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15] 허창무 주주통신원

부석(浮石)의 흔적
언덕 입구에서 성곽 하단부의 성돌에 뚫린 세 개의 구멍이 보인다. 이간수문에서도 이와 같은 성돌의 쐐기 구멍을 봤다. 돌을 캐기 위해 나무를 박았던 구멍이다. 큰 돌이나 바위를 캐낼 때는 돌 또는 바위에 먼저 정(釘)으로 쐐기 구멍을 낸다. 그런 다음 주로 밤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붓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가 불어나는 힘으로 바위가 쪼개진다. 이렇게 하는 것을 ‘돌을 뜬다’고 표현한다. 조선 시대에는 바위를 깨트려서 석재를 떠내는 일을 채석(採石)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석(浮石) 또는 벌석(伐石)이라 했고, 이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다. 그러면 부석소는 어디에 뒀던가?

조선 시대에는 산림 보호를 위해 도성 밖 일정 구간까지 개발을 제한했다. 그 구간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다. 성저십리는 동쪽으로는 수유고개와 중랑천까지, 서쪽은 마포 망원정까지, 남쪽으로는 한강 가까지, 북쪽으로는 보현봉과 은평구 대조동 관고개까지를 말한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동대문구, 서대문구, 마포구, 영등포구, 용산구, 성북구, 강북구, 은평구 등이 해당한다. 그러므로 부석소는 이 지역 밖에 둬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할 때는 창의문 밖에 두기도 했고, 숙종 때 도성 보수를 할 때는 정릉 근처의 청수동(淸水洞)에 뒀던 것과 같이 때에 따라 돌의 수요가 많을 때는 성저십리 안쪽에도 부석소를 뒀다.

부석소에서 뜬 돌은 소가 끄는 수레로 성벽 가까이 운반했고, 거기서부터는 인부들이 목도로 운반했다. 무거운 돌을 운반하는 중에 성돌에 깔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 부석(浮石)의 흔적

각자성석
동호로 건너 성곽길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각자성석을 볼 수 있다. 백악산 정성에서 天(천)자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타락산, 목멱산, 인왕산을 지나 다시 백악산 원점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97번째인 弔(조)자로 끝나는 각자성석은 97개 군현의 구간별 표시임을 낙산 구간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 구간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난 천자문 표시와 함께 군현의 이름도 여러 개 볼 수 있다. 동호로 쪽에서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 이렇다. 海珍始面(해진시면), 咸安始面(함안시면), 生字六百尺(생자육백척), 宜寧始面(의령시면), 慶山始面(경산시면), 十三受音始(십삼수음시), 延日始面(연일시면), 興海始面(흥해시면), 順興始面(순흥시면), 河陽始面(하양시면), 己長始面(기장시면), 蔚山始面(울산시면), 水字六百尺(수자육백척), 禮泉始面(예천시면), 崑字六百尺(곤자육백척), 星州始面(성주시면), 善山始面(선산시면),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 劍字六百尺(검자육백척) 등이다.

먼저 천자문의 순서를 보면, ‘生字六百尺(생자육백척)’은 천자문의 42번째인 날 생(生)자로 그 순번에 해당하는 군현의 백성이 600척을 쌓았다는 것을 표시한다. 물 수(水)자는 44번째, 산이름 곤(崑)자는 47번째, 언덕 강(崗)자는 48번째, 칼 검(劍)자는 49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특이한 각자성석이 있다. 경산시면과 연일시면 사이에 있는 十三受音始(십삼수음시)라는 각자다. 이것은 천자문 순서도 아니고, 군현의 이름도 아니다. 受音(수음)이란 ‘구간’이라는 우리말을 이두(吏讀)식으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간이 열세 번째 구간의 시작점이라는 뜻이다.

또 이 가운데서 劍字六百尺(검자육백척)과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의 성석은 신라호텔 담장구실을 하는 성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다. 전자는 반얀트리클럽&스파호텔 건물 뒤편 계단 축대에 있고, 후자는 자유센터 정문 안 바로 오른쪽 축대에 있다. 慶州始(경주시)라는 각자성석은 자유센터 담장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성곽이 온전했던 구간에서는 순서대로 있던 각자성석이 자유센터구간과 옛 타워호텔구간에서는 왜 여기저기 흩어져있을까? 타워호텔을 지을 때 그곳에 있었던 성곽을 허물고 그 성돌을 이곳으로 옮겨 축대와 담장을 쌓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추정이 확실한 것은 장충동 성곽길의 성벽이 다른 곳은 온전한데 이 구간에서만 끊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에 앞서 이제라도 호텔담장으로 쌓은 이 성돌을 제 자리로 옮겨 성곽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천자문 글자가 아닌 군현의 이름이 새겨진 성돌을 살펴본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군현의 순서를 따라가 보자. 맨 처음의 海珍始面(해진시면)은 당시 전라도 해진현(海珍縣)으로 지금의 해남군과 진도군을 통합한 지역이다. 그 다음의 함안시면(咸安始面)부터 경주시면(慶州始面)까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는 군현들이다. 이 구간의 성곽 축성을 맡았던 군현이 경상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명과 맞춰보면 함안은 경남 함안군, 의령은 경남 의령군, 경산은 경북 경산시, 연일은 경북 포항시 연일읍, 흥해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순흥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하양은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기장은 부산 기장군, 울산은 울산광역시, 예천은 경북 예천군, 성주는 경북 성주군, 선산은 경북 선산군, 경주는 경북 경주시와 같다.

이 가운데서 海珍始面(해진시면) 구간은 언제 쌓은 것일까? 「날 생(生)」가 새겨진 성벽구간은 태조 5년 때는 경상도 담당구간이었고, 세종 4년 때는 전라도 담당 구간이었으므로 海珍始面(해진시면)의 각자성석은 세종 4년 때의 성돌이다.

▲ 생자육백척(生字六白尺) 각자성석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신라호텔의 담장구실을 하는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암문을 만난다. 목멱산 구간의 첫 암문이다. 암문을 지나면 도성안쪽으로 서울 클럽,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자유센터 등이 성곽길을 따라 차례로 나타난다. 도성의 성곽은 또한 이 건물들의 담장이 돼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팔각정이 있는 곳에 이르면 성곽도 끊어지고, 성곽길도 끊어진다. 그 언덕에는 신당동 방면을 찍은 사진을 넣은 안내판이 서있고, 그곳이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라고 적혀있다. 그렇지만 근년에 들어선 고층건물이 조망을 가린다. 다만 신당동 반대방향으로는 남산의 숲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런대로 위안이 된다.

동호로를 건너 이곳까지는 장충동2가와 신당동의 법정동 경계를 따라왔다. 성곽은 자취를 감췄지만, 이 경계를 더 따라가면 골프연습장을 가로지르게 된다. 이곳도 성곽은 지하에 묻혀있을 것이다.

골프연습장 안으로 들어가면 반얀트리클럽&스파 건물의 부지가 나온다. 그것은 한국이 낳은 명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타워호텔 건물인데, 벽면을 유리로 새롭게 단장했다. 1969년 개관했던 이 호텔은 경영난으로 2007년 (주)씨앤씨에 매각됐고, 그 후 싱가포르 리조트 기업인 반얀트리에 향후 20년간 호텔의 운영권을 넘겨줬다.

동호로에서 자유센터까지 약 1km 정도 이어진 성곽이 이 호텔 부지에서 끊어진 것으로 보아 1960년대 타워호텔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적에 대한 보호정책이 허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워호텔 건물의 완공 이전에 발행된 서울시 지도를 보면, 이 부근의 성곽이 뚜렷한 모습으로 보인다.
 

▲ 반얀트리클럽&스파 안의 성곽길 안내판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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