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첨단 과학 기술은 날이 새면 새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이나 예의는 날로 쇠퇴하는 서글픔을 느낀다. 여기에 전봉준 장군(녹두장군)의 보국안민 정신에 감복하여 그 사연을 알아보고 간략하나마 그의 활약상을 적어본다.

전봉준(全琫準)은 1855년 천안전씨(天安全氏) 시조 전섭(全聶)의 53세손으로 전북 고창군 죽림리 당촌 마을에서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을 지낸 전창혁(全彰赫, 亨鎬, 承綠)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농 층에 속할 정도여서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훈장 일과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하고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 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하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처지였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한 동기는 동학은 경천수심(敬天)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해서였다.             

▲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당시 만연된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부패였다. 그중에서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는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후에도 조병갑은 자기 아버지 공덕비를 세우고 그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으며,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를 강제로 징수하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행위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여 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1894년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 혁명은 날로 확산되어 전국 동학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어서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봉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전봉준 장군은 은신처에서 지난날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일본군의 교수형에 처해졌다.

해방 후 정부에서는 전봉준의 보국안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실행이 지지부진함을 느낀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대국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일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면 결코 애국선열을 숭배하는 모든 면에 소홀함이 없도록 애써 주시기 바란다.                  

▲ 전봉준 동상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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