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 임명 과정과, 전방삭 장군 전투 참여 이전 전라좌수영의 실정(實情).

당시 우리나라 조선의 수군 편제를 알아보고 전라좌수영의 규모와 중요성,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과정을 알아보자. 전방삭 장군은 건공장군(建功將軍) 신분을 내려놓고 직함을 극구 사양하며 백의종군으로, 제2차 출동부터 전라좌수영 전투에 참전 했기에 미리 당시의 좌수영 실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수군 편제는 충청수영,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으로 나누어 졌으며, 필자가 들추어 보고자하는 전라좌수영이 관장하는 범위와 각 수영 역대 절도사를 알아보자.

         ∎각 수영 역대 수군절도사와 관할지역
         충청수영   - 13관  5포. 수군절도사 (최호→권준→오응태)
         전라우수영 – 12관 15포. 수군절도사 (이억기→김억추→안위)
         전라좌수영 –  5관  5포. 수군절도사 (이순신→원균→이순신→이시언)
         경상우수영 –  8관 16포. 수군절도사 (원균→배설→권준→배설→이순신)
         경상좌수영 – 18관 16포. 수군절도사 (박홍→이운룡)

▲ 각 수영 위치(캡처)

여기에서 말 하는 ‘관’은 고을이고 ‘포’는 수군 기지를 뜻한다. 보시다시피 전라좌수영은 그 규모가 타 수영에 비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보아 책임은 막중했다. 전라좌수영 5관은, 순천도호부(여수, 순천 일부지역), 광양현(광양 일대), 낙안군(현 벌교, 순천시 낙안면 일대), 흥양현(현 고흥군, 여수 삼산면 일대)이고, 5포는 방담진,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에 위치하고 있다.

▲ 전라좌수영 5관 5포

임란 당시 5관의 현감, 군수와 5포의 첨사, 만호를 알아야 전라좌수영 이순신 장군의 관군 지휘 체계를 파악 할 수 있기에 필자가 조사한대로 적어 본다.

전라좌도수군 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 이순신(李舜臣1545. 정3품 당상관)
전라좌도수군 우후(全羅左道水軍虞侯)     - 이몽구(李夢龜1554. 정4품)
∎5관(五關)
∙순천 도호부사(順天 都護府使) - 권준  (權俊1541.      종3품)
∙광양 현감(光陽縣監)          - 어영담(魚泳潭1532.    종6품)
∙낙안 군수(樂安郡守           - 신호  (申浩1539.      정4품)
∙보성 군수(寶城郡守)          - 김득광(金得光 ?       정4품)
∙흥양 현감(興陽縣監)          - 배흥립(裵興立 1540.   종6품)

∎5포(五浦)
∙방답진 첨절제사(防踏鎭 僉節制使) - 이순신(李純信 ?     종3품)
∙사도진 첨절제사(蛇渡鎭 僉節制使) - 김완  (金浣   ?     종3품)
∙발포진 만호(鉢浦鎭 萬戶)         - 나대용?(羅大用1556  종4품)
∙여도진 만호(呂島鎭 萬戶)         - 김인영(金仁英1543   종4품)
∙녹도진 만호(鹿島鎭 萬戶)         - 정운  (鄭運1543     종4품)
 
전라도는 평야가 많아 곡창 지대이다. 곡물 생산량이 많아 적들이 첫 번째로 노리는 지역이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도 경상도 보다는 전라도에 인재들을 배치하려고 하였다. 그 자리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시비비가 많았으므로 당시의 과정을 살펴본다.

선조소경대왕실록

조선 조정에서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이순신 장군을 발탁하여 임명까지의 과정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2일 기묘 2번째 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비변사 낭청이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에 보내 공을 세우게 하자고 청하다.

비변사 낭청이 아뢰기를,
"이천(李薦)·이억기(李億祺)·양응지(梁應地)·이순신(李舜臣)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3일 경진 1번째 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심대·이홍·이경록·성윤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심대(沈岱)를 사간에, 이홍(李珙)을 강원도 도사에, 이경록(李慶祿)을 나주 목사에, 성윤문(成允文)을 갑산 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 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 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일 (?) 무진 5번째 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다.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이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井邑)에서 진도 군수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 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

⋇상기 내용 중 의문점이 있다. 인터넷상 선조수정실록에는 2월 1일로 나와 있고,⌜충무공이순신전서⌟에서는 2월 15일로 기록하고 있어 혼란스러우나 내용상으로 보아 2월 15일이 맞는 것으로 간주된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6일 계미 2번째 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이순신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8일 을유 1번째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각 수영 절도사의 연령을 조사해 본다. 이순신은 이억기만 후배 이고 다른 분은 선배였다. 전방삭 장군은, 1545년생으로 이순신 장군과 동갑내기 이었다.

충청수영    절도사. 최호   1536년 출생(임진년의 연령 : 56세)
전라우수영  절도사. 이억기 1561년 출생(임진년의 연령 : 31세)
전라좌수영  절도사. 이순신 1545년 출생(임진년의 연령 : 47세)
경상우수영  절도사. 원균   1540년 출생(임진년의 연령 : 52세)
경산좌수연  절도사. 박홍   1534년 출생(임진년의 연령 : 58세)

이와 같은 조정 간원들의 논란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라 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임명 되었다.

1592년 5월 26일 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 관하(管下)를 찾은 뒤 전라좌수영 장수들과 함께 많은 전과를 올렸다. 다음 회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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