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은 누가 창안 했을까? 라는 전종실님의 글을 읽고

거북선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말이다. 1795년에 편찬 된 이충무공 전서의 기록은 임란으로부터 195년 후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이순신이 창제(創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제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란 뜻이라고 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정사에 단 두 번의 거북선 기록이 나온다.

첫 번째는 태종13년의 기록으로 임금이 임진강변을 행차하다 거북선과 왜선(倭船)으로 꾸며서 수전(水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최초이고(국역왕조실록 태종13년(3746,1413) 2월 5일), 두 번째는 태종 15년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태종에게 구선(龜船)에 관하여 말하기를 구선의 전법은 적중에 뛰어들어 적선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결승의 좋은 계책으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어 전승(戰勝)의 도구로 삼자고 하였다.(국역왕조실록 태종15년(3748,1415) 7월 16일) 이 기록은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179년 전의 기록이다. 이후에는 정사의 기록은 없다.

다만 삼별초 때 몽충선(蒙衝)으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때부터 이미 이러한 배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몽충선(삼재도회)

몽충(蒙衝, 일명 艨艟)선이란 초나라 배로 쇠가죽(生牛革)으로 전선(戰船)의 등짝을 덮어씌운 것으로 좌우에 도(棹)를 내놓을 구멍(棹空)을 만들어 돌이나 화살로도 부술 수 없다. 전후좌우에 쇠뇌(弩)를 쏘는 창틀과 창 찌르기를 할 구멍이 있어 적이 접근해오면 바로 쏘거나 찌른다. 이 같은 구조는 큰 배에 적용되지 않으며 신속함에 힘써서 적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허점을 노린다고 해석을 하였고, 생 쇠가죽(生牛革)이란 원래 가죽(皮)에서 털만 제거하고 무두질(생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 처리를 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충무공전서(이은상) 하권 202쪽의 귀선송(龜船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몽충(蒙衝)군함의 옛 제도를 본뜬 뒤에 새 의견을 붙여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공을 다시 모셔올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 거북선을 노래한 것이 있다. 여기에서 새 의견이란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보완 개조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첫 구절에

거북으로 이름 한 배 우리임이 만드시어

그 모양 본떠내어 몽충(蒙衝) 대신 쓰시도다.

~ 중 략 ~

옛 제도만 본뜸이랴 사람 손에 달렸도다

본떠서 만드오매 물건이야 예 같건만

신묘하게 부릴 사람 누가 공을 이으리오

그 사람 곧 못 얻으면 헛 물건이 되오리니

이 노래 지어 내어 구멍막이 되려노라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뭉충선을 본떠서 만든 것이 거북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순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전투에 용이하게 개량이나 개조를 하여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철갑선이란 말은 일본의 기록에 있을 뿐인데 마치 우리의 기록에 있는 것처럼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이 연전 연폐를 하니 할 말이 없어서 거짓으로 철갑선이라 부술 수가 없었다고 보고하는데서 전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고려사의 서문에 우리의 배에는 옻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식됨을 막기 위해 옻칠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옻칠을 하여 검게 보이기 때문에 철갑이라고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연곡사와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번지에 있는 연곡사란 백제 성왕 22년(544)에 승려 연기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니 연대 차가 너무 많이 난다.

이 글이 거북선에 관한 모든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싣는다. 지금 거북선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탈고 직전이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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