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태(84, 옥천읍 삼양리)씨 이야기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삼양리에 사는 조병태 씨(84)입니다. 조 씨의 양옥집 거실 한쪽 벽면에는 수십 개의 메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최가선 씨가 남겨두고 간 영광의 흔적입니다. 아침마다 배드민턴을 즐겼던 아내는 수많은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해 셀 수 없이 많은 메달을 땄습니다.

아내 최씨는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1990년 8월 1일부터 옥천장날이 되면 시원한 보리차를 자전거에 싣고 장바닥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을 선물하는 이 봉사 활동은 옥천신문, 중앙일보를 비롯한 수많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메달 아래 장식장을 가득 채운 각종 상패와 감사장은 아내가 남겨두고 간 사랑의 흔적입니다.

아내는 방앗간 일꾼으로 일하던 스물두 살 청년 조병태에게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왔습니다. 하지만 결혼 보름 만에 입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신혼 생활도 즐기지 못하고 3년 6개월 동안 생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내가 없는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외롭다는 조병태 씨. 아내와 함께 일구어온 일생을 돌아보며 다시 힘을 내시길 응원합니다.

은빛자서전에 조병태 씨를 추천해주신 태양이발관 김동호 사장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조병태씨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가족사진과 각종 상패가 가지런히 놓인 진열장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가선씨의 흔적도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씨가 부인 최씨의 상패가 놓인 진열장 앞에서 최씨이 사진과 스크랩한 신문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 방앗간 일꾼이 된 소년가장

나는 1935년 옥천군 옥천읍 수북리에서 태어났다.

옥천읍 동북쪽 외곽에 위치한 수북리 중에서도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꾀꼬리마을'이라 불렸다. 아버지 조만엽과 어머니 강정순은 슬하에 3남매를 두었는데, 나는 장남이었다. 분가한 누나 조옥섬은 현재 옥천, 남동생 조병옥은 서울에 살고 있다.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별세하였다. 마을에는 이장, 구장, 동장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동장을 맡았다. 스피커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중요한 공지 사항이 있으면 아버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곤 하였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나는 동이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을 방앗간에 취직했다. 비교적 규모가 컸던 방앗간에선 쌀 도정은 물론이고 국수도 뽑았고 고추도 빻았다. 목화를 집어넣으면 솜과 씨를 분리해주는 기계도 있었다.

방앗간 주인은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 월급이라고 해보았자 가을에는 쌀 몇 말, 여름에는 보리 몇 말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집에 양식을 보탤 수 있었다. 방앗간에는 나이 많은 기술자가 있었다. 그에게 방앗간 기술을 배우며 일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옆마을 방앗간에선 피댓줄에 목이 감겨 죽은 사람도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당시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실제로 나도 일하다 피댓줄에 걸리는 바람에 팔을 다친 적이 있었다.

▲ 조씨 부부가 환갑 기념으로 전통혼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거실 진열장 제일 위에 자리하고 있다

 

■ 결혼 보름 만에 나온 입영 영장

방앗간에서 일하는 바람에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을 얻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내 고(故) 최가선(1939~2012)과 결혼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곡물 자루를 머리에 이고 자주 방앗간에 오던 처녀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건실하게 일하는 내 모습이 좋아 보였던지 자기 여동생을 소개해주었다. 22세가 되던 해인 1956년 나보다 네 살 어린 아내 최가선이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

나에게 아내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동시에 너무나 고마운 존재다. 무엇보다 먼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시집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찌그러진 초가집은 손만 대도 금방 넘어갈 것처럼 초라했다. 더욱이 시어머니, 시동생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한 지 보름 만에 덜컥 군대 입영 영장이 나왔다. 신혼 생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신혼여행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논산훈련소 생활이 끝나자 나는 김해에 있는 수송학교로 보내졌다. 거기서 처음으로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그때 배운 운전이 내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505수송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김해에서 춘천까지 열차로 이동했는데, 장장 사흘이나 소요됐다. 시멘트를 실어 나르던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린 채였다. 그나마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장병들은 열차가 잠시 쉬면 밭에 들어가 배추를 뽑아왔다. 그리고 겉잎을 떼어내 고갱이를 날 것 그대로 씹어 먹었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며 춘천에 도착했다.

▲ 조씨가 환갑 기념으로 촬영한 전통혼례 사진을 들고 있다.

 

옥천군수 운전기사로 사회생활 시작

군대 생활 3년 6개월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방앗간에서 일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3년을 흘려보냈다.

"자네 군대에서 수송병으로 일했다고 했지?"

어느 날 한 마을에 살던 어른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시 그는 옥천군청 행정계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옥천군수 운전기사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임시직이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옥천군수 운전기사가 되었다. 4~5년 동안 일하며 두 명의 옥천군수를 모셨다.

하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마침 옥천에 들어와 있던 사료회사 은성산업에 취직했다. 회사 화물차로 사료 제품과 원료를 실어 나르며 2년을 보냈다.

이번에는 옥천택시에 취직했다. 거기서 택시기사로 4~5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개인택시 면허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당시 충청북도에서 큰 행사가 열렸는데, 택시기사들에게 개인택시를 허용하는 특례조치가 있었다. 이후 나는 약 30년 동안 개인택시를 몰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한참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야 찾아왔다. 1980년 삼양리에 번듯한 양옥집을 지었다. 동이면 임야를 사서 그곳에 작은 정자도 지었다. 하지만 평생 일만 하며 살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려 놀 줄을 몰랐다.

그런데 둘째아들이 결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돈 부부가 우리 부부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우리보다 나이는 훨씬 적었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마음도 넓었다. 내가 지은 정자에 가서 그들 부부와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나누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 5일장에서 보리차 봉사를 하던 최가선씨 생전 모습. <사진제공: 조병태씨>

 

옥천장날 빛낸 아내의 보리차 봉사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부터 아내가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8월 1일부터 아내는 옥천장날이 되면 시원한 보리차를 자전거에 싣고 장바닥을 누비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 봉사 활동을 2012년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20년 넘게 계속했다.

"아이구 아주머니 또 나오셨네."

"복 받을 겁니다."

아내가 시장에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전을 벌인 상인들도, 시장에 나온 손님들도 아내가 건네주는 시원한 물 한 잔을 스스럼없이 시원하게 받아 마셨다. 물을 주는 아내도 그리고 그것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내의 이 봉사 활동은 2001년 8월 4일자 옥천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이후에는 중앙일보를 비롯한 일간지와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당시 아내는 옥천신문 기자에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장남이 학사 장교로 군에 입대했어요. 아들을 군대에 보내 놓고 날이 뜨거워 밖을 내다보면 고생할 아들 생각에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그러다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지.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어."

아내는 더위에 고생할 아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준다는 마음으로 시장에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내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나도 산을 좋아하는데, 한참 목이 마를 때 시원한 물 한 잔 들이키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지 몰라. 그래서 목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조병태씨가 아내 최가선씨와의 추억이 깃든 사진을 펼쳐놓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 마음을 얻으려면 꾸준히 실천해야

보리차 한 잔 나누는 봉사라고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물을 자전거에 싣고 장에 나갔을 때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머니, 그 물 한 잔에 얼마요?"라고 묻는 사람부터 "아줌마, 누가 선거에 나가요?"라고 묻는 사람까지 별 사람이 다 있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내의 선행이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몇 년을 꾸준히 실천하자 날이 더워지면 시장 사람들이 먼저 아내를 찾았다. 아내는 서울에 있는 아들네 집에 놀러 갔다가도 장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내 최가선과의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두 딸 복자, 복염, 두 아들 재형, 민형이 모두 8명의 손주(4남4녀)를 낳아주었다. 후손들도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잉꼬부부로 살아가길 바란다.

▲ 2001년 8월4일 자(582호) 12면에 실린 최가선씨 <옥천신문 자료>

 

골목에 아내 축하 현수막 내건 남편
17년 전 옥천신문에 실린 부부 이야기

조병태 씨 삼양리 자택 거실에는 2001년 8월4일 자 옥천신문이 걸려 있었습니다. '옥천장날 만나는 보리차 아줌마 최가선 씨'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에 걸쳐 실린 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 아래에 자리한, '최가선-조병태 노부부의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상자기사가 시선을 끌었습니다. 17년 전 부부의 금슬 좋았던 사연을 담고 있어서 여기 다시 소개합니다.

복잡한 시장에서 그것도 물을 바쁘게 건네주는 최가선 씨에게 무엇을 묻는 것이 너무 미안해 오후에 다시 찾아간 최 씨의 집. 그 집 앞에서부터 심상찮은 집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골목을 가로질러 대문 앞에 붙어 있는 조그만 현수막. '축, 최가선 여사 금메달 획득'. 배드민턴 동호인으로도 활동하는 최가선 씨가 지난 중부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남편 조병태 씨가 걸어 준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서서 현수막을 바라보니 그냥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온다. 잠시 후 최 씨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거실에는 조병태 씨가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 장미꽃 한 다발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꽃에 걸린 리본에는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장미꽃과 현수막 얘기를 꺼내니 최씨는 "창피하다"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냉장고에는 샴페인과 케이크가 들어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참 보기 좋았다.

"아이구! 나야 걱정스럽지. 몸이 아프다고 안 하면 괜찮은데, 자기는 몸 아파서 매일 병원 다니면서 저러구 다니니 속상하지."

최 씨와의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나갈 때 택시 일을 마치고 들어와 최 씨의 옆에 앉아 있던 남편 조병태 씨의 말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 뚝뚝 묻어난다.

세상에 아내를 위해 직접 축하 현수막을 붙여줄 남편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기자를 대문 밖까지 쫓아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노부부의 행복한 모습에 시샘이 일었다.

▲ 조병태씨에게 옛날 사진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묻자 그는 아내 최가선씨의 사진을 한바탕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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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태씨의 거실에 있는 장식장. 장식장 위에 걸린 메달은 아내 최가선씨가 생전 생활체육 대회에 나가 따온 것들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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