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왕(王)

<2019. 12. 03.>

한자 王은 누구든지 곧바로 ‘임금 왕’으로 읽을 만큼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렇기에 ‘임금’과 ‘왕’의 뜻을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어떤 연유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임금을 ‘임금’이라 불렀을까? 왕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대답하기에 곤란한 질문이 머리를 스쳐 간다.

‘임금’은 국어사전에 한자로 표기되지 않아서 우리의 토속어로 보인다. 그 말과 소리의 뿌리는 전혀 알지 못하겠다. 우리말의 어원에 대한 앎이 매우 부족한 탓이 크다.

여기서는 두 번째 질문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王은 한자 사전에서 어느 부수에 속하는가? 王이 변(邊)에 위치한 글자는 理(다스릴 리), 現(나타날 현), 玹(옥돌 현) 등이다. 그 변은 ‘임금 왕 변’으로 읽기 쉬우나 ‘구슬 옥(玉) 변’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王의 부수는 ‘구슬 옥’이다.

王을 파자하면, 王={三, 丨} 또는 王={工, 工}. 먼저 王={三, 丨}을 살펴보자. <네이버 한자 사전>을 보니, 三(석 삼)의 자원(字源)은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그 모양이 수량을 가리키기에 지사(指事) 문자이다. 三의 각 획은 위에서부터 하늘(天), 사람(人), 땅(地)을 나타낸다. 이른바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이다. 세 가지, 즉 하늘과 땅, 그 사이의 거대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근본이다.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 보고 얼굴의 상을 설명할 때 이마와 코와 턱을 각각 천(天), 인(人), 지(地)로 간주한다. 얼굴의 근본은 이마, 코, 턱이라는 뜻이겠다. 한편 丨(뚫을 곤)은 三 각 획의 가운뎃점을 연결한 획이다. 王자는 丨이 丰(丯: 풀이 자라 산란할 개, 예쁠 봉)처럼 위아래를 뚫지는 않았다. 표적을 벗어나지 않게끔 절제한 붓놀림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王은 세 가지 근본인 하늘, 사람, 땅을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이 연결하는 존재이다. 무과불급(無過不及)인 中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나라의 우두머리가 유체이탈(遺體離脫)의 언행을 일삼는다면, 그는 존재의 근본적 당위성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셈이다. 우리 국민은 그런 사람을 한때 지도자로 선출했고, 지금도 그 폐해의 여진과 강도는 크다. 그런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 단계 정치정세의 전개가 그렇다. 조금은 두렵기까지 하다.

지난 11월 19일 타이완 타이베이(台北)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서 중화민국 국보인 모공정(毛公鼎)을 봤다. 서주(西周)의 후기 선왕(宣王: 재위 B.C.828~B.C.782)은 재위 초기에 국정을 진흥할 목적으로 숙부 모공(毛公)에게 나라의 대소사를 맡기고, 왕가를 지키도록 하였고, 더불어 술, 음식, 수레, 옷가지, 병기(兵器)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모공은 감명하여 솥 모양의 모공정을 주조하고 그 일을 기록하여 새겼다. 명문(銘文)은 32행으로 모두 500자이다(zh.wikipedia.org/wiki/毛公鼎). 청동기 명문 중 가장 긴 문장이다. 모공정 명문에 나오는 王자의 모양은 두 개다. 王자 가로획의 간격이 균등한 글자와 불균등한 글자이다.

구슬 옥을 나타내는 글자는 통상 보는 王자처럼 가로획의 간격이 균등하다. 왼쪽 탁본에서 왼쪽으로부터 6열 중간쯤에 그런 王자가 두 번 나온다. 바로 ‘옥환옥서’(王環王瑹)이다. 왕이 모공에게 옥환(玉環)과 옥서(玉瑹)를 하사하였음을 보여준다. 옥환은 옥가락지이고, 옥서는 옥으로 만든 홀(笏)로서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조복(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이다.

<옥환옥서>

출처: 타이완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형광석 촬영(2019.11.19.)
출처: 타이완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형광석 촬영(2019.11.19.)

탁본에서 보면, 임금을 나타내는 王자는 가운데 획이 위 획에 더 가깝다. 사람을 가리키는 가운데 획은 땅보다 하늘을 가리키는 획에 더 가깝다. 오른쪽 탁본에서 보이는 명문의 첫 글자가 그런 글자이다. 그런 임금 王자가 15회 나온다. 왜 그런 모양으로 王자를 새겼을까? 임금은 자기가 아닌 타인인 백성이 하늘에 가까운 존재이니까 민심이 곧 천심임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 즉 임금은 하늘의 명령인 천명(天命)을 잘 알아차리고 따라야 한다는 뜻이지 않을까? 임금은 천명의 대행자로 봄 직하다.

<선왕>

출처: 타이완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형광석 촬영(2019.11.19.)
출처: 타이완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형광석 촬영(2019.11.19.)

王자의 또 다른 가능한 파자의 집합은 王={工, 工}이다. 工은 땅을 다질 때 사용하던 도구를 그린 상형문자이다(네이버 한자 사전). 그 뜻은 ‘장인’(匠人, master)이나 ‘일’, ‘솜씨’로 확장되었다. 王은 工이 상하로 결합한 글자이다. 왕은 최고의 숙련도로 도구를 다루는 장인처럼 일솜씨가 탁월해야 한다. 여러 세력의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지도력에 기초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한편 工은 그 모양이 에이치형강(H形鋼)이다. H형강은 압축 내력(耐力)과 굴곡 내력이 뛰어난 강철 기둥이다. 王자는 H형강의 상하 결합으로도 보인다. 왕은, 나라의 우두머리는 대내외의 굴곡진 압력에 맞서고 견뎌내는 힘을 갖춰야 한다.

<H형강>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우리나라의 지도자에게는 북한, 미, 일, 중, 러 등의 전략적 행동의 제약조건 속에서도 종속변수보다는 독립변수로서 동북아, 더 나아가 인도-태평양의 정세를 창의적으로 주도할 내력이 요청된다. 또한 국내의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의 집요한 공격을 되받아치는 배짱과 정치력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이겠다.

요약하면, 王은 민심을 천명으로 인식하고 하늘, 인간, 땅을 무과불급(無過不及)하게 연결하는 존재이다. 그 실천 행태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자신의 이웃인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또한 대내외의 굴곡진 압력에 맞서 돌파하면서 나라를 대외적인 독립변수로 자리매김하는 외교력과 정치력을 구사하는 장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왕은 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의 당위적 존재성을 충족하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12명 중 王자가 내포하는 지도자로서의 당위적 존재성에 상당히 가까운 분은 누구일까? 8대 김대중 대통령님이 그리운 때가 많다. 그분을 추모하는 노래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자주 듣는다. 또한 9대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리워하는 분이 많다. 두 분을 더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좋을 세상은 언제 오려나?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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