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모장군(禦侮將軍) 전방삭(全方朔) (7)

전방삭 장군은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종실 주주통신원l승인2020.02.05l수정2020.02.0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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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삭 장군은 광해군 세자를 호종(扈從)하고 피신한 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환도(還都)하였다. 광해군 세자는 병력 증강과 군량미 확보를 위해 각 지방 관청으로 순찰길에 나섰다. 전주에 도착했을 때 전방삭 장군은 세자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소신은 고향에 내려가 왜적을 물리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하자 세자께서는 그 뜻을 칭찬하며 기꺼이 허락하였다.

전방삭은 옛 친구이고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주둔(駐屯)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 군영으로 달려갔다. 한편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제1차 출전(1592년 5월 4일부터 5월 9일까지)에서 세 번(옥포해전, 함포해전, 적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연해지역 남녀노소는 이순신 함대가 도착하자 열렬히 환호하였다. 그런데 그 대열 속에 전방삭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방삭 장군을 바로 알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지냈던 사연을 이야기한 뒤, 전방삭 장군은 직책을 극구 사양하며 백의종군으로 군무를 돕겠다고 하자, 이순신 장군 또한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어 구국 정신에 감탄하며 위기의 조국을 구해내자고 굳게 맹세하였다.

               

▲ 전라좌수영 상상도(캡처)

1592년 5월 26일 좌수영 이순신 장군 함대에 합류한 전방삭 장군은 제2차 출동부터 이순신 장군과 함께 고락을 함께하는 수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 (天安全氏大同譜, 湖南節義錄, 宣武功臣追慕錄참조)
 
∙제2차 출동(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황포해전, 율포해전)은 1592년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작전이 이루어졌다. 성과로는 사천포  해전에서 적선 13척, 당포해전에서 21척, 당황포해전에서 26척, 율포해전에서 7척 등 합계 67척의 적선을 격파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3명 전상자가 36명 발생했다.

▲ 전투하는 수군(전쟁기념관 제공)

∙제3차 출동(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은 1592년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전투를 했다. 이때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출전하였다. 한산도해전에서 적선 59척, 안골포해전에서 30척 모두 89척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제4차 출동(장림포해전, 다대포해전, 부산포해전)은 1592년 8월 24일 부터 9월 2일 까지 전투를 했다. 전라좌우수영 함대는 협선92척을 포함해 모두 166척이 출항하였다. 또 당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 7척과 합류하여 조선군 연합 함대는 173척이 되었다. 조선 수군은 장림포 해전에서 적선 6척, 부산포해전에서 100여 척을 격침시켰다.

∙제5차 출동(용포해전)은 1593년 1월 22일 조정의 분부를 받은 후 2월 6일부터 4월 3일까지 제5차 출동에 나섰다. 1593년 2월 6일 밤 사랑에 이르러 머물렀다.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 있었다.  전라우수사 전선 40여 척과 합류하여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2월 10일 웅천현 옹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영등포 뒤의 소진포(蘇秦浦)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그러나 적의 함대는 전라도수군 함대와 해상 결전을 피하고 그들이 구축한 성 진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겁을 먹은 것이다. 여러 차례 유인책을 구사 했지만 적이 응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포격을 가했다. 적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거의 섬멸되었다. 도망가는 적선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배에 타고 있던 10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7월 14일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한 후 운주당(運籌堂)을 설치했다. 이 운주당은 이순신 장군이 1593년 8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1597년 2월 26일까지 3년 7개월동안 머문 곳이다. 그뒤 원균 통제사까지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사용되었다. 한산도 기지를 설치 할 때 전방삭 장군은 한산도와 본영을 오가며 전투 지원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방삭 장군은 여수 본영 진해루(鎭海樓)작전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거의 여수 본영을 뒤로하고 한산도 바다에 나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는 조정의 실정을 실록으로 알아보자.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8월 1일 임오 6번째 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이순신을 본직은 그대로 둔 채 삼도수군통제사에 겸임시키다
이순신(李舜臣)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겸임시키고 본직(本職)은 그대로 두었다. 조정의 의논에서 삼도수사(三道水使)가 서로 통섭(統攝)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통제사를 두어 주관케 하였다. 원균(元均)은 선배로서 그의 밑에 있게 됨을 부끄럽게 여겨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육지는 군수물자에 고달프다는 점을 들어 체부(體府)에 청하기를,
"다만 일면의 해포(海浦)를 부여해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시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소금을 구워 판매하여 곡식 몇 만 석을 비축하였으며, 영사(營舍)와 기구(器具)가 완비되었다. 백성을 모집하여 완취(完聚)시키니, 하나의 거진(巨鎭)이 되었다.

이순신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1593년 8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원균은 5년 선배로 이순신 휘하에 있게 됨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여 전투에 차질을 빗기도 하였다. 

잠시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었는데 전염병이 돌아 병사들이 수 없이 죽어나가, 병력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전서본⌟에 따르면 “3도의 사망자 수는 1,704명, 앓고 있는 자 3,759명이다”라고 적혀있다. 그중 전라좌수영 병사자가 406명(전서본 기록)이라 한다. 군량미마저 모자라 병사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방비책이 부족하여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도 전방삭 장군은 함선을 건조하는 일에 조력을 기울이고, 망가진 전선을 수리하는 일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 전선모습

전라좌수영에서는 이때 전선 40여척을 건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 진중에서 수군만의 과거를 개최할 것을 건의하여 1594년 4월 6일 수군만으로 한산도에서 무과 시험을 치렀다.  전방삭 장군은 더이상 무과에 나가지 않았다. 오직 수군지원과 병참업무를, 때로는 최전방 공격수로 신명을 다 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신뢰하였던 천안인(天安人 : 전방삭은 천안(天安) 전씨(全氏) 임)으로 남고자 하였다.

∙제6차 출동(당황포해전)은 1594년 3월 3일 이순신은 3도(전라좌도, 전라우도, 경상우도)의 모든 수군을 집결하여 출전을 단행하였다. 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적선 10척을 좌우로 협공하여 깨뜨리고 불살라 버렸다. 이어 어영담 등의 승첩 보고에 “적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적선 21척에는 기와와 왕죽을 만재한 채, 줄지어 있었으므로 모두 깨뜨리고 불태웠습니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6차 출동 결과는 적선31척을 격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어영담의 전술과 용맹스러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영담은 아깝게도 전염병에 걸려 1594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유능한 인재를 잃었음이 애석하다. 이순신 장군께서도 전염병으로 여러 날 통증이 심하여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제7차 출동(장문포해전)은 1594년 9월 3일 선조임금의 비밀 교지가 왔다. “수륙 여러 장수가 팔 장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을 세워 토벌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그 뒤 권율의 밀서에서 9월 27일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전투는 육군도 참가하기에 수륙 합동 작전이다.

여기에서 밝혀둘 사실은 전라좌수영 관하에 활동한 인물로 난중일기에 261회나 등장한 권준은 1541년생 이고, 156회에 걸쳐 등장한 이억기는 1561년생이다. 출생연대 파악이 가능한 장수들을 몇 분을 살펴보면, 배홍립(1546), 송여종(1553), 신호(1539), 어영담(1564), 송희립(1553), 최대성(1553)들 이다.  전방삭 보다 권준과 신호는 선배이고, 여타는 작게는 1세, 많게는 19세 후배였다. 건공장군 전방삭(1545)이였기에 선배로서 솔선수범하는 행동과 전술에 관한 지혜 등을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여러분도 군대생활이나 단체생활에서 인간관계의 범주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가리라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헌병이, 전방삭 장군이 일본군을 무수히 사살한 사실을 알고,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장자 후손의 집을 급습하여 유품을 빼앗아 가고 집까지 불 지른 억울하고 분통한 일이 있어 후손들은 한을 품고 살고 있다. 이에 근거자료 제공이 조금 아쉽다. 혹시라도 랑케의 이론을 추종하는 포장된 역사학자처럼 함부로 전방삭 장군의 애국충절 정신을 평가 절하하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오직 남은 증거 자료는, 다시 말 하건데 1605년에 선조대에 발행한,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 남아있고, 후세 조선 정조 때(1770년대?)에 편간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1992년에 발행된 광주•전남조선오란충의사록(光州全南朝鮮五亂忠義史錄)에 기록이 남아있어 전방삭 장군의 공적이 증명되고 있다. 그 뒤 역사학자의 조사연구에 의해 상당부분 사실이 밝혀지고 있어 후손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고 있다는 심정을 또 다시 말씀드린다. 아무리 좋은 말도 3번 이상 하면 듣기 싫다고하나, 한이 맺힌 심정이어서 자주 거론하게 된 점에 여러분의 양해(諒解)를 구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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