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애를 실천한 사해동포주의자 임은조

▲ 쿠바 한인 사회 디아스포라의 기원에 불을 밝히고 쿠바 한인사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헤로니모 임 김(한국이름 임은조)의 치열한 삶을 다룬 영화 <헤로니모 임> 포스터

(출처 : 전후석 감독의 영화 <헤로니모 임>)

영화 『헤로니모 임』은 디아스포라 한인 2세 헤로니모 임(한국이름 임은조)에 대한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놀라운 사실은 헤로니모가 1959년 쿠바 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사회에 처음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아닐까 싶다. 쿠바 혁명을 생각하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를 떠올릴 뿐 한국인을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바티스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 혁명에 한국인이 핵심적으로 참여했다.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핵심 인물로 한국인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아바나 법대에 최초로 입학한 헤로니모 임(한국 이름 : 임은조). 헤로니모 임이 아바나 법대에 입학한 것은 당시

쿠바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멕시코 한인사회에까지도 뉴스거리가 되었다.(출처 : 영화 <헤로니모 임>)

실제로 헤로니모와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 법대 동기생이자 진보정당 오르토독소(Ortodox)에 시차를 두고 가입한 열혈 애국청년들이었다. 헤로니모는 병원비를 빼돌린 부패한 관료사회를 고발하며 학생 대표로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고 투옥됐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감으로 회자된 정치인 에드와드 치바스의 노력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청년 시절 헤로니모는 에드와드 치바스와 독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무게감을 지녔던 학생대표였다.

헤로니모가 결혼할 무렵 바티스타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 자유와 언론을 탄압했다. 그러자 헤로니모는 민주화운동가가 되어 바티스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변혁 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헤로니모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총을 들고 절규하는 카스트로 혁명군과 연계돼 활동했다. 헤로니모는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수도 아바나에 비밀지하 정치조직을 꾸려 무려 10년 동안 반독재 직업혁명가로 활동했다.

헤로니모는 혁명군 근거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 정글로 군자금과 무기, 의약품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아울러 쿠바 인민 대중을 대상으로 바티스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선전 활동을 담당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군사조직 못지않게 헤로니모의 정치조직은 쿠바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쿠바혁명사를 이해하는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헤로니모의 도시비밀조직이 없었다면 카스트로의 쿠바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만큼 헤로니모의 아바나 지하활동 임무는 매우 막중했고 그 역할 또한 위대했다.

▲ 1959년 1월 1일 미국이 지지하는 바티스타 군사독재정권을 쿠바혁명을 통해 붕괴시키고 하바나 시가 행진 중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 (출처 : 영화 <헤로니모 임>)

1959년 1월 1일 쿠바혁명이 성공했을 당시만 하여도 카스트로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자신은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대중 연설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면적인 경제봉쇄와 외교관계 단절은 쿠바로 하여금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카스트로는 미제국주의에 맞서 사회혁명을 강조하며 인민대중들에 대해 지지를 이끌어내는 대중 정치연설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쿠바 인민의 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1965년 쿠바공산당을 결성했다. 쿠바공산당 결성 당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인물이 헤로니모였다. 다시 말해 헤로니모는 쿠바공산당 창당 멤버였다.

헤로니모는 1959년 쿠바 혁명 직후 경찰청 요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쿠바 혁명의 주역인 체 게바라가 식량 산업부 장관 시절 차관보로 중책을 맡아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에 맞서 함께 경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체 게바라가 주선한 회의에 헤로니모는 빠짐없이 함께 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정보국 요원으로서 쿠바 혁명에 자신의 목숨과 열정을 다 바쳤고 사회주의 국가 쿠바 건설에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헤로니모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코뮤니스트로서 확고한 신념에 따라 살아갔다. 이 부분은 헤로니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동서 냉전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헤로니모는 고립된 쿠바 경제와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걱정했다. 미소 냉전체제가 와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었으며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그리고 곧 이어 사회주의 모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마저 해체되었다.

더구나 쿠바와 친교를 맺었던 북한조차 1990년대 들어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하는 이중 삼중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헤로니모는 쿠바 사회주의를 지켜내고자 고뇌했고 분투했다.

헤로니모의 사상과 신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계기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한국에서 열린 「한민족 대축전」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쿠바 한인 1세대이자 헤로니모의 아버지! 임천택의 조국에 발을 내딛으면서 사상적 혼돈을 겪었다.

1960년 쿠바와 국교를 맺은 북한은 쿠바가 미제국주의와 싸울 때 AK소총 10만 정을 지원해 주며 사회주의 형제국가로서 우의를 두텁게 나눴다. 그러나 북한은 헤로니모 생전 내내 여전히 비밀스러운 나라이자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은 헤로니모에게 상처만 주었다.

반면에, 한국은 헤로니모에게 같은 뿌리로서 깊은 동포애와 우정을 각인시켜 주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조국이자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발전된 모습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갖게 하였다. 특히 바로 밑에 동생이 사는 미국 마이애미를 방문했을 때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충격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한국 방문은 경기도 광주 출신인 아버지 임천택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버지 임천택이 천도교 신앙을 간직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쿠바 애니깽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왜 그토록 한글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탄식하기도 했다.

▲ 헤로니모 임의 가족 사진으로 결혼 직후인 1950년으로 추정.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버지 임천택, 네 번째가 어머니 김귀희,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헤로니모 임(임은조)이다. (출처 : 영화 <헤로니모 임>)

실제로 아버지 임천택은 대한인 국민회 쿠바한인지부를 설립한 인물이자 마나티와 카르데나스 지역에 한글학교를 세워 쿠바 한인 2세들에게 우리말과 민족정신을 가르쳤다. 언어는 그 민족의 정체성을 담아내기에 언어를 잃어버리면 민족의식이나 정체성도 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쌀 한 숟가락씩 차곡차곡 모아 그 돈을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도 쿠바 한인들이 보내준 독립운동자금 이야기와 함께 쿠바의 임천택, 박창운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1990년대 후반 헤로니모는 자신이 쿠바인이면서도 한민족의 일원임을 확고하게 자각했다. 그리하여 아버지 임천택이 평소 강조했던 디아스포라의 고난을 극복하고 한국인으로서 그 정체성을 간직하는 활동에 남은 생을 바쳤다.

헤로니모가 인생의 마지막 1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쿠바 한인사회 디아스포라를 위해 온 정성과 열정을 바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디아스포라 쿠바 한인 사회의 역사를 책으로 엮어 펴내는 일이었다. 이것은 헤로니모의 여동생 마르타 임 장(한국 이름 임은희, 마르크스철학 박사)이 쓴 쿠바 한인의 역사 『COREANOS EN CUBA』(2001)를 출간함으로써 꿈을 이루었다.

▲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원에 불꽃을 지핀 헤로니모 임(임은조)의 쿠바 한인 후손.

후손 뒷편에 한글로 된 금언이 태극기 옆 액자 속에 적혀 있다. (출처 : 영화 <헤로니모 임>)

두 번째 헤로니모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한인들이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한국의 언어와 역사, 바로 한국 문화를 전수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표현했다. 여기엔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연고도 없는 쿠바로 내려가 한글학교 교사를 자청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꿈이 실현되었다.

마지막으로 쿠바 사회 내 흩어진 한인사회를 재조직해 내는 일이었다. 바로 '쿠바 한인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 헤로니모는 낡은 고물 자동차를 끌고 쿠바 사회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인구조사를 통해 900명이 넘는 쿠바 한인들을 조직해 내었다. 그런 활동 와중에 헤로니모로 하여금 쿠바 한인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깊이 공감하게 하였고 쿠바 한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변호사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아직도 쿠바 한인 사회에선 헤로니모를 쿠바 한인의 변호사이자 자신들을 대변하는 정신적 기둥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젊었을 때부터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사회에서 최초로 아바나 대학에 입학했던 뛰어난 인재였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쿠바 한인 사회 디아스포라의 기원에 불을 지핀 인물이자 쿠바 한인 사회 공동체를 부활시킨 인물이었다.

2006년 1월 19일 지병인 동맥경화 수술을 받았지만 헤로니모는 먼 이국 땅 쿠바에서 운명했다. 그리고 쿠바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안치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수술 하루 전 헤로니모는 손자 넬시토(한국 이름 임운택)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있어라! 또 보자"

헤로니모는 수술실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 『헤로니모』가 주는 감동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한 혁명가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청년이 쿠바 혁명 이후 투철한 신념의 코뮤니스트로서 변모하여 열정적으로 쿠바 사회에 헌신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헤로니모는 자신의 뿌리! 바로 한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넘어선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상적 갈등과 내적 변화를 겪었다.

젊은 날 혁명가로서 그리고 혁명 이후 코뮤니스트로서 헤로니모는 삶 전체를 일관해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 그것은 헤로니모 개인의 인품과 세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적 매력이었다.

마지막으로 쿠바 한인 사회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동포애를 실천함으로써 디아스포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데 남은 삶을 바친다. 그 모든 순간에 헤로니모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간직한 채,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며 실천했다.

혁명가로서 때론 코뮤니스트로서 그리고 쿠바 한인 사회 디아스포라의 기원을 부활시킨 정신적 기둥으로서 자신의 온 생을 바치며 헌신했다. 헤로니모가 시대의 격변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일관되게 간직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헤로니모가 자녀들에게 쓴 편지글 속에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그리고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조국은 순수하게 나라를 지킨 조상들의 유산이자 순교자들의 제물이다. 조국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영감이다. 조국이라는 개념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다. 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만 해당되거나 이기적 민족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애국심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착취 받고 고통 받는 이들의 희망과 눈물과 합쳐져야 한다. 조국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존엄이자 명예이다."

1905년 하와이로 그리고 일부는 멕시코로 노예 이민을 떠났을 때 애니깽 농장에서 한인들은 채찍을 맞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1910년 망국 소식을 접하고 그들은 한데 모여 대성통곡했다. 돌아갈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출처 : 영화 <헤로니모 임>)

멕시코 한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1921년 쿠바로 떠났다. 애니깽 가시에 수십 군데 찔리면서도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고난 속에서도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태며 변화와 희망을 일궜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분단 5년 만에 동족상잔인 6·25전쟁이 터지자 쿠바 한인들은 절망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 상황에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9년 지난해 100세를 맞은 쿠바 한인 2세대 배이형 할아버지가 바로 그분으로 이렇게 일갈했다.

"south korea? north korea? 두 개의 코레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나야! 하나!"

혁명을 통해 인류애를 실천했던 헤로니모! 동포애를 실천함으로써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정체성으로 승화시킨 헤로니모! 그의 박애정신을 이해하는 쿠바 한인들은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탄식하고 절망했다.

영화 『헤르니모 임』이 개봉된 지 80일이 지났다.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평점이 9.3으로 매우 높다. 문제작이자 빼어난 작품임에도 관객은 15,000명에 머물러 있다. 종영되기 전에 좀 더 많은 분들이 헤로니모의 열정적인 삶과 사랑을 통해 한 위대한 인물의 감동적인 서사를 만나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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