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한겨레 양상우 대표이사의 2020년 신년사

 

한겨레 사우 여러분,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 한겨레 사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신년사는 조금 무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3년 전 저는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진보정권이 수립되면 한겨레에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전망’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일들이 쓰나미처럼 한겨레를 강타했습니다. 안팎의 논란도 격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폭풍우에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한걸음씩 묵묵히 걸었습니다. 힘이 닿는 만큼 앞으로.

우리는 젊어졌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창사 이래 최대의 신규 인력을 충원했습니다. 3년 전 약속드린 50명을 넘어서 7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30년 만에 가장 많은 양의 새 피가 우리 조직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동료와 기존 동료가 조화를 이루려면 고통스런 상호 적응 과정이 불가피합니다. 살아온 세상과 삶의 경험이 다른 이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낯선 경험입니다. 배움만큼이나 낯선 갈등도 많았습니다. 진행형입니다. 운명의 동반자가 되려면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지혜롭게 풀어가리라 믿습니다.

물적 토대가 단단해졌습니다. 한겨레는 2019년에도 전년에 이어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2005~2007년, 2011~2013년에 이은 창사 이래 세 번째 ‘영업·당기 손익 3년 연속 흑자’입니다. 현금/예금 자산은 차입금의 1,000%를 훌쩍 넘기며 유동성 규모도 최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성과는, 우리 모두의 수고와 헌신의 결과입니다. 이런 시기들에 임직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금권을 완전히 극복한 한겨레가 됐습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2019년 우리가 일군 성과는 삼성이라는 초거대자본 없이, ‘자본으로부터 독립’의 의지로 이뤄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사 이래 누적 결손자금을 2012년에 모두 털어낸 일만큼이나 ‘분기적 사건’입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일입니다.

우리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구독자 수가 3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jtbc와 중앙일보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유튜브 구독자도 2019년 말에 30만을 넘겼습니다. 종이신문은 abc협회 조사에서 10여년 만에 다시 유료독자율 1위에 올랐습니다. 그만큼 거품부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일굴 씨앗을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마련한 인적, 물적, 사회적 자원은 한겨레와 한국사회의 더 아름답고, 더 열린 미래를 일구는 데 소중하게 쓰여야 합니다. 미래 주인공의 성장의 자양분이 돼야 합니다. 몇끼 식사를 위한 곡식이 아니라, 가을 황금들판을 이룰 씨앗으로 쓰여야 합니다. 효과적 활용을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야합니다. 저는 첫 임기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다음 경영진과 한겨레 구성원 모두에게 맡깁니다. 아울러, 구성원들의 처우를 더 개선하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움, 그리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미안함을 전합니다.

2. 한겨레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제가 대표이사로서 3년 내내 입에 달고 산 말이 있습니다. 콘텐츠의 품질을 비약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저널리즘과 경제학의 관점 모두에서 콘텐츠 품질을 높이는 일은 위기 탈출의 지름길이자 밝은 미래를 여는 첫걸음입니다. 콘텐츠 품질의 비약적 제고 없이는 한겨레의 미래도 없다고 저는 단언합니다.

콘텐츠 품질을 비약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뉴스 품질 개선은 저의 최대 역점 사업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변명 같은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2017년 늦가을 대표이사와 편집인의 한겨레21 편집권 침해 논란 이후 이 부분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기와 지혜 모두 부족했습니다. 누구의 간여도 받지 않고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은 마음을 잘 이해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기사의 정확성과 타당성 여부에 따른 리스크가 폭증하는 추세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에선 ‘작은기사’와 ‘큰기사’가 따로 없습니다. 적어도 뉴스수용자에겐 의미가 없는 구분입니다. 때문에 체계적인 게이트키핑 강화는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그를 위한 애씀이 사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지혜와 용기가 다음 경영진에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감한 포기가 절실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2018년 하반기부터 종이신문을 주5일 발행 체제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물론 ‘최대한의 사내 총의’를 모으는 게 전제였습니다. 한겨레 종이신문의 충성독자는 대부분 ‘50대 이상, 진보개혁적’ 성향입니다. ‘양’을 줄여 확보한 여유 능력을 ‘질’을 높이는 데 쏟아 부어 뉴스의 설득력을 높이지 못하면, 독자의 수용성을 극대화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선택과 집중은 불가능합니다. ‘양’과 ‘질’ 모두를 두 손에 쥐고 뛰려 하면 거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5일 발행 방안에 대한 시장·독자 조사 결과는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부의 반대가 거셌습니다. 노동조합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독서국 등을 뺀 다른 국실의 고위 간부들 가운데에도 반대 의견이 있았습니다. 저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탐사보도와 심층인터뷰를 전문으로 하는 월간 매체로 전환하려던 시도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어제처럼 오늘을 살면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바뀌는 시대입니다. 불안 때문에,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결단을 뒤로 미루면 미래는 우리 앞에 오지 않습니다. 하던대로 하고 있으면, 그냥 뒷걸음질이 되고 마는 세상입니다. 물론 구성원의 뜻을 모아 결단으로 이끄는 일은 대표이사의 책임입니다.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신문발행일수 축소와 한겨레21의 발행주기 변경 시기를 놓쳤다는 평가가 나온다면 온전히 제 잘못입니다.

몸을 적시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올드 뉴스 미디어를 경쟁상대로 할 상황이 아닙니다. 옷이 젖을까 강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이들, 강물에 빠져 하릴없이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경쟁상대로 해서는 살 길을 열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강물을 최단 기간에, 최소의 피해로 건널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한겨레 구성원모두와 다음 경영진께 종이신문 발행일수 감축 등에 관한 적극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선택이 두려울 땐 젊은 벗들의 10년 뒤 미래를 두려운 마음으로 상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고통스런 한걸음이 젊은 벗들의 10년을 열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영상 분야에 대한 관심, 참여,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널리즘과 (정보)경제학의 두 관점 모두에서 콘텐츠 품질을 높이는 일은 위기 탈출의 지름길이자 밝은 미래를 여는 첫걸음입니다. 영상 분야에 대한 투자는 그런 판단에서 나왔습니다. 1분간 볼 수 있는 텍스트의 데이터는 1만바이트에도 못 미치지만, 동영상데이터는 2000만바이트가 넘습니다. 2000배 넘게 차이가 납니다. (정보)경제학적 관점에서 영상은 텍스트나 사진과 비교할 수 없는 고품질콘텐츠입니다. 지금 영상미디어국 동료들이 바람찬 벌판에서 고군분투하고있습니다. 당분간은 ‘가성비’가 현저히 낮은 적자 조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사가 걸린 미래 삶터를 개척하는 일입니다. 당장의 비용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일이 아닙니다. 영상에서 우리의 생존과 발전의 기반과 동력을 찾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겨레 구성원 모든 이들의 영상 분야에 대한 관심, 지원, 참여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영상 쪽 동료들도 한겨레의 생존과 발전을 짊어지고 있다는 마음으로 더욱 애써주면 고맙겠습니다.

3. 이제 주 52시간제와 4.5일제의 문이 열렸습니다. 바람 좋고, 물 좋고, 볕도 잘 드는 정자는 없다고 합니다. 적응의 과정에서 불편과 부작용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 제도들을 변화를 위한 기회이자 도전 과제, 일의 효율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합니다.

고품질 노동의 시대를 확대 안착시켜야 합니다. 2019년 11월부터 우리는 ‘임금 하락 없는 주 4.5일제’ 도입에 나섰습니다. 한국 언론계 최초입니다. 3년 전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헛공약이라 여긴 일입니다. 관성에서 벗어나 변화의 방향을 미리 가늠했다면 달리 반응했을 일입니다. 그때도 이미 노동시간 단축은 한국사회의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주 5일제에서 단지 반걸음만 더 나가면 되는 주 4.5일제는 ‘의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생산과 조직의 혁신, 업무 흐름의 효과적 재구성을 통해주 4.5일제는 물론 주 4일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차기 경영진이 4.5일제를 편집국을 포함해 전사로확대하고, 주4일제의 부분적 도입에도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4.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사람은 또한 이성의 동물입니다. 감정과 이성이 서로를 배려하며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고등동물이 됩니다. 감정과 이성이 서로를 배척하며 억누르면 사람은 괴물이 됩니다.

2020년에는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루는 한겨레 공동체로 진일보하기를 소망합니다. 한겨레 공동체엔 ‘카더라’ 통신의 자리가 없습니다. ‘카더라’ 통신은, 자유언론과 표현의 자유, 열린 민주주의를 꿈꾼 민주 항쟁의 산물이자 동반자인 한겨레의 존재부정입니다. 한겨레 공동체의 구성원 누구라도 ‘카더라’ 통신에 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루머가 진실을 덮는 일’은 한겨레공동체에서는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문제제기는 사실과 이성에 뿌리를두고 이뤄져야 합니다. 상대방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배려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냉소가 한겨레 공동체를 휘감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문제제기로 시작된 일이 ‘카더라’ 통신에 휘둘려 문제제기자와 조직 모두 수렁을 해매는 부작용을 결단코 피해야 합니다. 부작용이 쌓이면 냉소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우리 모두는 대화보다 침묵의 어둠 속에 숨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날이 커지는 한겨레 공동체의 원심력을 제어할 길을 잃게 됩니다. ‘감성’과 ‘이성’의 균형, ‘나’와 ‘조직’의 균형을 늘 추구해야합니다. 상호 배려는 그 첫걸음일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의 뉴스미디어 인프라와 시장, 소비자 환경의 격변은 한겨레 공동체의 ‘원심력’을 구조적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에 맞선 ‘구심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위기는 일상화되고 구조화될 것입니다. ‘나’와 ‘조직’의 생존을 위해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5. 한겨레의 사내 민주주의에는 어느새 노란불이 켜졌습니다. 아니 벌써 빨간불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진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사내민주주의의 문제가 오직 경영진 때문이라는 주장은 온당치 않습니다.

사내 민주주의의 기본부터 다시 다져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겨레 공동체는 사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세 개의 축이있습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진, 노동조합, 우리사주조합이 그것입니다. 이 세 축이 효과적으로 맞물려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내에 넘쳐나는 ‘남 탓’도 위기징후입니다. ‘참여의 빈곤’을 해소하지 않고는, 사내 민주주의의재건이 성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곧 다음 경영진을 뽑는 선거가 치러집니다. 3년마다 치르는 대표이사 선거는 한겨레 공동체의 사내민주주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무대입니다. 네거티브와 ‘카더라’ 통신이 발붙일 자리가 없는 선거, 투명하고 엄정한 관리가 이뤄지는 선거, 가장 모범적인 정책 선거의 장을 활짝 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갈수록 심화하는 ‘참여의 빈곤’이라는 수렁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지혜와 용기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6. 지난 3년, 한겨레엔 돌발적인 위기 상황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저는 종합병원 응급실의 당직 의사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며 위기 해소에 매달리느라 두루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과 사고들 모두에 대표이사 사장인 저의 크고 작은 책임이 있음을, 뒤늦었지만, 이제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마음고생 많았던 동료들께도 동병상련의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불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깊은 밤 다음은, 여명, 그리고 밝은 세상입니다. 새해의 떠오르는 밝은 태양과 같은 ‘희망의 빛’을 향해 뜻과 마음을 모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한겨레 동료들의 시선이 눈 앞의 욕망과 감정은 물론 오늘, 올해를 넘어 내일과 ‘미래’를 향하기를 바랍니다. 훗날, 지난해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들이 더 젊어지고 강건해진 한겨레에서 부장·국장·대표이사도 하는 주역으로서 ‘주인된 노동자’임을 깊이 자각한 (아직은 오지 않은) 더 젊은 벗들과 함께 한겨레를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2004년, 마흔살 평기자로 도산의 위기에 놓였던 회사의 비상경영위원장을 맡았을 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20년의 첫날을 열며 사랑하는 한겨레 동료들께 이렇게 바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만이 꿈을 이룰 수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월 2일

대표이사 사장 양상우드림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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