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당신도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갑질하는 자들에 대한 얘기야 이미 공론화되었으니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화되어 있으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머리말에서부터 지은이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주민을 향해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거나, 장애인을 향해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이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라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물론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당신은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살아도 한국인이 될 수가 없어.’, ‘당신은 현재의 삶에 희망이 없어.’라는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하니 모욕당한 사람은 있는데 모욕한 사람은 없게 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책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제목을 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어떤 차별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한 책이었다. 그래서 나를 성찰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위키백과>에서 ‘차별’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차별의 대상도 함께 실려 있다. 읽어보고 놀랐다. ‘나도 많이 차별하고 있었구나.’라는 말로 정리할 수밖에 없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도 다음 중 몇 가지쯤은 해당되실지 모르겠다.

연령 차별 · 계급 차별(카스트 · 적서 차별) · 장애인 차별 · 성차별(임신 차별) · 유전적 차별 · 인종 차별(외모 차별 · 머리카락 차별 · 키 차별 · 피부색 차별) · 성적 지향 차별(동성애 혐오 · 양성애 혐오 · 비이분법 · 트랜스포비아) · 종교 차별 · 직업 차별(임금 차별 · 홈리스 차별) · 연령 차별 · 언어 차별 · 서열주의 · 종 차별 · 학력 차별 · 에이즈 차별 · 성인중심주의 · 박해 (백색증 박해 · 자폐증 박해) · 반지성주의 ·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 · 반유대주의 · 양성애 혐오 · 엘리트주의 · 청소년 혐오 · 젠더리즘 · 노인 혐오 · 이성애규범성 · 이성애 중심주의 · 동성애 혐오 · 게이포비아 · 이슬라모포비아 · 레즈보포비아 · 남성혐오 · 여성혐오 · 네포티즘 · 어린이 혐오 · 역차별 · 종파주의 · 우월주의 · 트랜스여성혐오 · 트랜스포비아 · 제노포비아 · 하이퍼가미

나의 차별적 인식은 한둘이 아닌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머리 염색을 했다고 훈계하였고, 나이 어린 사람이 참으라는 말도 했다. 아들에게는 머리 모양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나름대로 인본주의자이며, 평등주의자로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면서 나 자신을 착각하고 살아온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글쓴이는 약자인 소수자들의 차별받는 삶을 ‘중립’으로 가장해 불구경하듯이 살아온 삶부터 냉철하게 꾸짖는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라며,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방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차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 정도면 변명하며 빠져나갈 생각은 버리고 성찰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가는 것이 마음 편하리라. 핍박받는 여러 소수자들을 보면서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던 것을 그대로 질타하고 있으니 말이다.

차별금지법만 해도 그렇다. 2003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2007년 법무부에서 처음 입법예고했지만, 일부 종교단체에서 성적지향 등의 조항에 반대하여 아직도 입법화되지 못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책에 제시된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여성들이 성범죄를 비롯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남성들 사이에는 자신들이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린다고 억울해 한다. 어떤 여성이 자신보다 조금 좋은 조건에 처한 것을 보면 역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없다.’ 혹은 ‘있더라도 불합리한 차별은 아니다.’라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그러나 이들도 관념적으로는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를 믿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을 위해 국가가 예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별 감정이 없다가, 막상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했더니, 지나가는 사람이 “나라에 고마워하며 살아야 해요.”라고 충고한다.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며 시위 방식을 문제 삼는다. 그는 특권을 가졌으면서도 특권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인식이다.

*이주노동자와 성소수자도 마찬 가지이다. 이주노동자, 결혼이주민이 급격히 증가하며 다문화주의가 논의되자 이주노동자는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들이고 결혼이주민은 돈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이며, 이들 때문에 한국인이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018년 500여명의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입국했다. 이들 난민 수용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남성은 찬성 48.0%, 반대 46.6%였고, 여성은 찬성 27.0%, 반대 60.1%였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약자와 잘 공감하고 관용적이라고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난민을 보면서 자신을 주류집단인 국민으로 여기고 권력을 행사한 것은 아닐까?

*대학서열화, 문제점을 알면서도 이 질서를 바꿀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유리한 편견이 이익을 주듯이 불리한 편견은 불이익을 초래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다문화아동’이라는 말은 왜곡되어 사용된다. 다문화라는 말은 본래 다양한 문화의 상호존중과 공존을 전제로는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의미일 것인데,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진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다문화는 낙인이고 차별과 배제의 용어가 되었다.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지면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같이 하게 된다.(편견규범이론) 이런 일탈적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최근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인 혐오표현은 약자를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똥남아, 똥꼬충, 급식충, 틀딱충, 맘충 등.

이러한 사례들을 글쓴이는 날카롭게 찾아내어 제시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차별을 능력주의로 착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자기 확신에 힘입어 더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2011년 가을, 부산의 한 사우나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귀화한 구수진씨의 입장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흑인차별과 뭐가 다를까?

종교에 따라 교리를 이유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교리 내에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라고 여긴다. 최근 동성애 또는 동성결혼의 문제에 대한 다수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보건대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나아가 글쓴이는 실질적으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끊는 재분배 정책도 필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과도 싸워야 하며, 개인들의 다양성을 고려한 제도를 만드는 등 다른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쓴이는 그러면서 ‘시민불복종’을 얘기한다. 이는 차별 없는 민주사회의 정의를 이루는 방책일 것이다. 차별은 약자에게로 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당한 얘기다. 고통 받는 약자들이 정의롭지 못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복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차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아이리스 영의 말을 빌려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그렇다. 모두가 평등을 바란다하더라도,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우리들의 손과 발과 머리와 심장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움직일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량한 당신도 지금 ‘나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 누군가를 모욕하고 있을지 모른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이현종 주주통신원  hhjj55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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