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년 전만 해도 정월보름이나 추석, 시월보름 등 달 밝은 밤이면 마을의 처녀들과 부녀자들이 모여 동네마당에서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마음껏 뛰어 놀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러한 놀이문화가 언제부터 인가 사라졌다. 예쁜 색동옷을 입고 길게 따 내린 댕기를 펄렁이면서 뛰어 놀던 그 모습들이 다시 보고 싶다. 우리의 문화가 그러하듯이 강강술래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강강술래에 대해 지금까지 전해 오는 설을 보면 부여, 고구려 등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거나, 만월제의滿月祭儀에서 나온 놀이라고도 하고, 추석의 유래와 같이 신라가 발해와 싸워 크게 이긴 날이 8월15일인데, 그날을 경축하기 위해 즐기고 놀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또한 마한 때부터 내려오는 달맞이와 수확의례로 농경사회에서 행해지던 원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馬韓)풍속에 5월과 10월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했고,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어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고 한 것을 보면, 원무(圓舞)자체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설은 고려시대에 진주의 어느 산골 농부인 김수월이 진주목사에게 사랑하는 아내 세루홰(사리화,沙里花)를 빼앗겨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했는데, 그 원혼(冤魂)을 위로하기 위한 굿에서 발생했다는 이야기에서 진주를 발생지로 보는 설도 있다. 이러한 놀이를 두고 강강술래 또는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등으로 구전되어 왔다. 

수월래라고 하는 말은, 이 놀이를 보면 느리게 하기도 하고 빠르게 하기도 하는데 진양조(晋陽調)로 느리게 소리를 하면 강-가-앙-수-우-우-울-래로 들리기 때문에 수월래로 적었을 뿐이지 수월래로 부르다가 술래로 부르게 된 것은 아니다

▲ 한말 무정(茂亭) 정만조가 쓴『은파유필(恩波濡筆)』

강강술래라는 말을 한자의 强羌水越來로 적으면서, 강한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왜적을 경계하는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려는 데서 전한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인 강강술래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억지로 붙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강강술래는 우리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로,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수레(輪)를 의미하며, 국한자의 혼합기원설로 강강의 후음이라든지, 술래는 순유巡遊, 순라(巡邏)에서 온 말로 경계하라는 뜻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강강술래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보면 1896년 진도로 유배된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가 12년간 머물면서 남긴 은파유필 恩波濡筆에 써놓은 글 중 각종 풍습 및 놀이에 대한 기록에 강강술래도 포함되어 있다. 무정의 대표적 저서인 은파유필은 그가 진도에서 접한 인물, 풍속, 고적 등을 시와 부賦로 표현하고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것인데 350여 수의 시로 진도의 풍습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기록된 강강술래强强須來라는 명칭의 사용과 뜻풀이는 강강술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다.

▲ 강강술레에 대한 은파유필의 기록

무정은 한시를 통해 <높고 낮은 소리 내며 느릿느릿 몰고 돌아/ 한동안 서 있다가 움직이네/ 여자들의 마음에는 사내들 오기를 기다린 것/ 강강술래 부를 때 사내들역시 찾아드네>라고 표현, 강강술래의 어원이 사내들을 부르는 뜻이라고 보았다.

정만조는 여기에 주를 달아 이날 밤 여러 집안 여자들이 달을 밟고 돌며 노래할 때, 한 여자가 선창하며 여러 여자들이 느릿느릿 받는데 이 놀이를 강강술래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놀이를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전술(戰術)과 결부시켜 마치 그때에 생긴 놀이인 것처럼 말들을 하고 있다. 명량해전 때 이순신이 전술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기록문화라 자랑하는 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이분(이순신의 조카)의 행록이나 당시 수군장수들의 장계 등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정만조鄭萬朝는 소리의 고장인 진도에서 무려 12년씩이나 있었는데 그것을 빠뜨릴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충무공에 의하여 강강술래가 행해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이충무공이 전술에 이용을 했었다면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강술래가 1966년 2월 1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 이충무공이 침공해오는 왜군에게 우리의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변복을 시켜 원을 만들고 춤을 추게 하여 이를 본 왜군들이 겁에 질려 도망하게 하였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라고 본다. 어찌보면 이 놀이문화가 주로 남해안에서 행해졌기에 누군가 여기에 짜 맞춘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래라고 발음을 하던 수월래로 소리가 나든,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민요들이 그러하듯 무의미한 음의 반복이나 후렴을 관습적으로 쓰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이 놀이의 특성을 보면 처음에는 느리게 나가다가 자진모리 장단으로 바뀌면서 흥을 돋군다. 강강술래의 노랫말을 보면 지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 선소리(앞소리)하는 사람에 의해 즉흥적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

이 놀이의 사이사이에 남생아 놀아라, 고사리 꺾기, 청어 엮기(풀기), 덕석몰기(풀기), 지와 밟기, 꼬리 따기, 쥔쥐 새끼 놀이, 문 열어라, 개고리 타령, 도굿대 당기기 등 부수적인 춤들을 번갈아 추면서 노는데, 새로운 춤으로 넘어갈 때마다 원무의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원무는 시작과 끝, 앞과 뒤의 구별이 없이 둥글게 하나가 되는 것으로, 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 있으며 강강술래를 통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숨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러 지방의 노랫말을 보면 산아산아 추영산아 강강술래/ 높이 떴다 백두산아 후렴/ 잎이 피면 청산이요 후렴/ 꽃이 피면 화산(花山)이오 후렴/ 청산 화산 넘어 가면 우리부모 보련마는 후렴/ 해는 지고 달떠온다 후렴/ 하늘에는 베틀 놓고 후렴/ 구름 잡아 잉에 걸고 후렴/ 달은 잡아 북 만들고 후렴/ 별은 잡아 무늬 놓고 후렴/째깍째깍 잘도 짠다 후렴.......,

이밖에도 재미있는 노래 말들이 있다. 순서와 관계없이 한 대목씩 모아서 여기에 기록한다.

달에 달에 방연줄은 후렴/ 단양(담장)넘에 손주는데/ 우리 님은 어디가고/ 날 손 줄줄 모르는가/ 달 떠 온다 달 떠 온다/ 동해동천 달떠온다/ 저야 달이 뉘달인가/ 방호방내 달이라네/ 방호방은 어디가고/ 달뜨는 줄 모르는가/ 달뜨는 줄 안다마는/ 기가막혀 못가겠다/ 기막힐 때 오라든가/ 좋고 존날 날 받아서/ 나를 보러 오라 했제/ 딸아 딸아 막내딸아/ 맨발 벋고 샘에가냐/ 텃논 팔아 신 사주랴/ 텃밭 팔아 옷사주랴/ 아니 아니그말마소/ 옷도 싫고 신도 싫소/ 장지밖에 메어둔 소/ 황소 팔아 임사주소/ 저 건너 큰 산 밑에/ 동백 따는 저 큰아가/ 앞 둘러라 인물보자/ 뒷 둘러라 태도보자/ 인물태도는 좋다마는/ 눈 주자니 너 모르고/ 손치자니 남이알고/ 우리 둘이 일하다가/ 해가지면 어쩔거나 강강술래/

이렇듯 강강술래의 노랫말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지만 선소리하는 사람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고 젊은 여자들의 놀이서인지는 몰라도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밖으로 말하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놀이를 핑계 삼아 노골적인 표현을 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서... 듣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들의 놀이문화가 특별한 행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이너무 아쉽다.

1912년 당시 해남군수가 서남해안지역에 강강술래라는 놀이가 있다고 총독부에 보고한 것이 공식문서로는 최초이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