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섭(87, 동이면 남곡리)씨 이야기

 

▲ 조순섭씨와 아내 조순자씨가 장손 결혼식 때 촬영한 가족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사진을 찍었다. 조순섭씨는 한 달 전 위암 수술로 수염을 깎았지만, 예전처럼 다시 기를 예정이라고.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남곡리(개미재)에 사는 조순섭 씨(87)입니다. 한국전쟁 참전자로 국가유공자인 그는 1952년 8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1년 동안 금화지구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야간 기습작전에 함께 투입됐다가 총탄을 맞고 "간호원"을 외치며 적진 속에서 죽어가던 전우의 피맺힌 절규를 아직도 꿈속에서 듣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 조순자 씨(83)마저 "64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며 놀라워했던, 숨겨두었던 아픈 과거를 토로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얘기를 털어놓으니 이제야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합니다."

50대부터 길렀던 조씨의 수염은 삼국지의 관우를 떠올릴 정도로 동네에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전 위암 수술을 받으며 이 멋진 수염을 깎아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냐"고 묻자 일말의 여지도 없이 "지금"이라고 답했습니다.

■ 굶주림, 유년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

나는 1932년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조종목)와 어머니(공인옥)는 슬하에 8남매(4남4녀)를 두셨다. 나는 여섯째였는데, 두 명의 형(쌍둥이)과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작은형이 강제 징용을 당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작은형은 해방 이후에도 끝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 속에서 '행방불명'이라는 낯선 단어만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는 동이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그때까지 3년 동안 학교에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일본어로 공부해야 했다. 마을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이었는데, 책보를 둘러메고 뛰어다녔다. 유년 시절과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림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동이초를 졸업하고 옥천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이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집에 남고 장성한 큰형과 19세의 나만 피난을 떠났다. 먼저 출가한 누이들과 매형들을 따라가는 피난길이어서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솥단지와 쌀자루를 짊어진 우리 형제는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쌀이 떨어졌고, 끼니가 다가올 때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부산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누이들과 매형들이 배급받아 오거나 얻어온 소량의 보리나 미숫가루로 겨우 아사(餓死)를 면했다. 하도 배가 고파 나중에는 부끄러움도 잊고 큰형과 함께 거리로 나가 동냥을 하기도 했다. 그때 겪었던 기아(飢餓)의 악몽 때문에 나는 지금도 미숫가루를 먹지 못한다.

▲ 2008년 공군에 입대했던 손자의 부대에 초청받았을 때 찍은 사진. <사진제공: 조순섭씨>

 

■ 5·29고지를 사이에 두고 양보 없는 접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 수복이 이뤄진 이후 우리는 옥천으로 귀향했다. 전시의 옥천은 모든 것이 뒤숭숭했다. 젊은 학생들은 곧바로 학도의용대 선무공작대로 편입되었다. 살벌한 전시체제였기에 일방적 명령이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경찰의 치안 활동을 보조했다.

1951년 7월 17일 옥천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당시 우리는 이것을 '7.17 사건'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이날 옥천읍으로 진입한 빨치산이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 주겠다"고 선동하자 수백 명의 주민과 학생들이 옥천경찰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경찰이 몰려든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경찰의 발포로 경찰서 옆 도랑에 시신이 쌓였고 핏물이 흘렀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위험한 옥천을 떠나 누나와 매형이 사는 대전으로 갔다. 누나의 소개를 받아 서대전에 있던 미군부대 일용직 직원으로 1년 동안 일했다. 미육군병원 원세븐하우스라 불리는 부대의 식당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심부름을 해주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여기서 어깨 너머로 다양한 서양 요리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1952년 5월경 나는 입영 영장을 받았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농촌에서 모심기가 끝난 시점이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다음 나는 곧바로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1.4후퇴 이후 남북은 38선 부근에서 대치한 채 지리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고지전(高地戰)을 벌였고, 이 와중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내가 배치된 장소는 3사단이 관할하던 금화지구라 불리던 곳이었다. 국군과 중공군이 이른바 5·29고지를 사이에 두고 양보 없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뀔 때마다 고지의 주인도 바뀌었다. 나는 여기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양쪽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터지는 고지에서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 2010년 옥천에서 도민체전이 열렸던 당시 찍었던 사진. <사진제공: 조순섭씨>

 

■ 아직도 절대 잊히지 않는 끔찍한 하루

한 번은 고지를 점령했다가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 살기 위해선 어렵게 차지한 고지를 버리고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가장 약하다고 판단되는 방향을 정한 다음 무조건 돌진했다. 적군이 쏘아대는 총탄에 함께 갔던 거의 모든 병사가 쓰러졌다.

거의 매일이 악몽이었지만 아직도 절대 잊히지 않는 끔찍한 하루가 있었다. 충남이 고향인 '조기채'라는 동료가 같은 소대, 같은 분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 살인가 두 살인가 나보다 어렸는데, 고향이 같다 보니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때 우리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 꼭 살아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우리 두 사람은 중공군에게 빼앗긴 5.29고지를 되찾기 위한 야간 기습작전에 투입됐다. 그날 따라 중공군의 반격은 거셌고, 전세가 기울자 잠시 후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아군 진지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향해 적군의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한참 달리다 보니 옆에 있어야 할 조기채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원! 간호원!"

총탄에 맞은 조기채가 적진 속에 남아 고통스런 목소리로 절규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사격권 안이라 구출해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군과 적군이 대치한 전선의 한 가운데서 조기채는 서서히 죽어갔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비명 소리도, 간호원을 부르던 소리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벽이 되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꿈속에서 조기채의 절규를 듣곤 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전투가 끝날 때마다 옆에 있던 전우들이 사라졌다. 그런 절망적인 아비규환 속에서도 나는 용케 살아남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렇게 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팔다리는 물론이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 조순섭씨는 올해 초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기도 했다. 사진은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단양을 방문했을 당시. 아들과 딸, 며느리, 손자, 아내와 함께한 기념사진. <사진제공: 조순섭씨>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착용하고 대기 중인 조순섭씨. <사진제공: 조순섭씨>

 

■ 위암 수술 불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지금

"아, 이제 살았구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소식이 들려온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던 말이다. 청년들의 죽음을 담보로 삼아 진행된 잔인한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1955년 제대할 때까지 나는 딱 두 번 휴가를 받았다. 전쟁이 끝났지만 제대 병사가 남기고 간 구멍 난 군복과 누더기 방한복으로 버텨야 했던 열악한 군대 상황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깨끗한 군복 한 벌을 가지고 휴가 때마다 서로 돌아가며 입었다. 나도 그 군복을 빌려 입고 휴가를 나왔다.

군복을 입고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마을에 들어서다 19세가 된 고향 후배 조순자를 우연히 만났다. 가녀린 소녀가 어느새 처녀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여전히 이성(異性)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20세의 조순자가 성숙한 여자로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제대 직후 혼례식을 치렀다.

아내가 원래 태어난 곳은 안남면(현재 옥천읍) 오대리(오리티)였다. 오대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기에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다. 그런데 소녀 조순자가 11세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내가 살던 남곡리로 이사를 왔다. 마을 야학을 다니다 이사온 소녀 조순자는 이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상급생인 내가 그녀를 동이초등학교에 데려가서 입학 절차를 밟아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 소녀와 평생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 다음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논 10마지기(2천평), 밭 1천평이 전부인지라 큰돈을 벌어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해서 아이들 모두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칠 수 있었다.

아내는 6남매(3남3녀)를 낳았다. 1녀 규옥(1남1녀), 1남 규완(2남), 2녀 규희(2녀), 2남 규삼(2남), 3남 규산(3녀), 3녀 규나(2녀)가 다시 13명(5남8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공교롭게도 현재 세 아들은 모두 청주에서, 세 딸은 모두 부천에서 살고 있다. 같은 지역에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고 있기에 마음이 놓인다.

돌아보면 크게 치부(致富)하거나 출세한 자식은 없지만 효자, 효녀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감사하고 있다. 부모 생일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주까지 모두 모여서 축하해준다. 수시로 선물과 용돈도 주고 서로 돌아가며 고향집에 와서 반찬도 만들어 놓고 간다.

한 달 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열심히 살았기에 후회도 없고, 여한도 없다.

▲ 조순섭씨와 조순자씨 부부가 집 마루에 앉아 강아지 쫄쫄이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씨 부부는 쫄쫄이 외에도 고양이 '나비'도 함께 기르고 있다. 사진 촬영 당시 나비는 잠시 출타 중이었다.

 

▲ 조순섭씨와 조순자씨 부부가 집 마루에 앉아 강아지 쫄쫄이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씨 부부는 쫄쫄이 외에도 고양이 '나비'도 함께 기르고 있다. 사진 촬영 당시 나비는 잠시 출타 중이었다.
▲ 조순섭씨와 조순자씨 부부가 집 마루에 앉아 강아지 쫄쫄이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씨 부부는 쫄쫄이 외에도 고양이 '나비'도 함께 기르고 있다. 사진 촬영 당시 나비는 잠시 출타 중이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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