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의 유품을 약탈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한 일본의 만행(蠻行)

굴욕적이고 비참했던 임진왜란이란 7년의 전쟁은 우리 조선 장수들의 희생으로 힘겨운 승리의 기쁨을 안고 막이 내려졌다. 그런데 또 다시 1910년 일본에게 조선제국의 국권을 피탈(被奪)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서 일제 강점기 까지 300여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선 조정에서는 어떤 정치를 했기에 이렇게 또 당했을까? 필자가 2019년 2월 5일 ⌜한겨례 온⌟에 게재한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 을사조약(乙巳條約)⌟이란 글을 쓸 때, 억울하고 분하여 가슴이 미어터지는 상태가 재발된다. 

벌교는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고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인지 벌교 인근의 곡물과 생필품을 일본으로 운송하려는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한다. 타 지역에 비해 일제에 항거하는 벌교의 주민이 많아 이를 다스리기 위해, 좁은 고을이었는데도 이곳에 주재소(駐在所)를 두었다. 그 곳에 근무한 일본 헌병이, 과거 전란 시 전방삭 장군이 일본군을 무수히 사살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 전방삭 장군 아들 전홍례가 활을 쏘던 사대

전방삭 장군의 후손인 장손이 벌교 영등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순사(巡査)들을 데리고 와서 집을 샅샅이 뒤져 장군의 간찰(簡札)과 문적(文籍)등 유품을 모조리 약탈한 뒤 집을 불질러버렸다. 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22년 전후로 추정한다. 다행스럽게도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과 ⌜상서문⌟이 남아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은 이웃집에서 잠시 빌려갔고, 상서문은 너무나 훼손되어 복사하러 이동되었기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손의 한이 맺힌 일이기에 잊지 않고 대대손손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복원 전)                
                   (표지가 망가져 가의(加衣) 상태임)                       

동향인이며 같이 전투한 최대성 장군의 정충비의 수난도 알아본다.
충절사지(忠節祠誌)에 의하면 이 정충문(旌忠門)은 “일제의 만행으로 흔적 한 점 없는 모의장군 유적지를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지방민의 통분의 원한에 따라 1922년 9월 밤에 ‘경주최씨  정충문(慶州崔氏旌忠門)’이라는 4척 단비(四尺短碑)를 은밀히 세웠는데 이마져도 없앤다는 밀보(密報)를 접하고 인근 산에 매장하였다가 광복 후에 발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경주최씨 정충문

전방삭 장군 유품의 약탈과, 최대성 장군의 정충문 파괴 소식은 같은 시기로 보여 진다. 일제가 우리 민족정신 말살을 위한 이 지역 사례를 더 들추어 본다.

우선 전방삭 장군과 관련된 사실로 마을 이름 개칭이다. 원래 현 영등(永登)은 낙안군 남하면 연등(蓮嶝)이었고 전방삭 장군의 의병훈련지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인 면 직원이 영등(永登)으로 개칭해버렸다. 당시 벌교읍 72개 마을 중 지명이 개칭된 곳은 단지 영등 뿐이었기에 그 이유는 짐작할만하다. “전방삭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훈련했다는 민족적 정기를 말살하여 후세들이 상기할 수 없도록 뿌리 채 뽑아버리기 위해서였다”라는 음흉한 마음을 뻔히 알 수 있다.

▲ 영등마을 유래판(보성군제작)

후일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지역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지역에서도 민족정신 말살을 위한 토벌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1907년 일경은 조선폭도 토벌 계획에 따라 고광순 의병장을 비롯한 제천의 유인석, 남원의 고광수 등 전국적으로 50여 채의 의병장 가옥을 불태워 버렸다.” 는 사실과, “창평의 녹천 선생 가(家)는 임진왜란당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제봉 고경명 선생과 함께 순절한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선생의 종택으로 이때 불태워 졌다.” 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토록 일제의 악랄한 민족정기 말살에 우리는 속수무책 살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국권을 회복하여 대한민국이 세계 상위의 부강한 나라로 거듭나게 된 우리 민족적 저력을 다시 한 번 자랑하며, 오늘을 일구어낸 선조들의 희생에 무릎 꿇고 백배하며 영혼을 끝없이 찬양한다.

일제 강점기에 낙안군에 속해있던, 현 벌교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을 들추어 본다.

담살이 머슴으로 살고 있던 안규홍(安圭洪)이란 청년이, 벌교 5일장으로 나무를 팔러왔다. 그런데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가면서 무고한 우리 주민을 채찍으로 후려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일본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려 맨주먹으로 때렸는데 죽고 말았다. 그 후“벌교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필자가 외지에 여행할 때 나눈 인사로 벌교에 살고 있다고 하면, 대뜸 하는 말이 “벌교에서는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했는데”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의도는 조폭 같은 주먹으로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을 핍박한 일본 헌병을 때려눕힌 의리의 주먹이요,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는 주먹이라고 설명하면 그때서야 주먹의 뜻을 이해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벌교의 주먹은 의리의 주먹이었음을 각인하고 싶다. 

후일 안규홍은 담살이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을 무수히 섬멸하였다. 그리고 벌교의 열혈 청장년들에게 일본인들이 혼쭐나게 당하기도해서 일본인들은 벌교를 눈에 가시로 알았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낙안군에 속해있던 벌교를 보성군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당시 벌교읍 인구는 약 12,000여 명이었고 일본인은 약 500여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보식의 집들이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보성여관⌟과 ⌜금융조합⌟건물이 남아 있다.

▲ 안규홍 담살이 의병 일행

1919년 3월 1일 33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이 운동은 급속도로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독립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전라남도에서 맨 처음 독립선언을 한 지역이 바로 현 벌교 장좌 장터였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지방에서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대표를 33인 선출했다. 그 인원을 거주지 별로 보면  승주군 낙안(현 순천시)인이 절반정도요 벌교(보성군)인이 절반정도였다. 여기에서 보듯 벌교지역민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애국의 정신이 남달리 투철한 지역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독립만세운동(캡처)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벌교인 들은 의리가 강하고 조국을 지켜내고자 하는 나라사랑의 정신이 투절한 탓에 희생도 많이 따랐다. 옥중에 갇혀 병신이 되기도 하고, 옥사를 당하기도 한 분들이 많았다. 이러한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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