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단과 장춘단비
이야기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성당길을 나와 동호로를 건너 성곽길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동호로에서 서쪽으로 장충체육관을 지나 장충단공원으로 들어간다. 수표교를 건너면 바로 앞에 장충단비가 보인다. 장충단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다. 고종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 때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1900년에 남산 동쪽 자락 이곳에 지었다. 그 후 그때 죽은 문관들도 함께 제사 지내고, 이듬해에는 을미사변 외에도 갑신정변, 임오군란 등 개항 이후 순국한 사람 모두를 제향을 하는 국립현충시설로 격상했다. 순종이 앞면을 쓰고, 충정공 민영환이 뒷면을 쓴 장충단추모비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는데, 신라호텔 건립 시에 발견해 호텔 안에 세웠다가 1969년 수표교 서쪽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당의 터를 이곳에 정한 것은 정치적 고려가 다분히 작용한 결과다. 남산 서쪽 회현동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했던 왜장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1900년 당시에 일본공사관이 있었으며, 일본인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일본의 영향이 가장 큰 곳이었다. 고종은 일부러 왜색이 짙은 남산 일원을 택했던 것이다. 후에 고종의 의도를 알아챈 일제는 1907년 장충단 제향을 폐지하고, 3.1운동 이후에는 그 일원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장충단공원은 군사정권하에서 장충체육관이며 신라호텔이며 국립극장이며 국립국악원이며 자유총연맹이며 타워호텔 등이 들어서면서 처음의 면적 42만㎡에서 3만 3천㎡로 축소됐다.

▲ 장충단공원 입구
▲ 장충단비의 전면

석호정(石虎亭)
조선 인조 때 창건했던 사정(射亭)으로 활터를 말한다. 석호정은 원래 현재의 장충단공원 뒤쪽 산기슭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석호정이란 이름은 아마도 중국의 석호(石虎)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초나라의 웅거자(雄渠子)라는 용사가 어두운 밤길에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호랑이에 적중했다. 그러나 다음날 발견한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다. 이 고사가 주는 교훈은 바위라도 뚫을 수 있는 결의로 정진한다면, 무엇이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활쏘기는 무인은 물론 문인들이 익혀야 하는 필수 무예이자 신분을 가리지 않는 대중적인 놀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도성 안 산기슭 곳곳에 활을 쏘는 정자, 즉 사정들이 있었다. 석호정은 명맥으로나마 유지하는 서울의 사정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석호정 건물 정면
▲ 석호정 표지석

박문사(博文寺)
1932년에는 공원 동쪽 현 신라호텔 자리에 이등박문을 추념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사당이 세워졌다. 한일합병의 주역을 추모하는 사찰의 정문을 짓기 위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목재를 뜯어다 지었고, 그 부속건물은 경복궁 궁궐의 목재를 뜯어다 지었다니 민족의 서글픔이 사무치는 역사적 공간이다. 그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를 따서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23주기인 1932년 10월 26일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등 일제관리들 외에도 친일부역자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이 대거 참석해 그를 추념했다.

해방 후에는 관광공사에서 운영했던 영빈관의 정문으로 박문사의 정문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후 신라호텔로 영빈관을 매각했는데, 1973년 기공하여 1979년 준공한 신라호텔 또한 영빈관 정문을 호텔 정문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영빈관에서 신라호텔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예전 박문사의 돌계단이다.

▲ 신라호텔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화사한 벚꽃 사이로 보인다. 옛 박문사 돌계단이다.

수표교(水標橋)
수표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다. 길이는 27.5m, 너비는 7.5m, 다리 높이는 3.4m로 세종 2년(1420) 개천(開川, 청계천)에 세웠다. 세울 당시의 이름은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하여 마전교(馬廛橋)였다. 수심을 재기 위한 수표(水標)는 세종 23년(1441)에 처음 세웠는데, 나무로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현존하는 돌기둥수표는 후대에 개체한 것이다. 수표를 세우면서부터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새로 불렀다.

화강암으로 짜 맞춘 4각형 교각은 2단을 이루고 있다. 아랫것은 다듬지 않은 것이지만, 위의 것은 모를 죽여 물 흐름의 저항을 줄이려고 했다. 난간석의 연꽃봉오리와 연잎조각이 아름답다. 다리 바닥에 깐 투박한 천판석(天板石)은 세월의 모진 공격에도 끄떡없을 영원한 반석처럼 견고해 보인다.

영조 36년(1760) 개천을 준설할 때 다리 옆에 눈금을 새긴 수표를 다시 세웠고,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씨를 새겼다. 경진지평이란 경진년에 하천 바닥을 평탄하게 정비했다는 뜻이다.

원래 청계천 위에 있던 다리를 1959년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 그때 수표석(水標石)도 함께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수표교의 현재 모습

자유센터란?
자유센터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중심국가로 만들려는 의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1962년 남산 자락 대단지 안에 국제회의장과 본부, 숙소를 갖춘 세 동의 건물을 짓기 위해 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을 조직하고, 국민 성금 1억5천만 원과 국가 보조금 1억 원의 기금으로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참전국들이 내기로 했던 부담금이 걷히지 않아 세 개의 건물 중에서 자유센터만 먼저 지었다. 현 타워호텔이 있는 연수원 자리와 현 스파클럽이 있는 해피홀 자리는 건물을 짓지 못하고 팔아버렸다.

건축은 그 시대의 이념을 표출하는데 직접적인 호소력이 있다. 자유센터 또한 그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군사문화와 반공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실제 기능보다는 군사정권의 정당성과 그 정권이 추구하는 경제제일주의를 드높이기 위한 건축물이다. 말하자면 실용성보다는 특정 목적의 기념물로서 의미를 지니는 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김수근도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설계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센터 건물을 받치고 있는 열주는 마치 군홧발을 떠오르게 한다.

▲ 한국자유총연맹(자유센터) 건물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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