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무예를 익히다.

방삭은 2대 독자이기에 가문에서 바라는 소망은 후세를 빨리 얻는 것이었다. 시대적 흐름으로 조혼하는 것이 관습이기도 하였으나 이른 16세에 광산김씨와 결혼 하였다.

먼저 말했듯이 조부는 진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분이었고 부친은 부사의 직책으로 근무한 집안이기에 학문을 익히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조부 전청(全淸)과 광해군세자 사부(師父)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선생과는 동향인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에 손자 방삭(方朔)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여 유명한 학자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다음으로 조선 중기에 유명한 학자 이이(李珥), 이황(李滉)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가르침을 받았다. 역대병요(歷代兵要), 무경칠서(武經七書), 통감(通鑑), 장감(將鑑), 박의(博議), 진법(陳法), 병장설(兵將設)등을 반복 습독하여 장수가 되는 길을 닦았다.”라고 문화재학 박사 노기욱 저서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에서 밝히고 있다.

▲ 승마 장면

한편 무예를 기르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사어(射御)를 익히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활쏘기,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旗槍), 격구(擊毬)등도 능숙했다. 1마장에서 5순의 화살을 쏘면 쏜 화살 모두가 꼬리를 물고 명중하였다.

방삭의 성품을 천안 전씨 대동보에서는 효우탁이무(孝友卓異武) 즉 부모에 대한 효도와 벗에 대한 우애가 보통보다 뛰어나게 다르고 무예가 절윤 했다는 뜻이다. 후세인들은, “방삭은 자신을 나타내기를 싫어하고 겸양지덕(謙讓之德)을 중시했다.”라고 평한다. 이와 걸맞는 사실을 밝혀본다.

방삭이 9살 되던 해 봄 이였다. 당시의 식량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전년 가을에 추수한 곡식의 양이 많지 않기에 봄이 되면 식량이 거의 떨어지고 없는 시절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춘궁기(春窮期)라고 했다. 방삭이 마을 어귀를 돌다, 아기의 우는 소리가 어찌나 서러운지 사연을 물었더니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파 저렇게 운다고 하였다.

방삭은 그 길로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대뜸 “ 할아버지 쌀 한 말만 주십시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느닷없는 손자의 말에 놀라 “무엇에 쓰려느냐?” 하고 묻자 ”배가 고파 울고 있는 아이가 있어 도와주려 합니다“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자 방삭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특한지고“ 하시면서 쌀 한 말을 주었다. 그런데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운반하려 하느냐?“ 하고 묻자 ”이 정도는 메고 갈 수 있습니다“ 하면서 쌀 한 말을 거뜬히 메고 가는 손자를 보고  할아버지도 놀라 ”힘이 대단 하구나, 장사다“하고 중얼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방삭이 도와준 아이가 바로 이순신 난중일기에 나오는 한경(漢京)이다. 한경은 전방삭의 종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심부름을 자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 정형남과 문화재학 박사 노기욱도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이순신 난중일기 편에 다시 기록하겠다.

다른 사례를 들어본다. 
“전라병영에서는 봄가을에 진법을 치고 지도를 그리고 무예를 겨루는 군민 행사가 열렸다. 이때 전방삭의 출중한 무예 솜씨는 많은 이의 입에 회자 되었다. 마상 창 검술과 활 솜씨가 비호와 같았다. 그 후 전라 병사가 무과에 명궁사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학문이 부족함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라고 ⌜보성군의병장 전방삭⌟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보기 드문 일로 가문의 교훈으로 길러진 성품이 아니겠는가 싶다. 

방삭은 병법에서 “지형과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 승리한다”는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우선 내 고향의 지리 지형을 파악하고자 보성군 일대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렸고, 특히 해로를 파악하고 배가 정박할만한 곳은 주사로 점을 찍어 두었다. 이는 후일 임진왜란 시 보성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방삭이 태어나고 자란 보성군은 전라남도에 속한 자그마한 고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4,700여 가구에 21,000명의 인구가 살았다 한다. 시골 인구가 번창했던 1960년대와 비교하면 면 단위밖에 안 된 처지였다. 그러나 보성군은 유서 깊은 도읍이었다. 백제 시대에는 임금 앞에 엎드린 충성스런 관원이 많다하여 복홀(伏忽)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보성 출신으로 걸출한 인물이 많았다. 광해군 세자 사부(師傅)인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선생을 비롯해 동계(東溪) 박춘장(朴春長) • 난곡(蘭谷) 정길(鄭佶) • 이계(怡溪) 임희(任喜) • 석문(石門) 최계현(崔繼憲) • 남추(南秋) 김선(金銑) •신양(新陽) 이무신(李懋臣)등은 학문과 행위가 높아 보성 6현이다. 학자 은봉(隱峰),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도 뺄 수 없는 인물이다. 보성의 열선루(列仙樓)의 아름다움은 전국에서 으뜸이다. 보성의 자랑스러운 인물과 유서 깊은 곳을 더 남기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보성 열선루는 조선 시대 유명한 학자들이 들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보는 장이기에 이른 감이 있으나 열선루에 연루된 이순신 장군의 사연을 잠시 들추어 보기로 한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조선 수군 보존을 위해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장계를 작성하여 절멸의 순간을 극복하였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보성에 들릴 때마다 이 열선루에서 집무를 보았다.

이순신의 한산도가를 지은 곳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은 한산도가는 보성에서 지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열선루에서 지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 열선루는  오래전에 허물어져서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2019년 김철우 보성군수가 복원하였다. 

▲ 보성 열선루

                             閑山島歌 한산도가 (원문)
                           
                            寒山島月明夜 한산도명월야
                            上戍樓撫大刀 상수루무대도
                            深愁時何處 심수시하처
                            一聲羌笛更添愁 일성강적경첨수

                        丁酉仲秋 李舜臣 吟 정유중추 이순신 음
           
        ⋇ 번역자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이은산 선생의 번역시를 기록해 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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