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22)] "은진 송씨 종가 며느리로 살아온 이야기 들어보소"

신중남(87, 옥천읍 문정리)씨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 기자l승인2020.02.21l수정2020.02.2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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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남씨

 

■ 내가 호동 왕자를 미워했던 이유

나는 1932년 대전시 용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신명재)는 7대 종손으로 주변에서 '대종손(大宗孫)'으로 불렀다.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33세까지 독선생(獨先生)을 두고서 한학 공부를 할 정도로 종손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많이 배운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7남매 중 다섯째였던 나도 아버지가 들려주는 덕담을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작 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선화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는데, 상급 학교에 진학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너무 아쉽다.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자주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였다.

"옛날 낙랑이라는 나라에는 적군이 침략하면 스스로 울리는 '자명고'라는 북이 있었단다. 낙랑 정벌을 준비하던 호동 왕자는 사랑하는 낙랑 공주에게 그 북을 찢어 달라고 부탁했지. 낙랑 공주는 거절하지 못하고 북을 찢고 말았어. 호동 왕자가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공격했지만 자명고는 울리지 않았고, 결국 낙랑은 멸망했단다."

사실 이 이야기에 공주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공주였으니 일자무식으로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런데 공주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자명고를 찢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낙랑 공주를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자명고를 찢지도 않은 나까지 공부하지 못하게 만든, 호동 왕자를 미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딸들의 공부를 위해 나설 수도 없는 시대였다. 충주 박씨 가문에서 시집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어머니에게는 심지어 자기 이름도 없었다. 호적에도 '박씨'라고만 기록되어 있었고, 불쌍한 어머니는 평생 아명인 '언년이'로 불리며 사셨다. 여자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 신중남씨. 그 옆으로 보이는 서예 작품은 남편이 생전 쓴 작품.

 

■ 고학생 출신 교사에게 시집오다

나는 21세가 되던 해인 1952년 은진 송씨 가문으로 시집왔다. 신랑은 초등학교 교사인 송용섭이었다. 신랑이 1933년생으로 나보다 한 살 적었다.

회덕읍 와동리 은진 송씨 종손인 남편은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숙부 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 했지만 집안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용섭이는 반드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선생님의 강권으로 간신히 대전에 있는 야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고학생(苦學生)이 되었고, 신문 배달 등을 하며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남편이 18세가 되던 해인 1950년 전쟁이 터졌다. 남편은 철도국에서 일하던 숙부의 가족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당시 우리 동네 어른 한 분이 남편의 숙부와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분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우연히 직장 동료를 만났고, 그와 함께 있던 건실한 고학생 청년을 발견한 모양이다.

"젊은 친구가 아주 건실하고 잘 생겼어요. 거기에 약빠르기까지 하더군요. 놓치면 후회할 겁니다."

동네 어른이 중매를 서면서 아버지에게 전한 추천사였다. 얼마 후 나는 남편이 숙부와 살고 있던 회덕읍 와동리로 시집갔다. 하지만 교사 자격증을 딴 남편이 이원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으면서 한 달 만에 옥천군 이원면으로 이사했다.

이원초등학교 옆 초가집에 셋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숙부 댁에서 나올 때 받은 것은 사발 2개, 대접 2개, 접시 2개가 전부였다. 당시 교사의 처우는 열악했다. 월급 200원은 나무 한 짐과 쌀 두 말 사면 그만이었다. 발령을 받고 먹을 쌀이 없어 동료 교사에게 쌀 한 말을 빌려야 했다.

▲ 3년 전 쯤부터 집에 있는 재료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프면서 속상한 마음에 붓을 들었는데, 그림은 그런 내게 위로가 돼주었다.
▲ 3년 전 쯤부터 집에 있는 재료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프면서 속상한 마음에 붓을 들었는데, 그림은 그런 내게 위로가 돼주었다.

 

■ 13번 제사는 종가 며느리의 운명

앞에서 말한 대로 남편은 은진 송씨 종손이었다. 그래서 살림을 나면서 가문을 대표해 조상에 대한 제사도 지내야 했다. 가마니로 가려서 억지로 부엌을 만든 궁색한 셋집 살림이었지만 그것이 종손의 운명이었다.

교사의 박봉으로 제사까지 지내려니 당연히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 종중 어른 한 분이 우리 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미안하네.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근심어린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분이 갑자기 무릎을 쳤다. 그러더니 활기찬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아, 맞다! 증조부가 자네 숙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은 종산(宗山)이 있었네! 내가 그 땅값을 받아다 주겠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네 사정이 좋지 않으니 굳이 숙부에겐 말하지 말고 그냥 쓰게. 명색이 종손인데, 이렇게 쓰러져가는 셋방에서 제사를 지내서야 되겠나."

그래서 이 목돈으로 집을 사서 옥천읍 삼양리로 이사할 수 있었다(그런데 마음 착한 남편은 이 사실을 숙부에게 솔직히 말씀드렸다).

한편 목사리 선영에는 조상 17명을 모신 묘지가 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시사(時祀)를 지내야 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모두 12회나 되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나는 종가의 며느리였기에 그 모든 제사를 지금까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지내 왔다.

그런데 이 종산을 공동 소유로 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종손 명의로 해 왔는데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일주일 동안 집에 가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남편도 손을 들고 말았다.

"누구 소유로 하든지 결국 송씨 집안 땅인데 들어줍시다."

하지만 이것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 문제가 되고 말았다. 사업이 어려워지자 남편이 "조상님들 볼 면목이 없다"면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탄식하다 나와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공동 소유로 하자는 사람의 처가 쪽에 절반을 헐값에 넘기고 집을 시가보다 싼값에 팔아 빚을 갚았다.

이후에도 공동 소유로 하자는 사람의 후손이 산을 잡히고 빚을 얻어쓰는 바람에 고초를 격기도 했다. 그것도 양복 입은 외지인이 남의 산에 와서 측량을 하는 바람에 알게 됐다. 그들은 20일 이내에 빚을 갚지 않으면 경매에 넘기겠다고 했다. 이를 뒤늦게 알고 자식들이 해결하느라 애를 쓰기도 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상하다.

 

■ 서울대, 고려대 운동권 아들 이야기

남편의 교사 생활은 2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원초에서 시작된 교사 생활은 안내초를 거쳐서 삼양초에서 끝났다.

남편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열풍이 불기 시작할 무렵 페인트 사업에 잠시 손을 댔다. 군수와 부군수 등 공무원 약속만 믿고 옥천을 비롯한 충북 일대 마을의 지붕에 칠할 페인트를 공급할 때만 해도 전도가 양양했다. 하지만 대금만 떼이면서 인생의 쓴맛을 보고 말았다. 남편은 이후 농사를 지으며 종친회 일에만 전념했고, 2015년 83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4남매를 얻었다. 결혼 초기 10년 가까이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초산을 했다. 장남 치우가 탄생했을 때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다. 이후 차남 치용, 삼남 치양, 장녀 현이 차례로 태어났다.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살 만했던 것은 4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식들은 우리 부부에게 희락(喜樂)만이 아니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선물했다.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차남 치용과 삼남 치양이 대학에 다닐 무렵이 하필이면 대학가에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옥천중, 천안북일고를 다녔던 치용은 서울대에 들어갔다. 옥천중, 옥천고를 졸업한 치양은 고려대에 합격했다. 특히 치양은 옥천고를 다닐 때 총학생회장을 맡는 등 리더십도 발휘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치용과 치양은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아마도 농촌에서 성장하며 착한 심성을 지녔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두 아들을 둔 덕분에 우리 부부는 최루탄 연기가 날리는 대학가에도 가봤고, 죄수복을 입은 아들이 오히려 그 무서운 판사와 검사를 준엄하게 꾸짖는 법정에도 가봤다.

농촌 생활이 궁핍해 아들을 찾아갈 때마다 여비를 마련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서로 잘 알기에 남에게 함부로 돈을 꾸어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치양이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동생에게 20만원을 빌려서 서울로 갔을 때의 일이다.

"고맙습니다."

나는 형사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형사가 능글능글 웃으며 물었다.

"내가 치양이를 잡아왔고 때렸는데 왜 고맙다고 하십니까?"

"형사님이 내 아들을 잡아온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했습니다."

나는 형사 앞에 엎드려 절까지 했다. 많은 대학생이 의문사 하던 시절이었다. 그제야 형사의 표정과 태도가 진지하게 바뀌었다. 나는 경찰서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형사 수십 명이 먹을 빵과 만두, 만둣국을 사서 올려 보냈다.

 

■ <금강경> 읽으며 모든 업보 풀어

학창 시절의 4남매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종산을 지키기 위해 집을 팔고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학비와 생활비를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치용이 열흘 동안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버티다 병이 나서 집으로 온 적도 있다. 치양의 대학 재학 시절이 남편의 부도 시기와 겹치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던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보는 나의 안목이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나는 TV 뉴스를 빼놓지 않고 본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뉴스 뒤의 정치적 의도 같은 것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외교, 국제 문제도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날 때는 하루 종일 TV를 봤다. 금강산도, 백두산도 빨리 가보고 싶다.

나는 요즘 틈날 때마다 불경을 읽고 있다. <금강경>에 이어 <천수경>을 읽기 시작할 무렵 평택에서 수의사로 일하며 지역운동에 헌신하던 차남 치용이 정의당 소속의 경기도의원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범대를 나와 대전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딸이 시부모를 잘 모시고, 사위도 나를 자주 찾아 주니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았지만 행복하다.

앞으로도 <금강경>과 <천수경>을 읽으며 종손의 아내, 종가의 며느리, 운동권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오며 맺혔던 모든 업보를 풀어나가고 싶다.

▲ 금강경, 천수경을 읽으며 염주를 돌린다.
▲ 금강경, 천수경을 읽으며 염주를 돌린다.
▲금강경, 천수경을 읽으며 염주를 돌린다.
▲ 금강경과 천수경은 거실 탁자 위에 늘 놓여있다. 그 옆에 염주와 하얀 장갑. 염주를 돌리다 보면 손가락이 까져 장갑을 끼고 있다.

 

무조건 믿어주시고 기도해주신 어머니

둘째아들 송치용(경기도의원)의 편지

어머니의 삶은 삼종지도(三從之道)로 일관한 여자의 일생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7대 종손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셨지요. 그러나 가르치는 대로 영특해지는 딸을 걱정해서 국민학교도 졸업시키지 않으신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종갓집으로 시집오신 어머니는 외롭고 힘들게 자라셔서 사람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버지의 실수는 덮어주시고, 4남매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시느라 집안이 어려워지면 직접 나서서 생활을 꾸려 가시면서도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주셨습니다.

아들이 감옥을 드나들고 학교에서 제적이 되어도 한 번도 화를 내거나 혼내신 적이 없습니다. 자식을 믿어주시고 기도만 해주신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 4남매가 반듯하게 성장하고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 생각합니다.

80세나 되어 발견한 어머니의 그림 그리는 재능은 일찌감치 눈치 챈 어머니의 지적 잠재력을 확인하는 것이어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요즘 태어나셨으면 공부도 실컷 하시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셨을 테지만 지금의 삶도 충분히 잘 사셨습니다.

자식을 위한 기도를 넘어 매일 매일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자식들 잘 사는 모습 오래도록 볼 수 있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 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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