.25를 겪어낸 아버지의 삶에 이르기까지, 3대 모두가 그 시대의 역사성을 외면하지 않았고 매번 정면 승부를 선택하셨지요. 당신들의 삶은 언제나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진진 했습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지요. 눈이 내리는 날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장독대의 눈을 치워 놓곤 하셨다지요. 할머니를 참 사랑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함께 계신 두 분을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의좋은 부부,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일생을 동반한 여성 독립군 김성녀 여사의 삶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중국인보다 중국어를 잘하셨던 최풍을, 변장의 귀재였던 최만익을, 귀신같은 총솜씨로 부하들을 이끌던 최문무 장군을, 단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최운산 장군이 있어 가능했던 많은 일들, 여러 역사적 사건과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기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살펴보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만주의 무장투쟁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그동안 도서관에서, 역사자료실에서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에 관한 새로운 사료를 하나 둘 찾을 때마다 할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북간도에서 한 시대 한 공간을 자력으로 일구어 대한민국의 자산으로 기꺼이 내어놓으셨던 최운산 장군님, 문득문득 당신이 간절하게 보고 싶어집니다

이제야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주역, 숨겨진 영웅 최운산 장군”이라고 호명되기 시작한 당신 앞에서 매순간 저 스스로 묻고 또 묻습니다. 안중근, 이상설을 비롯해 만주를 지나가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도우셨던 분이 최운산 장군이었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최운산 장군이 자위대를 창설하고 무장군대를 운영하기 시작한 1912년 이후 1920년 통합부대를 창설하고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목숨을 걸고 앞장서 달렸던 당신의 열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을 돌파하느라 연해주와 북만주를 넘나들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던 1930년대를 지나 1940년대 중반까지 삼림지역인 대흥구에서 비밀리에 무장독립군을 양성하셨지요. 북간도에 해방이 가까울 때까지 수백 명의 무장독립군이 존재했다는 것을 비롯해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들었던 수많은 당신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심하고 또 고심합니다.

할아버지, 얼마 전 1922년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촬영한 동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어요. 최근에 새롭게 발굴된 귀한 영상이었어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 중에서 최운산 장군을 닮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없어 자신 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판박이라 느껴지는 분이었어요. 그러나 접수증 등 당신의 이름이 기록된 사료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이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다는 저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학자가 얼마 전 참석자 명단에서 최진동 장군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제가 당시 최진동 장군이 홍범도 장군과 함께 기념촬영했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경주고모가 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사진이라고 확인해주었어요. 얼마나 기뻤는지요.

▲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최운산 장군과 최진동 장군

아직 서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최운산 장군도 글을 모르는 형님을 위해 함께 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에피소드 등 역사적 개연성이 구체적 자료로 뒷받침되지 못해 사료화 작업이 어려움을 걲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언젠가 당신 스스로 방법을 알려주시고 확인시켜주시리라 믿습니다.

할아버지, 어릴 때는 미처 군자금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군자금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만주 독립군과 최운산 장군이 이끌어가는 장대한 대하드라마는 늘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한 공간의 이야기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가 철이 들고 군자금의 의미를 알아가면서 점점 더 당신에게 놀라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이 간도 제1의 거부였기에 무장투쟁이 가능했다는 의미를 이제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에 대적해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당신은 우리 독립군도 개별부대를 넘어 대군단을 이뤄야 한다는 판단을 하셨고, 독립군 세력 확대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먼저 조직력이 있고 뜻이 통하는 서일총재와 함께 당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창설했고, 십리평에 단기 군사학교를 설립해 3.1운동 이후 급격히 늘어난 애국청년들을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하셨지요.

각각 600명이 넘는 대형 부대들이었습니다.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당시 대규모 부대를 두개나 설립하느라 군자금이 한꺼번에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최운산 장군의 재산이 소진되다시피 했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자신의 경제력을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셨고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인 사실은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100여 명의 자위대가 1919년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창설한 대한민국 첫 군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의 모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 일본군에 대적할 무장력을 기르고 준비하셨기에 670여 명의 정예 독립군 '대한군무도독부'가 만주 무장투쟁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습니다.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또한 당신은 북간도의 독립군들을 모두 봉오동으로 결집시키셨지요. 각 부대별로 주둔지를 제공하고 무기와 식량과 군복 등 군수품 일체를 지원하겠다는 최운산 장군의 약조가 있었기에 1920년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북간도 독립군들의 대통합이 가능했습니다. 무기와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느끼던 우리 독립군들은 봉오동에서 신형무기를 공급받고 제대로된 훈련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통합독립군단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났습니다. 

아버지는 그로 인해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고, 대한민국 무장독립전쟁사에서 최운산 장군을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100년 전 당신의 선택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특별한 의미가 되었으나 아직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진실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고, 손자인 우리라도 이 역사를 잊지 않아야 강조하던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다시 생각합니다. 

할어버지, 저는 한 번도 당신을 뵙지 못했지만 최운산 장군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 각자의 장점을 드러내고 인정해주어 작은 차이를 딛고 기꺼이 대의에 동참하게 하셨던,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변화시키시는 일을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것임을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과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형님인 최진동 장군은 모든 일을 최운산 장군과 의논하셨고, 사령관으로서의 위엄에 앞서 늘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셨습니다. 동생인 최치흥 장군도 자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하셨지요. 그래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최진동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어떤 일을 하던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야 말로 모든 일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통합군단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 성립 후 장기간 훈련양성된 정예부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 부대원들은 70여 차례 두만강 유역의 국경수비대와 헌병대를 습격해 적군을 전멸시키는 등 일본군을 긴장시켰습니다. 당시 최운산 장군이 직접 참가했던 국경수비대 습격전에서 전화선을 명중시켰던 이야기는 당신의 신출귀몰한 무술실력과 총솜씨를 설명하느라 우리가 자주 들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였습니다.

얼마 전 당시 자료를 조사하다 발견한 일본군 보고서에 "두만강변 국경수비대를 습격한 독립군이 뛰어난 사격술로 전화선을 끊어버려 연락이 두절되었고, 아군이 모두 전멸한 줄 알았다. 독립군의 사격술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릴 때 할머니께 들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기록한 일본군의 보고서가 있다니! 정말 놀라움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빈번해진 국경수비대 습격전으로 일본군의 피해가 늘어나고, 봉오동의 독립군 세력이 점점 확대되자 일본군은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두만강을 건너 대규모 병력을 급파했습니다. 그러나 첩보를 통해 일본군의 움직임을 미리 간파했던 최운산 장군은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고, <대한북로독군부>는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봉오동전투 현장에서 주민들이 발견한 일본군 장교의 지휘도와 무기

전투 개시 한 달 전부터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마을 주민을 모두 대피시켰고, 각 연대별로 봉오동을 둘러싼 여러 산위에 각 연대별로 독립군들을 주둔시켜 참호를 파고, 매복전을 준비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날 전투가 가장 치열할 때 억수같이 내렸고, 그 비가 결정적으로 우리 독립군들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고 피아 식별조차 어려워진 상태에서 전방과 후방의 일본군들이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사격을 했다지요! 

이렇게 "봉오동전투"의 시작과 끝을 자세히 알고 있는 저희 손자들은 그동안 역사학계의 발표나 방송에서 봉오동전투를 소규모의 게릴라전이라 표현하고, 전투현장의 위치도 얼뚱하게 설명하거나 잘못 표기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역사연구는 책상이 아니라 발로 찾아가봐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봉오동전투" 96주년이 되는 2016년에야 처음으로 이 전투현장을 답사하고 당시 독립군이 파 놓은 참호 속을 걸어보았습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고 짧은, 크기도 각각인 여러 개의 참호를 발견할 때 얼마나 기쁘고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감동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낙엽이 가득한 참호에 발을 내디뎠더니 발아래가 푹신푹신 했어요. 백년 가까운 세월만큼 가득 쌓였던 낙엽이 삭고 또 삭아서 검은 흙으로 변해있었어요.

▲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
▲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

독립군이 서있던 참호 속에 발을 담그고 서자 '숨을 죽이고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사격개시 명령을 기다리며 일본군을 주시하는 독립군의 마음'이 되었고 역사의 그날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의 감동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대한민국 군대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大韓北路督軍府>군은 이어진 일본군의 반격 '청산리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바쳐서 수천 명의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던 최운산 장군의 결단과 그 저력에 감동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당시에도 한일합방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되살린 횃불이 되었고 많은 분들이 독립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할아버지, 저는 최근에야 최운산 장군의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성공 요인이 할머니 김성녀 여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최운산 장군의 동반자로 독립군부대의 모든 살림을 책임졌던 할머니는 수천 명의 군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주 말씀하셨지요.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비롯한 부식을 각 부대에 배급했지만 병사들이 봉오동 연변장에 함께 모인 날은 한 끼에 3000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고 동네 부녀자들을 모아 함께 일을 했지만 매일매일의 일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었어요.

이제야 총을 들고 독립군을 이끌고 앞장서는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모습과 그 뒤에서 군대의 살림을 챙기느라 동분서주하시는 동반자 김성녀 여사가 여성 독립군의 모습으로 겹쳐지기 시작했어요. 김성녀 여사는 최운산 장군이 1912년 자위대를 창설할 때부터 자위대를 모체로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고 전투에 임하시던 순간까지의 모든 봉오동의 역사를, 그리고 해방이 올 때까지 단 한순간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최운산 장군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는 오래도록 최운산 장군을 외면했습니다. 김성녀 여사는 생전에 최운산 장군의 역사를 찾아드리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쓰셨지만 당신의 서훈도 보지 못하고 197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아픈 기억입니다. 그 2년후인 1977년에야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큰아들인 아버지의 평생 숙원이었던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일은 이제 손자인 저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생활이 여의치 않다며 뒤로 물러나 있던 모든 핑계와 게으름에 용서를 청하며 첫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함께 했던 모든 동지들의 삶을 기리고, "봉오동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실은 힘이 세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 2016년 7월 4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릭식

2016년 7월 4일 역사학자들과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이 모여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했습니다. 창립식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먼저 당신의 묘를 찾으러 평양으로 달려가리라 매일 다짐하던 아버지는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봉오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봉오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계순과 막내아들 호석이 살아계실 때 기념사업회를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에서 최계순 최호석(앞줄)과 후손들

1983년의 KBS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기적적으로 연변의 고모들과 삼촌을 만났답니다.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자녀로 국적을 회복해 서울에 살고 있던 계순고모와 호석삼촌이 그 자리를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평양에서 돌아가시기 전 타향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에게 “내 일생동안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이제 곧 해방이 될 것이다.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일생 동안 의를 찾고자 했으니 후회가 없다. 시대가 어려워 모두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내 자식들이 나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기셨지요.

정말 모든 사안을 담백하게 바라보셨던 당신다운 유언입니다. 사실 당신의 7남매들은 모두 역사의 격변을 온 몸으로 겪으며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에 흩어져 살면서 오랜 세월 간난신고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뒤안길을 지나 당신을 만나면 최운산장군의 자식으로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자평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큰아들 봉우의 자식 중 셋째인 제가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빼닮으셨다니 저도 할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최근에 제가 최운산 장군의 손녀인 것이 알게 된 지인들로부터 “어쩐지~ ”, “역시 최운산 장군의 손녀라서 다르더라”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진심일 때도 농담일 때도 있지만 저에게 그 말은 언제나 최고의 찬사입니다.

사실 지난 30년 NGO활동을 하면서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할 때,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면 저도 모르게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을 생각했습니다. 매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두려움 없이 가신 당신의 손녀가 이 정도 어려움 앞에 멈출 수는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라 잃은 젊은이의 분노와 의기를 고귀한 삶으로 승화시키셨고 온 일생을 통해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당신과 동지들이 이루셨던 역사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저희에게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봉오동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재조명해서 우리 독립군들이 꿈꿨던 세상과 그들이 달렸던 노정을 후세대에 전하는 수로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과 역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적 어려움에 주저앉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 대한민국 역사의 한 줄기가 조금이라도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역시 내 손자답게 살았구나! 하고 미소 짓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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