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아름다워(17)]'비약적인 옥천농업 발전기가 인생의 황금시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20.01.03l수정2020.01.0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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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장야리에 사는 오공탁 씨(83)입니다. 그는 옥천농고를 졸업하고 농촌지도소와 농협옥천읍단위조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시절에 대한 진술에는 옥천군 농업 발전사의 정사와 야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옥천 포도가 비닐하우스와 결합하며 비약적 발전을 했던 사정과 옥천 한우가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상황도 알게 되었습니다.

3대 독자인 15세 소년이 6.25전쟁 당시 황간, 김천, 대구를 거쳐 경산까지 3개월 동안 피난을 다녀왔던 이야기, 17세 중학교 3학년 시절 조기 결혼해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 아들을 낳았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공무원 신분을 버렸지만 오히려 농협에서 근무하며 황금시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대지자 불기망(大志者 不棄望)'. 오 씨의 안방 문 위에 걸려 있는 편액의 문구입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 문구를 그는 가훈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문구도 좋아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의 '대지자 불기망(大志者 不棄望)' 편액 아래서 오공탁씨가 20여년 전 환갑 당시 찍은 사족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 호탕한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

1936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이던 아버지(오재권)는 성격이 호방하고 호탕했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경제 개념은 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안남면 오대리(현재는 옥천읍 오대리)에서 시집온, 생활력 강한 어머니(조봉이)가 젊은 시절 행상으로 가계를 책임지셨다. 어머니는 칡뿌리, 구절초 등 다양한 약초를 구해서 큰 솥에 넣고 달였다. 그렇게 우려낸 약물을 약성이 강한 나무 등과 섞어서 콩알 같은 환약(丸藥)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서울과 부산까지 다니면서 환약을 팔았다.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셨던 어머니는 89세까지 장수하셨다.

형제는 단출했다. 네 살 많은 누이 하나가 전부였다. 초등학교까지 졸업한 누이는 또래에 비해 똘똘한 편이었고 6·25전쟁 때는 옥천에 들어온 인민군에 의해 마을 여성동맹위원장에 덜컥 임명되기도 했다. 그때 누이는 19세였다. 겁이 난 부모님은 옥천 오지였던 군북면 추소리로 누이를 재빨리 시집 보내버렸다.

나는 동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이원중학교에 진학했다. 그해 4월 입학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전쟁이 터졌다. 당시 내 나이 15세였다.

 

 

피난지에서 터득한 생존의 기술과 지혜

1950년 6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소 두 마리를 끌고 나가 개울가에서 풀을 뜯기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갑자기 나에게 사람을 보냈다.

"피난을 떠난 외숙네 식구를 찾아가거라! 지금 우산리에 머물고 있다니 당장 떠나야 한다! 우리도 곧 뒤따라가겠다."

우산리는 10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소를 동네 사람에게 맡기고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랑 반바지 차림이었다. 외숙네 식구를 황간에서 간신히 만났고, 무조건 남쪽을 향해 걸었다. 김천에서 대구까지는 마지막 남행 열차를 얻어 타고 이동했다. 화물차였는데,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 엉성하게 얽어놓은 새끼줄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경산군 압량면이었다. 산 위로 올라가 전투기 40~50대가 낙동강으로 하강하며 총알을 퍼붓는 모습을 구경했다. 외숙네 식구와 함께 머문 집은 동네에서 꽤 부자로 통했다. 소를 다섯 마리나 키우고 있었고, 사과가 잔뜩 달린 과수원도 소유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린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주인네 소를 몰고 들에 나가 풀을 뜯겼고, 바람에 사과가 떨어지면 줍기도 했다.

그런 나를 숙부도, 주인도 대견해했다. 그 집에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알아서 농사일을 도와주고 심부름도 해주자 몰래 음식도 가져다주는 등 나를 귀여워해주었다.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사과를 사다가 신작로에서 팔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생각을 한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밑천만 날리고 사과 장사를 작파해야만 했다.

피난지에서 추석 명절을 보냈는데, 타지 마을의 고샅에 서서 송편 찌는 냄새를 맡았을 때 문득 슬픔, 설움, 향수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외숙부가 잘 사는 편이라 먹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간장, 된장, 고추장이 동 나자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소금물과 고춧가루를 섞어서 억지로 고추장을 만들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장(醬)이란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 3대 독자 중학생 가장과 8남매의 탄생

옥천에서 경산까지 이어진 피난길에 소요된 시간은 약 3개월이었다. 하지만 고향에 가도 된다는 군인들의 말을 듣고 나는 혼자 뛰어서 사흘 만에 옥천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귀향길에 동족상잔의 참상을 목격했다. 산야에 수없이 널려 있는 시체가 썩어가며 뿜어내던 악취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낙동강 주변을 지날 무렵 악취가 얼마나 심했던지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어린 나는 코피를 쏟고 말았다.

"엄마! 엄마! 저 왔어요!"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 윗방에선 어머니가, 아랫방에선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3대 독자가 살아서 돌아오자 부모님은 너무나 기뻐서 아들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부모님은 거의 송장이 다 돼있었다. 3대 독자인 아들만은 살리고 싶어 급히 피난을 보냈지만 이후 들려온 소문은 흉흉했다. 아들이 떠난 방향인 영동에서 수천 명이, 낙동강 전선에선 수만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3대 독자를 사지로 보내 죽게 했다는 자책감과 상실감에 부모님은 3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강권으로 나는 17세 어린 나이에 세 살 많은 옆 동네 처녀 이연순과 결혼했다. 빨리 아들을 낳아 대(代)를 이어야 하는 3대 독자 중학생 가장의 운명은 가혹(?)했다.

딸, 딸, 딸, 딸, 딸.

나는 내리 딸만 다섯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태어난 아들. 애간장을 태운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삼신할미가 선심이라도 썼던 것일까. 아들 하나가 더 태어났다. 아들에 한이 맺힌 아내는 자신감을 얻었고, 기어이 삼형제를 만들겠다며 마지막 출산을 감행했다. 하지만 막내는 다시 딸이었다.

▲ 오공탁씨의 환갑 당시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옥천 포도 수확 시기 두 달이나 앞당겨

옥천농고 3학년이던 1958년 겨울, 영장이 나왔다.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입대했다(졸업장은 제대한 이후에 받았다). 하지만 9개월 만에 나는 의가사 제대를 했다. 그 무렵 이상하게도 기관지가 좋지 않아 전주에 있는 98육군병원에서 생활하다가 귀향 명령을 받았다.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아마도 3대 독자에 가장이라는 점이 정상 참작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인 1960년 농촌지도원 모집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후 15년 동안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했다. 1974년 충북 단양으로 발령이 났는데, 이미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을 두고 전근을 갈 수 없었다. 당시 소금 장사로 거부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자식들을 대학원까지 보냈지만 정작 어렸을 때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 패가망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공무원 신분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40대 초반에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손해만 보고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장사 체질이 아님을 깨달을 무렵 고맙게도 농협옥천읍단위조합 영농부장으로 특채됐다. 여기서 12년 동안 근무하며 옥천농업 발전에 기여했는데, 돌아보니 이 시기가 내 인생의 황금시대였다(43~55세). '조합원 농민에게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게 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정진했다.

첫 번째 성과는 고추 육묘 분야에서 나왔다. 당시만 해도 고구마 육묘는 있었지만 고추 육묘는 없었다. 시범마을 농민들과 함께 비닐하우스에 고추 모종을 따로 심어 이식하자 다른 농가보다 일찍 풋고추를 수확할 수 있었다. 대박이었다.

다음에는 이 방식을 옥천의 특산물인 포도에 적용했다. 포도를 비닐하우스와 결합한 곳은 전국에서 대전의 2개 농가 뿐이었다. 이곳을 견학하고 돌아와 5개 농가와 함께 첫 도전에 나섰다. 그해 가을 농사를 잘 지은 사람은 3배, 보통으로 지은 사람도 2배의 수익을 올렸다. 노지 포도는 보통 8월15일에 수확하지만 비닐하우스에 가온재배 방식을 결합할 경우 수확 시기를 6월15일까지 앞당길 수 있었다.

▲ 오공탁씨가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살펴보고 있다

 

인생의 황금시대와 함께한 벗들

몇 차례 성공으로 '하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조합원 농민들은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사료를 투입한 한우 단기비육 사업은 성공의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한우 다섯 마리를 키우면 대학생 한 명을 서울로 유학 보낼 수 있었다. 젖소 사업도 시작해 군내에 단 한 마리도 없던 젖소가 300마리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농사 소득이 늘어나자 지역경제에 선순환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지역 농협은 조합원에게 대출해줄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득이 늘어난 조합원이 예금을 하자 옥천읍단위조합의 자본금과 자산 규모가 동시에 커졌다. 한창 성장할 때는 옥천읍단위조합이 농협군지부의 예금액을 앞질렀을 정도였다.

이런 성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옥천에는 나와 뜻이 맞는 6명의 친구가 있었다. 농고를 나와 채소, 원예, 축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 영농을 실천하던 이경기, 이인환, 신희우, 이상욱, 서학규, 이해종이 그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세븐 그룹'이라는 서클을 만들어 농업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시범사업도 실행하며 호흡을 맞추었다. 내 인생의 황금시대와 동행해준 벗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는 아내 이연순과의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순자, 순이, 순옥, 순임, 미숙, 태현, 기현, 몽희가 다시 15명(6남9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엄격함 속의 자상함 존경합니다

넷째 딸 순임씨의 감사편지

아버지! 우리 가정은 엄부자친(嚴父慈親)의 대표 모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8남매를 바르게 키우기 위하여 엄격하게 교육시켰고, 우리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습니다. 학창시절, 아버지는 8남매에게 가끔 영어책과 수학책을 갖고 모이라고 한 다음 학습 상태를 점검하셨습니다.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회초리 드는 것도 불사하셨기에 떨기도 했지만 그런 교육열 덕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8남매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인사 예절을 지킬 것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귀가하실 때는 8남매가 모두 나와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윗집 아저씨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매우 부러워하셨던 걸로 기업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친회장으로서 제사 예법도 중요시하셨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각종 예법의 의미와 절차를 손주들에게까지 자세히 설명해주곤 하셨지요.

아버지는 평소 엄격하셨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딸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자금을 대주셔서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하게 도와주셨고, 다섯째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발령이 늦어지자 학원을 차리도록 지원하셔서 잘 운영하다가 정식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동창회장, 종친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항상 독서를 하시고 대체의학 등을 연구하시며 평생학습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자세는 우리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여생 동안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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