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에 약한 세 뿌리

<2019.12.20>

매일 욕구는 욕구에 충실하라고 유혹한다. 좋든 궂든 욕구는 반투명의 얇은 끈적끈적한 막처럼 눈과 마음을 가린다. 이른바 인욕소폐(人欲所蔽)이다. 거짓이든 참이든 말하고 싶은 발설의 욕구, 호르몬 작용에 따른 본능의 발현인 성욕, 걸신들린 듯 게걸스레 먹고 싶은 식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욕구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탐닉(耽溺)하면 그 후유증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구명조끼 없이 깊은 물에 철퍼덕 뛰어들면, 어찌 되는가. 상상하기 싫지만, 익사하기에 십상이다. 욕구에 탐닉한 후유증은 익사에 버금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 치 혀를 잘못 놀리다가는 설화(舌禍)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혀뿌리 근육은 브레이크 없는 마냥 절제되지 않고 자동으로 움직인다. 혀뿌리는 미각과 발설의 쾌감을 일으키기에 그렇다. 혹자는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로 여기저기 조사받으러 불려 다니고, 그 혐의가 중대하면 국립 교도소에 입소하여 안에 갇힌 채 설한풍(雪寒風)을 맞아야 한다. 그런 말 지껄이기로 당장은 발설의 쾌감을 맛보겠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고통은 길고 크다. 혀뿌리의 근육을 통제하지 못한 탓이다. 설화를 완벽히 차단할 요량으로 혀뿌리를 뽑아버리는 만용을 부리는 자는 없겠지만, 순식간에 그런 충동이 일지도 모르겠다.

‘알코올 중독자’(alcoholic)가 알코올이 해롭고 자신을 파괴함을 잘 알면서도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술을 끊임없이 가까이하다 보면, 신체는 자동으로 알코올을 끌어당긴다. 갑자기 허기짐을 느끼면, 등이나 허벅지에 애벌레가 스멀스멀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면서 기운이 떨어지고 식은땀이 나거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한 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증상을 알코올 중독자도 경험할 거다. 혈중의 알코올 농도가 어느 수준 밑으로 떨어지면, 몸과 정신은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불편해지기에 그 불편함을 해소하라고 뇌는 명령한다. 신체는 알코올 중독으로 형성되어 내장된(built-in) ‘알코올 항상성'(alcohol homeostasis)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인다.

<성희롱·성폭력 피해 폭로 기자회견>

출처: http://www.hani.co.kr/arti/area/honam/920419.html

성욕의 발동은 호르몬의 장난으로 여겨진다. 언론 보도에서 접하는 성범죄 피의자 대다수의 피의 사실은 한두 번의 못 된 짓거리가 아니고 여러 번의 그런 짓거리이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들도 ‘성 중독자’(sexaholic)로 불러도 좋겠다.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을 절제하지 못하듯이, 성 중독자도 본능으로 전화(轉化)한 ‘성 항상성'(sex homeostasis)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방법으로 부적절한 상대에게 강압적으로 못 할 짓을 저지를 개연성이 크다. 상습적인 성폭력 범죄자가 자기의 행적을 추적·감독하는 위치추적 장치인 '전자 발찌'(electronic tagging)를 풀어버리고 다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보도는 그런 추론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 상습 성폭력 범죄자는 성 중독자로서 전자 발찌를 장기간 착용한 탓에 자신의 심신에 내장된 ‘성 항상성’이 깨져서 괴로워하다가 본능에 가까운 호르몬의 장난을 이기지 못했다고 봐도 좋겠다.

‘성 항상성’ 회복의 실행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의 상징인 남근과 여근이다. 남자와 여자의 뿌리이다. 남근은 신체 밖으로 돌출되었기에 그 자체로 공격 성향이 강하지만 여근은 신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기에 수비 성향을 띈다. 그래선지 성폭력 범죄자는 거의 모두 남성이다. 아마도 성인 남성은 성에 눈을 뜰 나이쯤부터 아버지에게서 ‘가운데 뿌리를 조심해서 놀려라.’라는 말을 적어도 두세 번은 들었을 거다. 남녀불문하고 ‘가운데 뿌리’는 중근(中根)인지라, 문자대로 과녁에 적중하는 화살처럼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탈하면, 곁뿌리일 뿐이다. 무를 다듬을 때 곁뿌리는 내쳐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발은 실천을 내포한다. 실천(實踐)을 한자로 적어놓고 보면 천(踐)에서 ‘발족(足)’자가 보인다. 머리가 ‘지성’이라면, 가슴은 ‘감성’이요, 발은 ‘야성’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는 어떤 이성적인 명제가 공감을 얻고 실천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과정임을 말한다. 특히 공감 단계에서 실천단계로 나아가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왜 어른들은 발부리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

출처: https://soupgipeun.tistory.com/12

원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화랑 시절에 사랑하는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전설은 이렇다(이성산성 - 문화콘텐츠닷컴). ‘화랑이었던 김유신은 기생인 천관과 사랑에 빠졌다. 한창 무예와 학문 정진에 힘써야 할 김유신이 천관과 연애를 한다는 염문을 뿌리며 술집을 드나들자 김유신의 어머니는 김유신을 크게 나무란다.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천관의 집을 찾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그런데, 김유신이 아끼던 애마가 평소 천관의 집에 드나들던 습관대로 말 등에서 졸고 있던 김유신을 태운 채로 천관의 집에 들어간다. 김유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곧 상황을 알아채고 천관의 집 앞에서 애마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이후 학문과 무예에 정진한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심적인 인물이 된다.’ 김유신의 발은 그의 평소 연정을 잘 읽은 애마이다. 애인보다 어머니 말씀을 따르기로 한 김유신은 그의 결심을 실천하려고 애마의 목을 쳤다. 사실상 자신의 발을 베어버린 셈이다. 만일 김유신이 애마를 베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를 기억할 리 만무하다.

발부리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진다. 화랑 김유신의 발이, 그의 사랑하는 말이 색의 상징인 기생을 계속 찾아 나아갔다면, 후세 사람이 김유신을 기억할 리 없다.

혀뿌리, 가운데 뿌리, 발부리는 인간 본능 욕구의 충족을 강행하는 최일선(最一線)의 실행자이다. 유혹에 빠지기 쉽다. 유혹에 빠지면 혹시 삶이 풍성할지 모르나 감내해야 할 고통은 쑥쑥 커진다. 반대로 유혹을 잘 이겨내면 우리의 삶은 견고하고 탄탄해짐도 분명하다. 과장하면, 유혹에 약한 세 뿌리가 삶을 결정한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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